#116
하예진을 확인하자마자 진하가 재빠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팀장님!”
“뭔가?”
“5분만 시간을 더 주시면 안 될까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직 머리가 약간 어지럽습니다. 혹시 조금만 더 쉬어도 될까요?”
진하의 말에 팀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억지로 진행시킬 수도 없었기에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하지만 감점 1점이다.”
“네.”
몸을 일으켰던 팀장이 다시 주저앉았다. 다른 예비 헌터들 역시 일어나려던 몸을 원상 복귀시켰고 그중에서 오직 하예진만이 빠르게 진하에게 다가왔다.
“진하야…….”
“잠깐만 내가 먼저 물어볼게. 우선 지금 우리 시간선의 너는 깨어났어?”
진하의 물음에 하예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진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번째 시험이 끝나고 상태 이상이 풀린 것을 확인했기에 깨어났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직접 확인하고 나니 이렇게 안도감이 들 수 없었다.
“그리고 하나 더, 너는 몇 개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
“5개야.”
생각보다 많은 숫자였다. 그렇다는 건 그만큼 하예진을 설득시키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았다.
‘어떻게 설득시키지?’
솔직히 말하자면 감도 안 잡혔다. 하예진을 어떻게 하면 설득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고 애초에 뭘 원하는지도 감이 안 잡혔다.
“진하야…….”
“아, 미안.”
생각에 잠겼던 진하는 하예진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고민할 것도 없이 물어보면 될 것을 괜히 고민하고 있었다.
“예진아, 있잖아…….”
“김진하, 5분 지났다. 혹시 아직도 어지럽나?”
팀장이 진하를 쳐다보며 물었다. 진하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바로 준비하도록 바로 진입한다.”
팀장이 그 말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진하는 몸을 일으키며 하예진에게 말했다.
“지금은 대화 나누기 어려우니까 조금 이따가 자세히 얘기하자.”
“응, 알았어.”
하예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하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인 후 몸을 일으켰다.
“빠르게 끝내자.”
* * *
“진하야 근데 괜찮을까?”
“뭐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빠르게 끝내는 건…….”
하예진이 말끝을 흐렸다. 그녀 역시 아무도 안 다치고 빠르게 해결하는 게 좋다고는 생각했지만 진하의 행동은 약간 과한 감이 있었다.
“어쩔 수 없었어. 그렇다고 약한 척하면서 시간을 끌 수는 없었잖아.”
이제 겨우 2번째였다. 그리고 하예진과 빠르게 이야기해야 할 상황이었기에 진하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뿐이었다.
빠르게 앞장서서 문을 열고 공격하는 쉐도우 울프를 죽인 것. 그게 진하가 생각하기엔 가장 베스트였다.
“하지만 이 시간대에서 네가 사라진 뒤에는 어떡해?”
“음…… 그건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아니…… 근데 진짜 어쩔 수 없었잖아. 어차피 금방 묻힐 거야.”
진하의 말에 하예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이런 애라는 건 알았지만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빠르게 나왔고, 시험도 무사히 끝마쳤잖아? 그러니 이제 이야기 좀 하자.”
진하의 말에 하예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미 지나간 일을 고민하는 건 비효율적인 일이긴 했다. 무엇보다 수많은 기억들로 인해 하예진 역시 머리가 복잡했기에 진하와의 대화가 필요하긴 했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예진아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어?”
“세상이 멸망할 거라는 거. 그리고 네가 나를 설득시켜야 된다는 거 정도? 그거랑 기억들이 다야.”
이기수와 거의 똑같았다. 아무래도 어떤 사람이든 간에 똑같은 지식을 주입받는다고 확신해도 될 듯했다.
‘뭐, 사서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흠…… 그럼 혹시 너 일어난 지 얼마나 됐어?”
“약 이 주 정도. 나야말로 묻고 싶은 게 산더미야. 멸망은 뭐고 넌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거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아니, 그거야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지금 여기 있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지?”
“모르겠거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빠짐없이 말해!”
왠지 모르게 화가 나 보이는 하예진의 모습에 진하는 한숨을 내쉬면 게이트 폭주가 끝난 이후부터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하예진은 자격이 없기에 절반 이상을 못 알아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참을 설명한 덕에 대충이나마 이해를 시킬 수 있었다.
“아무튼 이게 끝이야. 그나저나 이 주라…… 현실과 거의 1대 1인가 보네.”
이 주면 진하에게 걸린 스킬이 풀리자마자 깨어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시간에 맞춰 이기수 역시 사라졌다고 했으니 1대1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싶었다.
“예진아 아무래도 빠르게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1대 1로 시간이 흐른다는 걸 안 이상 시험을 빠르게 끝내야 했다. 뱀파이어 로드의 말대로라면 현 관리자는 한동안 관여를 하지 못하겠지만 그게 언제까지일지는 모르니 빠르게 가는 게 정답이었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알아. 무슨 말 하는지. 네가 빠르게 나갈수록 준비할 시간이 많아지겠지.”
하예진의 말에 진하가 안도했다. 5개나 되는 기억 때문에 혹시나 삶을 포기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그건 아닌 듯싶었다.
“그럼 나를 인정하는 거야?”
“아니.”
“어? 왜?”
진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예진을 바라봤다. 분명 그가 빨리 나가야 되는 이유도 알았고 이해한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인정하지 못한다는 거지?
“네가 빠르게 나가야 멸망을 막을 준비를 할 수 있다는 건 알겠어. 근데 그래도 확률은 1% 밑이지?”
“어…… 그렇지?”
“그럼 넌 나가면 엄청 바쁘겠네.”
“당연하지?”
“내가 설득당하는 조건이야. 나랑 한 달간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지내줘.”
하예진의 말에 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진하는 하예진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시가 급한 와중에 한 달이라는 시간을 소비하라는 건 낭비 중의 낭비였다.
“예진아 내 말 이해한 거 아니었어?”
“이해했어. 근데 그 시험관이라는 분이 그랬다며. 시간은 상관없다고.”
“물론 그런 말을 하긴 했는데…….”
“그들이 신 같은 존재인데 괜히 너한테 그런 말을 했을까?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정말로 네가 빨리 끝내든 늦게 끝내든 상관없다는 소리일 거야.”
그녀의 말에 진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분명 그녀의 말대로 사서가 그런 말을 했었고 사안의 심각성을 아는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빨리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시간을 낭비하는 건…….”
“시간 낭비 아니야.”
“아니, 아무것도 안 하고 한 달은 좀 그렇지 않아?”
“후…… 그 사람이 나를 여기로 보냈어. 신 같은 존재라며, 그럼 그 존재가 내가 뭘 원하는지 몰랐을까?”
“아니, 아마도 알았겠지?”
“그럼 된 거 아니야? 그리고 네가 정 그렇게 말하면 내가 이유를 만들어 줄게. 너 지금 새로 능력 얻고 제대로 못 쓰고 있지?”
“어…….”
하예진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존의 투지라는 스킬도 생기고 과거의 후회도 바뀌었다. 사용하는 데 문제는 없긴 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스킬로 강화시킨 몸을 100% 사용하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어차피 나가서도 네가 해야 할 건 수련이야. 그렇다면 여기서 수련하고 익숙해져서 나가.”
“아니, 그래도…….”
“너, 다음 시험이 안전하리란 보장 있어? 저번 시험은 이기수랑 게이트 보스를 잡았던 거라며.”
“그치…….”
“네 목숨이 달린 시험이라고 말했어. 그럼 빠르게가 아니라 확실하게 통과할 걸 전제로 두고 행동해.”
하예진의 말에 진하가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을 생각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아무튼 난 한 달이라고 말했어. 그 기간 동안 나갈 생각은 절대 하지 마. 그리고 하나 더! 던전이랑 게이트 내려갈 생각도 하지 마. 오로지 협회에서 훈련만 가능해.”
“아니 그건 좀…….”
“싫어? 그럼 두 달로 늘릴까?”
“한 달간 쥐 죽은 듯이 있을게.”
하예진의 말에 진하가 한숨을 내쉬며 수락했다. 여기서 더 대화를 나눠 봤자 진하의 손해였다. 적어도 이곳에선 진하가 철저하게 을이었고 하예진이 갑이었다.
‘그냥 시험 하나 날로 먹는다고 생각하자.’
적어도 이기수 때처럼 싸우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한 달간 시간을 보내면 통과된 거에 만족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알았어. 그럼 한 달간 너랑 같이 지내면 되지?”
“어, 아 맞다. 너, 네 원룸 빼라?”
“어?”
하예진의 말에 진하가 벙찐 얼굴로 그녀를 봤다. 원룸을 빼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네가 제대로 하는지 감시할 거야. 그러니까. 원룸 빼고 여기서 생활해. 어차피 투룸이라 문제 될 건 없지?”
‘아니, 매우 문제가 많은데요?’
그렇게 따지고 싶었지만 진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여기서 따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그럼 어서 가서 네 짐 가져와.”
그제서야 하예진은 웃는 얼굴로 진하에게 말했다.
* * *
삼 주 후, 협회 내 훈련실.
“후우…….”
진하는 숨을 고르며 뜨거워진 몸을 식혔다. 온몸이 뻐근하긴 했지만, 온몸이 쑤시거나 그러진 않았다.
“이제야 익숙해졌네.”
완전히 적응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어차피 두 가지 스킬 모두 다 강화 스킬이었기에 금방 적응하리라 생각했었다.
“이래서는 남은 시간 동안 3단계는 엄두도 못 내겠네.”
생존의 투지와 과거의 후회 2단계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데에만 3주라는 시간이 걸렸다. 몸에 부하가 거의 가지 않는 수준의 스킬 사용인데도 3주나 걸렸으니 몸에 부하가 가는 3단계는 포기해야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쯧, 처음 생각은 폐기해야 되나?”
원래는 3단계를 아주 짧게 끊어 쓸 계획이었다. 3단계는 단계를 올리자마자 몸이 부하가 걸리기 시작하니까 공격하는 순간이나 방어하는 순간에만 단계를 빠르게 올렸다 내린다면 최소한의 리스크로 최대의 효율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단계조차 이렇게 오래 걸린 걸 생각하면 그냥 나머지 일주일은 생존의 투지나 2단계 스킬 사용의 숙련을 늘리는 게 차라리 더 나을 듯싶었다.
“뭐, 이 정도만 해도 꽤 강한 편이니까.”
지금 이 상태만 봐도 신체 스펙만 보면 SS급 정도는 충분히 되고도 남았다. 다만 공격형 스킬이 없어 그냥 몸만 그런 상태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긴 했다. 적어도 16층 아래로 내려가는 데에 있어 방해는 안 될 테니까.
‘무엇보다 부족한 공격력은 문방구 아티팩트로 채우면 되고.’
생각을 마친 진하는 간단하게 짐을 정리했다. 마음 같아선 더 훈련하고 싶었지만 스킬 쿨타임 중이기도 했고 오늘도 늦으면 하예진이 죽여버린다고 했으니 이 정도에서 마무리 해야 될 듯싶었다.
―문자 왔어!
때마침 한쪽에 놓아둔 진하의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이 시간선에서 진하에게 문자를 보낼 사람은 하예진 한 명밖에 없으니까.
<올 때 삼겹살 사 와.>
단순한 심부름 메시지. 진하는 그 메시지에 피식 웃고는 핸드폰을 쑤셔 넣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지난 3주 동안 하예진은 헌터 생활도 접고 완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하는 그녀의 모습에 엄청난 이질감을 느꼈다. 진하가 원래 아는 하예진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대답을 하기는커녕 회피만 하니 진하로서는 답답할 지경이었다.
“하아…… 모르겠다. 때가 되면 이야기해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