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이주 후, 빠르게 층을 내려가 16층에 도착한 둘은 커다란 동굴 안에 있는 문을 보며 서로를 마주 봤다.
“네가 기억하는 패턴 틀린 점은 없지?”
“틀린 점 없어, 다른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야.”
“뭔데?”
“너나 내가 죽으면 다시 되돌아가는 거냐? 아니면 그냥 죽는 거냐?”
이기수의 물음에 진하가 헛웃음을 지었다. 왜 안 물어보나 했는데 그걸 여기서 물어볼 줄이야…….
“나는 확실하게 죽을걸? 너는 모르겠다. 왜? 쫄리냐? 그럼 그냥 통과시키면 되는 거 아니냐?”
“죽을지도 모르는데 안 쫄리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 그리고 통과 못 시킨다.”
“왜?”
만약 진짜로 죽는다면 차라리 여기서 통과하는 게 나았다. 여기서 죽는다면 우리 시간선의 사람들을 지키지 못할 테니까.
“그거야 당연히 여기 있는 사람들도 살려야지.”
“우리 시간선 아니다만?”
“그거랑 관계없어. 만약 너랑 내가 사라지면 여기는 백 퍼센트 전멸이야.”
“확실히 그렇긴 하지.”
시험을 통과시키면 이 시간 선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진하와 이기수가 사라질 수도 있었고, 아님 원래 있던 이기수와 또 다른 진하가 빈자리를 차지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지금 둘이 넘어가면 이 시간 선의 사람들은 거의 높은 확률로 많이 죽는다는 거였다. 그렇기에 이곳 보스에 대한 정보를 아는 이기수와 진하가 남아야 했다.
“너 사실 이주 전에 말한 설득하라는 말도 사실 이것 때문에 제안한 거지?”
“뭐…… 절반은?”
이기수의 말에 진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목숨과 시간 선만 지키면 될 텐데 굳이 이곳의 사람들까지 구하려는 걸 보면 역시 오지랖 넓은 이기수다웠다.
“그래, 가자. 나도 말로만 들었던 16층 게이트 보스 낯짝 한번 보자.”
진하의 말에 전격을 모으고 있던 이기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문을 열어젖혔다.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고 드러나는 커다란 공동, 그리고 그 안에 드러누워 있는 커다란 드래곤 하나.
[인간인가? 돌아…… 크아악!]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근엄한 목소리로 진하 일행을 맞이하던 드래곤이 이기수의 전격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보며 이기수는 재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A 대형으로!”
그 말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헌터들이 재빠르게 드래곤의 양옆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진하 역시 그들을 따라 몸을 놀리며 스킬을 시전했다.
<과거의 후회 2단계가 발동합니다.>
<스킬: 생존의 투지가 발동합니다.>
진하는 도핑되는 신체를 느끼며 드래곤을 향해 달려드는 이기수를 바라봤다.
‘상성이 좋아서 다행이란 말이지.’
이곳, 16층 게이트 보스는 드래곤이었다. 그것도 이기수에게 유리한 수 속성 드래곤, 공략법까지 아는 이상 절대 질 일은 없었다.
[이것들이!]
정신을 차린 드래곤이 정면에서 달려드는 이기수를 향해 브레스를 발사했다. 이기수는 드래곤이 입을 벌리는 모습에 씨익 웃으며 한쪽을 향해 손을 뻗어 전격을 뿜어냈다.
파지직! 지이잉!
이기수가 쏘아낸 전격은 미리 헌터들이 꽂아 넣은 쇠기둥 중 하나에 적중하더니 이내 전격을 쏘아낸 이기수를 빠르게 잡아당겼다.
“지금이야!”
그 모습을 확인한 진하가 소리쳤고, 모든 헌터들이 진하의 외침에 드래곤의 목덜미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콰과곽! 으지직!
헌터들의 공격에 찢어지는 드래곤의 목덜미, 자력을 이용해 브레스를 피한 이기수가 곧바로 상처 난 드래곤의 목덜미를 향해 쇠기둥을 던졌다.
으득!
뭔가 어긋나는 소리가 드래곤의 목덜미에서 울려 퍼졌다. 진하는 그 모습에 첫 단추가 제대로 꿰어졌음을 직감했다.
‘이걸로 브레스는 당분간 쓰지 못한다.’
브레스가 통과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일부 망가트렸다. 물론 드래곤의 재생력을 생각하면 다시 금방 회복하겠지만, 적어도 그 시간 동안 가장 위협적인 무기 하나는 봉인했다.
“B 대형!”
이기수도 확인했는지 곧바로 다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모든 헌터들이 드래곤의 시야를 어지럽히며 이곳저곳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크아악! 죽여버리겠어!]
“조용히 해!”
비명을 지르는 드래곤을 향해 이기수가 전격을 쏘아냈다. 그로 인해 다시 멈칫하는 드래곤. 진하는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조롭네.”
드래곤의 가장 큰 무기인 브레스를 봉인하고 정신없이 몰아치고 있으니 이대로만 잘 유지하면 끝날 것 같았다. 특히, 혹여나 다른 드래곤이거나 다른 공격 패턴을 가졌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것까지 같았다.
‘과거에도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과거 진하가 있던 시간선에서는 드래곤에 의해 절반이 넘는 헌터들이 떼죽음을 당했었다. 마법도 마법이었지만 브레스의 위험성을 모르고 당한 게 컸었다. 이기수 역시 브레스를 막으려다 빈사 상태에 빠졌으니까.
[워터 스트라이크!]
그때, 집요하게 공격당한 드래곤이 사방으로 마법을 뿌려 댔다. 진하는 검을 들어 바로 코앞으로 날아오는 마법 하나를 베어 냈다.
“왼쪽 눈!”
<과거의 후회 3단계가 발동됩니다.>
허공을 향해 외친 진하가 곧바로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느려지는 헌터들. 아니, 정확히는 극도로 빨라진 진하가 드래곤의 눈을 향해 달렸다.
카가가각!
진하의 검이 드래곤의 눈에 얕게 파고들었다. 최대한 돌진하는 추진력을 이용해 검을 휘둘렀건만 효과가 크지 않았다.
‘뭐, 상관없나?’
진하는 뒤늦게 감기는 눈꺼풀을 바라보며 검을 놔둔 채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진하가 물러난 자리로 여러 다발의 전격이 쏟아졌다.
[크아악!]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르는 드래곤, 진하는 최대한 뒤로 물러나 스킬을 해제했다.
<과거의 후회가 2단계로 떨어집니다.>
그와 동시에 온몸에 찾아드는 고통들. 진하는 이를 악물며 미리 챙겨 둔 홀리포션을 마셨다.
“크으…… 죽겠네.”
포션을 먹었음에도 지끈거리는 몸을 느끼며 진하는 망가져 가는 드래곤을 바라봤다. 목덜미가 망가지고 한쪽 눈이 익었음에도 드래곤은 연신 헌터들을 몰아쳤다.
“저게 반쪽짜리란 말이지…….”
뱀파이어 로드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 있는 S급 이상의 몬스터들은 거의 다 반쪽짜리라고 말했었다. 실제의 반의반도 안 되는 반푼이라고, 그나마 뱀파이어들은 로드의 피가 있어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대다수는 그럴 거라고 얘기했었다.
“실제는 얼마나 강력하려나…….”
어설픈 모방품임에도 SS급 게이트 보스였다. 사실 SS급 몬스터들이 나오는 곳의 게이트 보스라 SS급 게이트 보스라고 말했을 뿐 능력만 SS급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S급 이상의 헌터들이 수백 번이 넘게 공격을 퍼부음에도 아직까지 건재한 몸뚱이 하며, 강력한 브레스까지 아마도 본 적 없는 SSS급이지 않을까 싶었다.
“나도 도와주고 싶은데 말이야…….”
어느 정도 회복된 몸을 느끼며 진하가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선 같이 공격하고 싶었지만 신체 능력이 SS급인 것에 비해 공격력은 그 아래인 진하가 공격할 방법은 없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거라곤 아직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3단계를 일시적으로 발동시켜 힘으로 예민한 곳에 생채기를 내는 정도였다.
“그럼 가 볼까.”
진하가 다시 한번 3단계 과거의 후회를 발동시키며 미리 약속한 공격 부위로 달려들었다. 진하를 경계하고 있던 드래곤이 곧바로 진하를 향해 마법을 쏘아냈으나 진하는 가볍게 마법을 피하며 반대쪽 눈에다 검을 꽂아 넣었다.
카드드득!
다시 한번 드래곤의 눈에 꽂히는 검, 하지만 이번에는 상처가 나지 않았다. 진하는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고 눈 위로 전격이 쏟아졌다.
[죽여 버리겠다!]
빠르게 눈꺼풀을 닫아 공격을 막은 드래곤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 모습에 물러나던 진하는 다시 몸을 틀어 그대로 드래곤의 턱을 가격했다.
콰아앙!
고개가 젖혀진 드래곤의 입에서 나온 브레스가 천장을 뚫고 지나갔다. 진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A 대형!”
[실드!]
진하의 외침에 드래곤이 흠칫 놀라며 목 주변으로 보호막을 쳤다. 하지만 드래곤의 예상과 달리 모든 헌터의 공격이 공격당했던 왼쪽 눈을 향해 쏟아졌다.
[콰라라락!]
다친 곳을 향해 다시 한번 공격이 쏟아지자 알 수 없는 비명을 내지르는 드래곤. 진하는 그런 드래곤을 비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 * *
쿠웅!
커다란 몸체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에도 헌터들은 긴장을 놓치지 않으며 계속 공격을 쏟아부었지만 드래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끝났다!”
완벽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헌터들이 환호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모두 털썩 주저앉았다.
‘지칠 만하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3시간에 걸친 레이드였다.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진하는 숨을 헐떡이는 이기수에게 다가갔다.
“고생했다. 다 네 덕이다.”
“뭘…… 내가 뭘 했다고.”
자신이 한 것은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이기수. 하지만 진하는 이기수가 가장 큰 공헌자라는 걸 알았다.
온몸이 난도질당한 드래곤의 상처 중 절반 이상이 이기수의 공격에 의해 이루어진 상처였다. 거기다 막판에는 한 대로 맞지 않았음에도 이기수의 스킬 중 하나인 회광반조가 발동했으니 그가 얼마나 무리를 했는지 알 만했다.
“내가 미래가 바뀌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는데 막상 한 게 없네.”
진하가 멋쩍게 말했다. 초반에는 그나마 헌터들에게 받은 여분의 아티팩트를 이용해 상처라도 주긴 했지만 그것들이 모두 부서진 이후에는 딱히 타격을 준 게 없었다.
“뭔 소리야. 너 아니었으면 전멸이었어. 네가 막은 브레스만 몇 번인데.”
이기수가 멋쩍어하는 진하를 칭찬했다. 정말 진하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드래곤의 공격 수단이 몇 가지 없다는 것도 알았고 모든 패턴을 알았음에도 합이 안 맞아 죽을 뻔한 헌터들이 수두룩했다.
그때마다 진하가 드래곤의 마법을 막거나 브레스를 비틀지 않았다면 적어도 절반에 가까운 헌터들이 죽거나 다쳤을 것이다.
“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으니까.”
신체 능력밖에 없는 진하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거대하고 단단한 드래곤의 피부에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없는 진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일시적으로 3단계를 발동시켜 강화된 몸으로 마법을 없애거나 브레스를 맞지 않게 드래곤의 얼굴을 비트는 게 다였으니까.
“뭐, 어찌 됐든 설득은 된 거지?”
“이 상태에서 인정 안 하면 내가 쓰레기지.”
죽은 헌터들이 고작 전체의 약 5분의 1이었다. 고작 2, 30명 죽은 정도면 싸게 먹힌 거였다.
“그나저나 여긴 이제 어떻게 되려나…….”
이기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꽤 많은 헌터들을 살려놨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럽과 미국을 생각하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쪽은 완전히 초토화됐을 테니까.
“거기까지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야.”
진하가 고개를 저었다. 이기수의 맘은 알겠으나 거기까지는 둘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여기를 살리자고 원래 시간선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건 그렇지. 근데 이제 어떻게 해야 돼?”
“뭐가?”
“내가 널 인정했는데 뭐, 바뀌는 게 없는데? 나가는 방법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
그 순간 진하의 시야가 뒤틀렸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
“자, 휴식 끝! 보스룸을 공략할 거니까 준비해!”
진하는 재빠르게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찬가지로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예진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