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증명이라……. 이미 희망이 생겼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진하의 질문에 사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지금 이 상태로도 진하는 이야기를 고쳐 쓸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맞아요. 진하 씨가 이야기를 고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죠.”
“그럼 세 번째 시험은 그런 가능성을 높이는 건가요?”
진하의 물음에 사서가 고개를 저었다. 세 번째 시험을 진행하고 통과한다고 해서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아니었다.
물론 정말 운이 좋다면 높아질 가능성도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주 운이 좋아야 가능한 것이고 평균적으로 생각하면 달라질 가능성은 없었다.
“그럼 굳이 시험을 보는 이유는 뭔가요?”
“두 번째 시험은 할머니의 시험이었지 제 시험이 아니잖아요.”
분명 문방구를 물려받음으로써 가능성이 생긴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가 본 희망이라는 것은 문방구를 물려받는다는 주된 시험내용에서 부수적으로 확인하게 된 것, 확실한 희망이라는 장담을 할 수 없었다.
“당신이 보여 준 모습으로 희망이 생긴 건 맞지만 그 희망조차 불확실합니다. 확실하게 1%라도 바꿀 가능성이 있다는 모습을 보여 주세요.”
“이 시험 당연히 거절이 불가능하죠?”
진하의 물음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을 세 개나 치루기로 말한 이상 모조리 치러야 하는 게 맞았다.
“그놈이 두 번째 시험을 도와주는 대가가 바로 세 번째 시험을 무조건 보게 하는 거였어.”
할머니의 말에 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엔 문방구를 물려받았다고 말했지만 세 번째 시험을 봐야 완전히 물려받는다는 거였다.
“이럴 거면 왜 이미 시험이 끝났다고 말하신 거예요. 그냥 세 번째 시험을 봐야 한다고만 말하는 게 나았을 텐데.”
“그거야 내 시험은 두 개가 끝이었으니까? 어차피 달라진 게 없지 않느냐.”
“제 기분이 이상하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괜히 김빠지잖아요. 할머니”
‘로또에 당첨됐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어? 전산 오류네요. 다시 한번 확인해 볼게요’ 이런 거랑 똑같았다. 완전히 힘이 빡 들어갔던 정신에 구멍을 내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뭐, 아무튼 해야 된다니까 하긴 해야죠. 그래서 세 번째 시험은 뭐예요?”
“간단합니다. 두 번째 시험과 비슷할 거예요. 다만 이번 상대는 자기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일 뿐이죠.”
“다른 사람이요?”
“네. 당신이 아는 사람들과 이제부터 만날 겁니다. 그들에게는 없어진 분기선 중 몇 가지 분기선의 기억을 넣을 거예요. 그리고 이 세상이 결국 멸망한다는 사실까지도요.”
“네? 하지만 그건 자격이…….”
“자격이 없어도 적당선에선 주입이 가능합니다. 아무튼, 당신이 할 일은 간단합니다. 이미 죽었고 앞으로 멸망을 앞둔 세상, 그곳에서 사람들을 설득해 보세요.”
“설득하라고요?”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입니다. 이미 몇 번이고 죽었으니 딱히 결과가 바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겠죠. 그 상태에서 사람들을 설득하세요.”
“잠깐만요. 그건 너무 말도 안 되는 시험이잖아요.”
진하의 항의에 사서가 덤덤하게 진하를 바라봤다. 말도 안 되는 시험, 이미 멸망한다는 미래를 알고 몇 번이고 죽었다는 기억을 주입받았으면 확실히 불가능에 가까운 시험이긴 했다.
“어차피 당신이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이것조차 해내지 못한다면 결국 여기가 멸망할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이건 어디까지나 시험, 원하신다면 포기해도 좋아요. 원한다면 문방구만 물려받지 못하는 상태로 끝내드리겠습니다. 어때요, 좋지 않나요?”
사서의 말에 진하가 갈등했다. 확실히 지금 완전히 나은 상태라면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의 진하는 꽤 강해진 상태였고 앞으로 있을 일에도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관리자라는 존재가 있는 한 문방구는 필수적이야.’
물려준다고 얘기했다. 아티팩트가 무한정 생성되는 문방구라면 대처가 훨씬 쉬워질 게 분명한데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고작 S에서 SS급 수준의 헌터 한 명이 추가되는 것과 아티팩트가 가득한 문방구는 가치를 비교할 수 없으니까.
“하아, 선택권이 없잖아요. 할게요.”
“좋습니다. 그럼 당신이 이제부터 갈 곳에 대해 말씀드리죠. 장소는 이 세계의 시간선 중 하나입니다. 그곳에서 총 4명의 사람들을 설득하고 시험을 통과하세요.”
“당연하게도 그 시간선이라는 곳은 정신세계와는 다르겠죠?”
“현실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이번에도 시간은 상관없으니까 잘 다녀오세요.”
그 말과 함께 진하의 이마를 향해 손을 내뻗는 사서. 진하는 다가오는 사서의 손가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 * *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녹색 막사였다. 진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가 어디지?’
아니, 어디라는 건 대략적으로 알았다. 너무나도 익숙한 공간인데 이곳을 진하가 모를 리 없었다. 다만 이곳이 언제의 시간이냐는 게 문제였다. 진하가 재빨리 탁자 위에 놓여있는 핸드폰을 켜 보았다.
<2041년 6월 13일>
진하가 회귀하기 약 2주 전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곳은 S급 게이트 보스를 공략하러 떠난 공략대이고 게이트 안이라는 소리였다.
-문자 왔숑!
손에 쥔 진하의 핸드폰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시기에 그것도 게이트 7층 이하인 걸 생각하면 이걸 보낼 수 있는 사람은 같은 공략대에 속한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진하의 예상이 맞다면 그가 깨어나자마자 이걸 보낼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내 막사에서 보자. 할 말이 있어. 뭔 이야기인진 알지?>
역시나 이기수였다. 거기다 내용을 보아하니 첫 타자인 것 같았다. 첫번째로 설득해야 하는 사람이 이기수라니…….
‘아니 차라리 쉬운가?’
나머지 세 명이 누구일지는 진하도 몰랐다. 진하가 아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으니까. 하지만 그중 이기수라면 진하와 가장 친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만큼 설득하기 쉬울지도 몰랐다.
막사를 나온 진하는 곧바로 이기수가 있는 막사로 향했다. 기억이 오래돼서 약간 가물가물하긴 했지만 헤맬 정도는 아니었다.
“왔냐.”
씁쓸하게 진하를 맞이하는 이기수. 그런 이기수를 보며 진하 역시 씁쓸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왔다. 잘 몰라서 그런데 몇 가지의 시간을 기억하는 거냐?”
“네가 회귀 전하고 회귀 후, 그리고 게이트 1차 폭주 당시의 나 이렇게 세 개.”
이기수의 말에 진하가 재빠르게 다른 시간선의 김진하들과 나눴던 이야기를 복기했다.
‘1차 게이트에서 이기수가 죽었던 시간선은 15개, 5개 다 비슷한 느낌이었어.’
그들에게 들었던 사건들은 거의 다 비슷비슷했기에 하나로 생각해도 될 듯싶었다.
‘그나저나 세 가지라…….’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현재를 제외하곤 총 2번의 죽음, 설득하기 쉬울지도 몰랐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알아?”
“알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친절하게 네가 나를 설득해야 한다고 머릿속에 주입해 놨더라.”
“그래? 그럼 적어도 이야기는 빠르겠네.”
돌고 돌아 처음부터 이것저것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하아, 이게 뭔 일인지 네가 일주일 전에 그 사서라는 존재를 따라갔을 때 역시 말릴 걸 그랬어.”
“일주일? 내가 떠난 지 일주일 지났어?”
“그래, 일주일이나 지났다.”
정신세계에서 약 1년을 넘게 지내고 돌아왔을 땐 할머니나 사서 둘 다 그 모습 그대로라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이 안 됐었는데 일주일이라…….
“생각보단 짧네.”
“내 입장에선 일주일도 길었다.”
“그동안 무슨 일 없었고?”
“딱히 있지는 않았어.”
이기수의 말에 진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뭐가 바뀌었다고 한들 진하가 할 수 있는 건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무 일 없다는 소리는 기분 좋은 소리였다.
“그럼 다른 건 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설득 좀 당해 줘라.”
“싫어.”
이기수의 즉답에 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이렇게 쉽게 되면 시험일 리 없었다.
“왜 싫은지 들어나 보자.”
“사실 설득 당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긴 해. 세상이 멸망한다는 정보야 내가 직접 본 게 아니니까 그렇게 와닿는 것도 아니고, 지금이 여러 기억 중 제일 나은 미래 같기도 하고.”
“근데도 싫다고 말한 이유는 뭔데?”
“글쎄, 마음 같아선 지금까지 제대로 말하지 않은 너를 골려 주려고. 이렇게 말하고 싶긴 한데 그것보단 앞으로도 더 나을 거란 걸 보여줬으면 해서.”
“더 낫다는 걸?”
“응, 나야 세상이 멸망하든 아니든 사람들을 구하고 지키는 건 항상 똑같이 할 거야. 아마 너도 그러겠지. 근데 네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걸 직접 보고 싶어.”
“그거라면 이미 보여 주지 않았어?”
진하는 이미 과거를 바꿨다. 회귀 후의 시간선은 적어도 이기수가 기억하는 시간선들보다 가장 좋은 상태일 텐데 뭘 더 보여 달라는 거지?
“다른 기억은 어차피 주입 당한 거잖아. 바뀌긴 했지만 실감이 안 나 그러니까 정확하게 내 눈앞에서 보여 줘. 네가 바꿀 수 있다는 걸.”
“하아…….”
“고집부려서 미안해.”
이기수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쉽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기수의 말은 타당했다. 아무리 기억 속에 있는 과거와 진하가 바꾼 미래가 많이 바뀌었다고 한들, 직접 본 게 아니니 와닿지 않는 건 당연했다.
“그럼 뭘 보여 주면 되는데? 적어도 네가 생각하는 구체적 기준은 있겠지?”
“물론이지. 어쩌면 쉬울지도 모르겠네.”
“뭔데?”
“내가 2차 게이트 보스에게 죽지 않는 거.”
“죽지 않는 거?”
“응, 난 1차에서 한 번 죽었고, 2차에서도 한 번 죽었어. 그러니까 2차에서 내가 안 죽게 되는 미래를 만들어서 보여줘.”
이기수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정도라면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오히려 난도가 낮은 편에 속했다. 공략법이야 이미 이기수가 알고 있으니 쉽게 죽을 리도 없을 테고, 그냥 2차 게이트 보스만 잡으면 되는 거였다.
“근데 나 12층 이하는 못 내려가는데?”
진하가 이기수 막사로 향하면서 주변을 둘러봤었는데 12층이었었다. 12층까지 최하로 내려간 적 있었던 진하로서는 더 이상 내려가기 어려웠다.
“그때랑 지금이랑 다르잖아. 내가 알기론 지금 넌 이미 S급 수준 아냐?”
“아니, 내가 지금 무력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잖아.”
무력이라면 이기수가 알고있는 것보다 더욱 많이 올라 있는 상태였다. 아직 직접 스킬을 사용해 보지 않아서 확실하게 말할 순 없으나 최소가 S급 상위 또는 SS급이었다.
“내가 말하는 건 우리 공략 지침에서 B급인 내가 내려갈 수 없다는 거잖아.”
과거 대량의 헌터들로 구성해서 내려갔던 공략대에서 A급과 B급은 대부분 12층에서 돌아갔었다. 그들의 역할은 상위 헌터들을 조금이라도 더 쉬게 만드는 거였으니까.
그래서 12층까지만 공략하고 올라갔고 나머지 층들은 A급 최상위 그 이상만 내려갔었다. 그리고 16층에서 보스를 공략한 고위 헌터들은 부상자들을 탈출 스크롤로 빠르게 옮겼었고.
그때 1층에서 대기하다 죽어 가는 이기수를 직접 옮긴 진하였기에 그날의 기억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강하지 못했던 자신을, 이기수를 살리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했던 날이기도 했으니까.
“야, 내가 공략대 대장인데 뭔 상관이야.”
“네가 아무리 배테랑 SS급이라지만 그게 독단으로 돼?”
“내 이름을 걸면 돼.”
이기수의 말에 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진하로서는 같이 내려가서 손해 볼 건 없었다. 그가 몰랐던 12층 이하를 알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기수를 설득하려면 어차피 내려가야 했다.
“그래,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