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113화 (113/202)

#113

“생각?”

김진하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김진하들의 말 덕에 뭘 까먹고 있었는지 생각났다.

“내 특별함을 보여 달라고 했지?”

“특별한 점을 내게 보여 줄 수 있나?”

“아마도.”

분명 김진하는 진하에게 이곳에서는 겪었던 일은 모두 다 재현이 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현상만은 재현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지.’

으득, 으드득.

진하는 곧바로 경험했던 것을 강렬하게 상상했다. 그러자 진하의 몸이 조금씩 뒤틀리며 변해 가기 시작했다. 얼굴은 창백해지고 근육은 압축되어 갔으며 송곳니는 아주 조금이지만 점차 길어져 갔다.

“미친놈! 지금 너가 뭘 하고 있는지 아는 거냐!”

김진하가 변해 가는 진하의 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아무리 이곳이 정신 속이라지만 모든 게 만능인 것은 아니었다. 엄연히 정신체라는 정신의 집합체인 육체가 있었고, 상처 나거나 과한 힘을 운용하는 것은 그 정신체의 손상을 야기한다.

“알아.”

완전히 변한 진하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뱀파이어 로드의 피를 재현하고 몸에 받아들인다는 건 백 퍼센트 죽음을 뜻하는 거였다. 그걸 진하가 모를 리 없었다.

“미친놈! 어차피 죽을 거라면 순순히 나한테 몸을 넘겨주면 되잖아!”

“그래,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자신의 몸을 훑어보며 진하가 말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진하는 가치관이 완전히 다르지만 적어도 한 사람의 전력으로서는 도움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어찌됐든 자신보다 강했으니까.

“근데 다른 김진하들 말을 들어보니 너는 절대 나가선 안 되겠다. 나가면 넌 친구들을 죽일 놈이야.”

절박함, 진하와 김진하는 그게 달랐다. 진하가 회귀 전에는 절박함이 없고 회귀 후에는 친구들을 살리겠다는 절박함이 있을 뿐인 것과 달리 김진하는 오로지 생존, 생존에만 절박한 존재였다.

“네가 나보다 강한 건 인정해. 근데 너는 나가면 네가 살기 위해 내 친구들까지 이용해 먹을 것만 같단 말이야.”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그게 모두를 많이 살리는 길이야!”

“아니, 그럼 의미가 없어지지.”

단순히 이용이면 모르겠지만 이놈은 자신이 살기 위해 친구들의 목숨까지 바칠 놈이었다. 생존의 투지라는 스킬이 그걸 증명했다. 이놈의 신념이 자신의 생존인 이상 절대 이곳을 나갈 가능성을 1%라도 만들어선 안 됐다.

“그냥 나랑 같이 죽자. 그게 가장 나아.”

그 말과 함께 진하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피의 파도들. 김진하는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진하가 겪었던 버프들을 둘렀지만 소용없었다.

‘고작 그 정도로 이길 수 있을 리 없지.’

뱀파이어 로드의 피로 변한 진하의 능력이었다. 지금껏 진하가 얼마나 버프를 받아 왔든 그것 모두를 합한 것보다 이게 더 강했다.

무엇보다 미래에 있던 김진하의 신념은 생존, 그가 진하처럼 목숨이 위험한 버프를 자신의 몸에 두를 리 없었다.

“이럴 순 없어! 내가 더 강하다고!”

“그래, 네가 더 강해.”

진하는 피바다 속에 잠겨 가는 김진하를 보며 대답해 줬다. 확실히 그가 더 강했다. 더 강하고 더 생존하기 적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생존이 아니야.”

따악!

또 한 번의 손 튕김에 깨끗이 사라지는 김진하. 진하는 그가 사라지고 하얀색만 가득한 공간을 바라보았다.

“시험은 실패인가?”

빠직, 빠지직!

진하의 온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전보다도 더 빠른 속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 뱀파이어 로드의 피는 진하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이었고, 그걸 지켜 줄 뱀파이어 로드의 영혼이나 사념조차 없으니까.

[후련하냐?]

“후련하다. 적어도 친구들이 위험한 일은 없잖아.”

[멍청한 놈.]

[바보지. 바보야.]

멍청한 선택을 한 진하를 욕하는 김진하들. 하지만 그들의 말과는 달리 말투에는 비난하는 느낌이 하나도 담기지 않았다.

“너희들도 그걸 알고 설득당한 거 아냐?”

[그래, 그건 맞지.]

[그러니까 우리 몫까지 발버둥 쳐 줘라.]

“뭐?”

진하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김진하들에게 되물었지만 대답을 들을 필요조차 없었다.

찌직, 찍…….

진하의 몸 사방으로 번져 가던 금들이 서서히 멈춰 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시간이라도 되감듯 다시 붙기 시작하는 금들.

“뭐 하는 거야!”

[어차피 일반인은 도움 될 게 이것밖에 없잖아?]

[나도 뭐 D급에서 죽었으니까 이거라도 도와야지.]

그 말과 함께 점차 사라지는 김진하들. 진하는 그들의 행동에 당황했다. 이런 걸 노리고 목숨을 걸었던 게 아니니까.

[우리도 알아.]

그런 진하의 맘을 헤아리듯 말하는 김진하 중 한 명. 그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 갔다.

[우리가 너에게 설득당했다는 건 너에게 모든 걸 맡겼다는 거다. 목숨까지도.]

“하지만…….”

한두 명이 아니었다. 진하가 여지껏 만났던 김진하들 중 대다수가 진하를 대신하여 부작용을 감당하고 사라지고 있었다. 가장 약한 순서부터 차례대로…….

[우리도 너랑 같은 거지. 그냥 멍청한 거다.]

그 말과 함께 사라지는 김진하. 그렇게 수많은 김진하들이 사라지고 얼마 남지 않은 김진하들이 진하에게 말했다.

[그럼 미래를 잘 부탁한다.]

그 말을 끝으로 검어지는 시야. 그리고 정신세계에서 빠져나와 익숙한 장소가 나타난 것을 보며 진하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띠링!

<스킬: 과거의 후회가 변경됩니다.>

<과거의 후회: 후회는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만회할 기회가 생긴다면 과거는 당신을 도울 것이다.>

<과거의 시간들이 통합되어 3단계로 나뉘어집니다.>

<스킬 생존의 투지가 형성되었습니다. 강제적 전달로 효능이 떨어집니다.>

<생존의 투지: 살고 또 살았다. 그리고 생존은 생존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스킬 발동시 재생력 100% 증가, 전체 능력치 1.5배 증가. 스킬 발동 시간 4시간, 재사용 대기시간 24시간>

<상태이상: 신체 붕괴가 사라집니다. 몸이 회복됩니다. 생명력 공유 스킬이 종료됩니다.>

“보아하니 잘 다녀온 것 같구나.”

멍하니 있는 진하를 보며 할머니가 씨익 웃었다. 진하는 그런 할머니의 모습에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기분 더럽네요.”

“힘을 얻었는데도 기분이 안 좋냐?”

“이런 식으로 힘을 얻고 싶진 않았으니까요.”

“어찌 됐든 그들 역시 너다. 그들이 설득당했다는 건 너에게 모든 걸 맡겼다는 소리야.”

할머니의 말에 진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진하도 알았다. 그들이 진하에게 모든 걸 맡겼다는 걸.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도대체 왜 이리 멋대로인 놈들인 건지…….

‘하긴, 나도 제멋대로니 할 말 없나?’

“어찌 됐든 축하해요. 시험을 통과한 걸.”

옆에 있던 사서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진하는 그런 사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요.”

“자, 그럼 바로 3번째 시험으로 들어가죠.”

“바로요?”

“그게 가장 좋으니까요.”

사서의 말에 진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하는 게 좋은 시험이라니…….

“거짓말하지 말거라. 그냥 네가 빠르게 끝내고 싶은 거 아니냐?”

할머니가 재촉하는 사서를 타박했다. 사서는 할머니의 말에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뭐라 할 말은 없는지 입을 열지는 못했다.

“저놈 지금 너한테 희망이 생겨서 저러는 거다.”

“희망이요?”

“그래. 사실 저놈은 네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할머니의 말에 진하가 사서를 쳐다보았다. 사서는 진하의 눈빛에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이내 당당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뻔뻔하게 말했다.

“사실 제 예상이 틀린 게 아니잖아요? 진하 씨가 이 이야기에서 특별한 것도 아니고 실패할 거라 예상하는 게 당연하죠.”

“저기 전부터 궁금했는데 이야기란 게 뭔가요?”

사서는 얘기할 때마다 이야기라는 말을 꺼냈다. 대충 이해하기론 시간의 흐름을 말하는 것 같긴 한데 시간의 흐름에는 완결이 없는데 끝을 봐야 한다 하니 뭔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클클, 이야기는 기준점에 의해 나뉜 시간 선을 뜻한다.”

“기준점이요?”

“그래, 아무리 차원이 많다고 해도 사람들의 수 만큼 생기면 끝도 없는 법, 그렇기에 모든 시간은 분기점을 만드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을 기점으로 분기점들이 생기는 거지.”

“그럼 이야기의 끝이라는 건…….”

“한 개의 기준이 끝나는 것을 뜻한다. 그게 사람이라면 죽음을, 사물이나 법칙이라면 부서지는 게 되겠지.”

할머니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란 게 뭘 뜻하고, 끝이라는 게 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진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진하 씨, 당신이 회귀한 시점부터 기준점이 되어 버려서 그래요. 하아.”

사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하는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사서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자신이 기준점이 된 거랑 사서가 한숨 쉰 이유를 전혀 연관 지을 수 없었으니까. 사서도 그런 걸 인식했는지 자세를 똑바로 한 뒤 입을 열었다.

“제 일에 대해선 아직 잘 모르죠? 간단히 이야기하면 저는 기준점이 되는 것들을 관리하는 존재입니다.”

“관리요?”

“네. 기준점을 도와주거나 또 관리자와 같은 존재들이 외부에서 너무 심하게 간섭하면 그걸 막는 역할이죠.”

사서의 말에 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현 관리자에 대한 둘의 반응을 생각하면 이곳도 과도한 간섭을 받고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이것도 사서가 막았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참고로 말하지만 사서인 저도 과도한 간섭은 불가능한 경우가 있어요. 여기가 그런 곳이었고요.”

사서가 변명하듯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진하는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게 있었다.

“그렇더라도 저를 도와줄 수 있던 건 아닌가요? 근데 처음 봤을 때 오히려 저를 죽이려 하지 않았어요?”

“그거야 당신이 모자랐으니까요. 문방구에서 일은 하는데 관리자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기준점이라기엔 모자라니 좋아할 리 없었죠.”

“어차피 기준점 선택은 관리자의 역할이지 않으냐.”

할머니의 말에 사서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확실히 기준점을 선정하는 것은 관리자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문제였었다.

“그게 문제라고요! 왜 전 관리자가 월권행위를 하는 거예요? 아니, 솔직히 그건 넘어갈 수 있어요. 지금 관리자가 개떡이니까. 그러면 적어도 괜찮은 사람을 선택해야죠.”

“그래서 지금 잘하고 있지 않느냐.”

“그건 결과죠. 솔직히 내가 그땐 뭘 받아야 되는 상태라 크게 뭐라고는 안 했는데 진짜 별로였거든요?”

사서의 말에 진하가 얼척 없는 표정으로 사서를 바라봤다. 아무리 자신이 마음에 안 들었다지만 이걸 당사자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저기 그렇게 맘에 안 들었음 말해서 변경했으면 됐잖아요.”

“하아, 한번 선정되면 그게 불가능하니까 하는 말이죠. 그리고 어차피 멸망으로 기록될 이야기 멋대로 해라. 이렇게 생각하고 그냥 대충 넘어간 거예요. ”

“멸망이요?”

“사실 이곳은 제가 거의 개입하지 못하는 곳이라 멸망이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거든요. 다만 거기까지 분기점이 깔끔하게 가느냐 아니냐의 차이지.”

“네가 죽었어야 할 분기점에 너를 떡하니 데려다 놓고 기준점으로 삼아 이야기를 이어가니 저놈은 환장하는 거지. 이야기도 꼬였고 그렇다고 멸망을 막을 능력도 없어 보였으니까.”

할머니의 말에 사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미 포기했던 세계였다.

그런데 문방구에서 처음 진하를 봤을 땐 살짝 설렜었다. 문방구를 누군가에게 맡겼다는 건 지금 관리자를 상대할 사람을 놨다는 거고 그건 곧 이야기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였으니까.

근데 막상 곧바로 확인해보니 이야기를 바꾸기엔 턱없이 부족한 데다가 이런 사람을 위해 회귀까지 사용해 분기점들을 부숴놓은 걸 확인 했으니 좋게 볼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죽이자니 결론까지 가는 이야기가 중구난방이 되어버려 건드리기도 애매했고.

“예비 관리자는 아니야. 그렇다고 기준점이라기엔 부족해. 근데 할머니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어. 그런 사람이 제 맘에 들겠습니까? 솔직히 도와주긴 했지만 두 번째 시험에서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죠.”

“근데 생각이 바뀌었지?”

할머니의 말에 사서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두 번째 시험까지 통과하고 그녀의 문방구를 물려받게 된 이상 0%였던 확률이 변할 가능성이 생겨버렸다.

“확실히 문방구까지 이어받았으니 이야기가 고쳐질 확률도 존재하긴 하죠.”

사서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그는 두 가지 시험밖에 통과하지 않았는데 문방구를 이어받았다니?

“내 시험은 이게 끝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저놈이 만든 시험이야.”

“어찌 됐든 당신은 두 번째 시험을 통과하고 이야기를 고쳐 쓸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보여 주었어요. 그러니 저에게 증명해 주세요. 진짜로 고쳐 쓸 수 있는 사람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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