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새하얀 공간, 제일 먼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광경이었다. 진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팔을 휘둘러 보았다.
파앙!
허공에 짧게 터지는 공기 소리, 확실히 그의 신체 능력이 모두 돌아와 있었다.
“흐음, 그나저나 언제 나타나려나…….”
사서의 말대로 이 공간에서 누군가를 설득해야 된다면 결국 뱀파이어 로드 때처럼 문이 생기고 누군가가 나타나야 한다는 건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뭔가 나타날 것 같진 않았다.
“흠, 그냥 기다리고만 있으면 되는 건가?”
“안 기다려도 돼.”
그 순간 들리는 목소리, 그 소리에 진하가 뒤를 돌아보니 한 남자가 진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진하는 왜 사서가 만나는 사람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혹시 그때의 너니?”
“그때의 나다.”
그 말에 진하는 자신 앞에 보이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존재가 트라우마임을 깨달았다.
“근데 너 그때 죽지 않았어?”
“네가 죽인게 아니었잖아. 그리고 지금은 트라우마로서 온 게 아니야.”
“그게 뭔 소리냐?”
트라우마면 트라우마지 지금은 트라우마로서 온게 아니라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트라우마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정리부터 하자. 나는 너, 아니 나 자신한테 날 인정받으면 되는 거야?”
“뭐, 그렇지?”
“너 트라우마잖아.”
“트라우마 아니라니까. 난 너기도 하고 네가 아니기도 해.”
“그게 뭔 소리인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김진하를 보며 진하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찬가지로 김진하 또한 진하를 따라 땅바닥에 주저앉은 뒤 말을 이어갔다.
“일단 과거가 과거가 아니란 건 이제 알지?”
“어.”
“그리고 내가 그때 했던 말 기억나? 네 스킬은 스킬이 아니라는 거.”
김진하의 말에 진하가 잠시 기억을 뒤적였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예전에 김진하가 그런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어, 기억나. 그때는 뭔 개소린가 했지.”
“제약도 풀렸겠다. 정확하게 알려줄게. 그건 스킬이 아니라 그냥 또 다른 네가 깃든 거야.”
“또 다른 나?”
“네가 원하는 시간대의 분기점 직전으로 되돌아가면 기존의 세상은 어떻게 되지?”
“없어진다고 들었어.”
“그럼 그 사이에 있었던 수 많은 분기점들은 어떻게 될 것 같아? 그리고 그 없어진 세상 속에서의 너는 어떻게 될 것 같고?”
그제서야 진하는 그가 하는 말을 이해했다. 과거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건 완전히 되돌리는 게 아닌 분기점이 나뉘는 직후의 다른 세계 선으로 넘어가는 거라고 했었다.
하지만 분기점이 그거 하나만일 리 없었다. 진하가 회귀하기 직전인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당연하게도 분기점은 분명 있었을 것이고 그곳에 존재하는 김진하라는 개체 또한 존재했을 것이다.
“그럼 너는 그 시간 선의 나라는 말이야?”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너의 스킬에 추가 등록된 시간 선인 시험 날 당일, 이진하를 잃었던 날이 섞인 김진하지.”
“미치겠네.”
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머리가 복잡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무슨 어디 추리소설도 아니고 뭐가 이렇게 꼬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 그래, 일단 네가 나면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해? 너희에게 나를 인정받으라며.”
“내 차례에선 이미 인정했어. 네 스킬에 등록된 시간이 그 증거지.”
“너 차례라…… 그렇다는 건 또 다른 내가 더 많이 있다는 뜻이겠지?”
“응, 아마도 수백 명쯤?”
“왜 제한 시간이 없다는 건지 이해가 간다.”
단순히 트라우마를 설득하고 이기는 것만 해도 꽤 많은 시간을 소요했었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수백 명이라니…… 얼마나 걸릴지 감도 안 잡혔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아마 대부분은 대화하면 금방 인정받을 거야.”
“내가 나라는걸?”
“응, 정확히는 회귀한 사람이 너였어야 했다는 걸.”
“그나마 다행이네.”
“내가 가장 첫 번째로 나온 건 너에게 상황을 인식시켜주기 위해서야.”
김진하가 빙긋 웃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진하 역시 빙긋 웃어주었다. 트라우마 때도 느꼈지만 생각보다 친절한 놈이었다.
“고맙다.”
“별말씀을. 어차피 너는 나니까.”
그 말과 함께 하얀색 빛으로 흩어지는 김진하.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하얀 빛무리만 남게 되자, 빛은 스르륵 다가와 몸에 흡수되었고 진하는 빛무리가 흡수되면서 속에서부터 무언가 충만해지는 걸 느꼈다.
“그럼 다음은 내 차례네.”
그리고 어느새 진하의 앞에 나타난 또 다른 김진하. 김진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진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녕? 나랑 얘기하는 건 처음이지?”
* *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솔직히 말하면 체감상으로는 1년이라는 시간이 넘게 지난 것 같았다. 또 다른 나와 얘기를 나누다가 피곤하면 자고, 또 일어나서 얘기를 나누고, 끊임없이 그것만 했던 것 같았다.
‘그나마 대다수가 대화가 잘 통해서 다행이지.’
진하가 만났던 김진하의 대부분은 대화로 쉽게 설득할 수 있었었다. 애초에 진하가 이미 지나왔던 시간에서부터 나뉜 김진하였기에 대다수 말이 잘 통했었고, 말이 안 통해서 다투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투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뭐가 그리 사소하게 나뉜 건지 작은 선택 하나하나에도 나뉜 김진하였기에 커다란 선택을 하나 설득하면 그 뒤로는 주르륵 뒤따라 쉽게 진하를 인정했다.
“그럼 잘 부탁한다.”
“그래.”
또 한 명의 김진하가 사라지고 빛무리가 되어 진하에게 흡수되었다. 진하는 피곤함에 그대로 땅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피곤해…….”
아무리 정신 공간이라 육체의 피곤함이 없다지만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만큼 피곤했고 잠을 자더라도 쉽사리 그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누워있군.”
“어…… 왔냐?”
진하는 어느새 자신 앞에 나타난 김진하를 보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번 김진하는 피에 젖은 전투복을 입은 게 전투 중에 선택지가 갈렸던 김진하인 듯싶었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너 뒤로 몇 명 있어?”
“축하한다. 내 뒤로 아무도 없다. 내가 마지막이다.”
그 말에 진하는 기쁨에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이 개떡 같은 대화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 지금까지 전투는커녕 죄다 대화로만 해결했으니 베스트인 상황이었다.
“그거 다행이네. 그럼 통성명부터 할까? 나는 2회차를 살고 있는 김진하야.”
“알고 있다.”
“그럼 네가 어느 시간 때의 김진하인지 좀 말해 줄래?”
“나는 네가 회귀하지 못한 시간대의 김진하, 정확히는 문구점을 만나지 못한 김진하라고 해야겠군.”
김진하의 말에 진하가 멈칫했다.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과거의 김진하만 나타났는데 처음으로 자신보다 미래의 김진하가 그의 앞에 나타났었다.
“왜, 놀랍나?”
“놀랍지. 분명 내가 회귀하면 내가 있던 시간 선은 사라진다고 들었으니까.”
“간단한 논리다. 나뭇가지에서 네가 가장 긴 나뭇가지가 아닌 것뿐.”
진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또 다른 자신인 김진하에게서 느껴지는 차가운 말투, 그리고 무감각한 감정까지, 이번 설득은 대화로 풀릴 것 같지 않다는 직감이 들었다.
“자, 그럼 설득해 봐라. 왜 너여야 했는지. 어째서 제일 앞서나간 시간 선의 내가 아닌 네가 되돌아갔는지 나를 설득해라.”
“흠, 글쎄…… 너는 문방구를 못 만난 시간대의 나라고 했지? 그럼 단순히 운이라고 말한다면 당연히 설득 안 되겠지?”
“당연한 걸 묻는군.”
그의 말에 진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진하도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그와 자신의 차이는 운 빼고는 다른 게 없었으니까.
“그럼 내가 물어볼 게 너는 왜 네가 되어야 했다고 생각해?”
“그거야 내가 제일 강하니까.”
“어차피 B급인 건 똑같잖아. 조금의 경험 차이를 가지고 더 강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가 얼마나 더 많이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경험이 더 길다고 강하다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누가 B급이라는 거지?”
“너 설마…….”
“생존의 투지.”
김진하가 나지막하게 스킬 명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확 커지는 그의 기세, 그는 허공을 몇 번 두들기더니 가시화된 상태창을 진하에게 보여 주었다.
<생존의 투지: 살고 또 살았다. 그리고 생존은 생존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스킬 발동 시 재생력 300% 증가, 내구도 100% 증가, 전체 능력치 1.5배 증가.>
<스킬 발동 시간 3시간, 재사용 대기시간 12시간>
“이런 미친!”
스킬 내용을 본 진하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완전히 미친 스킬이었다. 이 정도면 지금까지 알려진 A급 스킬 중에서도 상위권에 위치했다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거기다 완전히 생존에 특화된 스킬이었다. 재생력, 내구도 증가에 전체 능력치 증가까지, 능력이 신체 강화 능력인 것까지 생각하면 너무나 사기적인 시너지였다.
“증명해라. 네가 왜 나 대신 회귀했는지. 네가 뭐가 특별한 건지 나에게 보여라.”
그 말과 함께 달려드는 김진하, 진하는 재빨리 환도 하나를 생성해 자신을 향해 내리그어지는 검을 막았다.
‘무거워.’
정말 아슬아슬하게 막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한 번에 죽었을 게 분명한 상황이었기에 진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재빠르게 미래 김진하의 수준을 파악했다.
‘A급 중위야.’
신체 스펙은 그 정도였다. 단 한 번의 검격이었지만 진하가 힘겹게나마 검격을 막아냈다. 그렇다는 건 스킬을 사용했음에도 그와의 신체 스펙이 아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걸 뜻했다.
그럼 그의 기본 신체 스펙은 현재 A급 상위인 진하와는 다르게 A급 중위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거의 후회.”
진하 역시 똑같이 스킬을 사용해 신체 스펙으로 눌러버리면 되는 거였다.
“그건가.”
“그래,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회귀한 후에 얻은 스킬을 사용한 게 미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대가 자신을 제압하길 원한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기는 게 중요했다.
“미안해할 필요 없다. 과거의 후회.”
폭증한 진하의 기세를 훨씬 넘어서는 김진하의 기세, 진하는 그 모습에 하하, 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너도 쓸 수 있는 거야?”
“네가 쓸 수 있으면 나도 쓸 수 있다.”
그의 말에 진하는 이를 악물었다. 진하는 과거의 후회 하나, 상대는 과거의 후회와 생존의 투지 2개의 스킬. 누가 봐도 진하가 불리한 싸움이었다.
‘그렇다면…… 선수필승!’
진하가 대화하면서 생긴 잠깐의 틈을 노리고 칼을 내뻗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먼저 공격하는게 유리했다.
카앙!
“나는 너다. 설마 내가 예상 못 했을 것 같나?”
가볍게 진하의 검을 쳐낸 김진하가 반격을 시작했다.
캉! 캉! 카앙!
연속으로 내리꽂히는 검격, 진하는 그가 내리치는 검격을 겨우겨우 막아내며 연신 뒤로 물러났다.
‘젠장!’
확연하게 전투력의 차이였다. 상대는 쉽게 공격하는 반면 진하는 그가 하는 공격을 막기조차 힘들었다. 거기다 짜증 나는 사실은 이게 상대의 전력이 아니라는 점, 그는 딱 막기 힘들 정도의 힘만 사용해서 진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도 못 막나!”
“네가 내…… 상황 돼 봐!”
진하가 크게 물러나며 소리쳤다. 상대가 원하는 설득은 다 똑같고 나는 너보다 더 강한데 왜 네가 됐냐는 증명을 하라는 건데 자신보다 강한 상대로 더 강함을 증명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증명해라. 왜 네가 됐는지 그 특별함을 증명해라.”
“너무 억지 부린다고 생각하지 않아?”
“상관없다. 억지든 아니든 너는 증명해야 한다. 왜 네가 선택됐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