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109화 (109/202)

#109

할머니의 물음에 진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몸도 망가졌고, 마음도 편치 않았다. 어떤 면으로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기도 했으니 좋다고는 빈말로도 말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인류의 절반 이상이 죽어버렸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그때와 달리 모든 게 좋아지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죽었던 친구들도 살아 있었다.

“네,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진하의 말에 할머니가 클클 거리며 웃었다. 갑작스러운 웃음에 진하는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다시 한번 돌아갈 수 있다면?”

“네?”

“지금 그대로 다시 한번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다면 너는 돌아갈 거냐? 아님, 여기에 남을 거냐?”

할머니의 말에 진하가 말문이 턱 막혔다. 과거로 돌아간다. 그렇다는 건 진하가 회귀 후 실수했거나 아니면 어설프게 했던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다는 소리였다.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

“아, 맞다. 완전히 같은 건 아니려나?”

“완전히 같지 않다고요?”

“그래.”

“어떤 점이 다른가요?”

진하가 조심스럽게 할머니에게 질문했다. 진하의 질문에 할머니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해 주었다.

“그야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라는 거지.”

“다른 사람이요?”

“그래, 설마 진짜로 시간을 과거로 돌리는 줄 알았던 게냐? 내가 신도 아니고 그런 걸 어떻게 해.”

“그럼 저번에 저를 회귀시켰던 건…….”

“아, 여기 다른 세상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선택이 시작되기 전의 분기선이랄까? 아니, 이것도 과거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뭐, 우리 인간들 관점에서는 과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할머니의 말에 사서가 가볍게 대답하며 배를 먹었다. 진하는 그 둘의 말에 동공이 흔들렸다. 여기가 다른 세상? 그럼 지금껏 진하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지켰던 건가?

“아, 같은 사람으로 봐도 무방하긴 해요. 사실 99.9%는 영혼이 같거든요. 다만 분기점이 갈려서 0.1%가 달라진 것뿐이죠.”

사서의 말에 진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라니?

“간단하게 생각하면 이 세상은 나뭇가지와 같은 거예요. 선택에 따라 세상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수많은 세상으로 나뉘게 되는 거죠.”

“수많은 세상…….”

“네, 예를 들면 당신이 이 배를 먹는다 안 먹는다. 이걸로도 세계 선이 나뉘게 되죠. 그러니 같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도 완전히 같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죠? 이후의 세계가 달라지니까요.”

“그럼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건…….”

“뭐, 다른 세계 선으로 그냥 당신을 옮기는 거죠. 예를 들자면 두 갈래로 나뉜 잘 휘는 나뭇가지가 있다면 그중 A라는 나뭇가지를 갈래가 시작된 바로 직후의 B에다가 가져다 대는 거? 인간들 관점에서 보면 과거라면 과거지만 사실 완전한 A의 과거라고 말하긴 어렵죠.”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진하는 머리가 아파 오는 걸 느꼈다. 결국 그럼 진하가 해왔던 것은 과거를 바꾸는 일이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결국 같은 갈래에서 뻗어 나왔으니 바꿨다고 봐야 하는 걸까.

진하가 갑작스러운 개념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와중에 그런 그를 지켜보던 할머니는 어느새 가져온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물었다.

“아직 내 질문 안 끝났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과거로 갈 거야? 아니면 안 갈 거야?”

“저는…….”

첫 말을 뗐지만 진하는 도저히 선택할 수 없었다. 지금 진하가 한 행동이 과거를 바꾼 건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선택하라니…….

“별로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냥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갈래가 시작된 직후의 다른 곳으로 너를 보내주는 거니까. 아마 네 입장에선 똑같을걸?”

“똑같아요?”

“그래, 그전까지의 과거는 네가 기억하는 것과 한 치의 차이 없이 똑같은 경험을 한 거니까. 그냥 그 이후에 다른 미래로 인해 바뀐 것뿐이야. 딱히 다르지 않잖아? 지금도 이미 미래를 바꿨으니 원래의 사람들과 지금은 사람들이 다른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그녀의 말에 진하는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라면 과거로 돌아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거로 돌아가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진하의 마음을 알았는지 할머니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차피 지금 네가 구한 인원들도 결국 네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 인물들과는 똑같으면서 다른 사람들이야.”

“그럼…… 제가 과거로 돌아가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요?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저 분기점 직전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요?”

“이곳 자체가 사라진다. 분기점으로 되돌린다는 건 나뭇가지를 꺾는 행위야. 너는 나뭇가지를 구부려 꺾었는데 그 나뭇가지가 제대로 자라는 거 봤느냐?”

“…….”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되돌아갈 거냐?”

할머니의 말에 진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이렇게 모든 설명을 들은 이상 그가 할 선택은 하나였다.

“아니요, 되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왜냐.”

“전 목숨을 빚졌던 친구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행동한 거지 제 자기만족으로 행동한 게 아니니까요.”

“자기만족이 아니라…… 그들이 원한 것도 아니고 그냥 네가 스스로 그렇게 행동한 거면 자기만족이 아니더냐.”

“뭐, 자기만족으로 보셔도 돼요. 다만 하나 확실한 건 제 행동이 뭐든 간에 제 욕심을 위해서 지금 있는 사람들을 죽이진 않을 거예요.”

“거참, 죽는 게 아니라니까?”

할머니의 말에도 진하는 고개를 저었다. 뭐라 하든 이미 결론을 내렸다. 지금 다시 되돌아가는 건 그냥 자기만족일 뿐이다.

어쩔 수 없이 과거로 돌아와서 지금도 나쁘지 않은 결과를 냈다. 그런데 좀 더 잘할지도 모른다는 자기만족에 이곳의 친구들을 버리는 결과를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클클, 뭐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어차피 과거로 돌아가지도 못하니까.”

“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게 뭐 쉬운 줄 아느냐? 아무리 진짜로 돌아가는 건 아니더라도 한번조차 매우 힘든 일이야.”

“그럼 왜 그런 질문을 하신 거예요?”

“내 맘이다.”

할머니의 말에 진하는 기운이 빠지는 걸 느꼈다. 도대체 안 되는 걸로 왜 질문을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 뭐 사담은 여기까지로 하고, 네가 여기 왜 왔는지 궁금하겠지?”

할머니의 질문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부른 이유도 궁금했고 자격이라는 것과 또 자신이 모르는 것들까지 모든 게 궁금했다.

“흠,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할머니 그 전에 배경지식부터 설명해 줘야 하지 않아요?”

사서의 말에 할머니가 아차한 표정을 짓더니 진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뭘요?”

“이 세상에 대한 것 말이다. 아무거나 말해 보거라.”

“음…… 제 최종 적이 관리자라는 것과 여러 차원이 있고 그걸 관리하는 자를 관리자라 부르는 것, 그리고 제가 보기엔 신이지만 신은 아니라는 것 정도요. 근데 관리자와 신의 차이는 도대체 뭐예요?”

“흠, 뭐 대충은 아는구나. 뭐, 사실 인간 입장에서 관리자도 신은 맞긴 하다. 자신의 차원에 관해서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니까.”

“그럼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뭔가요?”

“뭐긴 뭐야. 니들 말로는 창조신인 거지. 이 세상과 여러 차원을 창조한 존재.”

할머니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느 정도 예상하고는 있었던 내용 그대로였었다.

“그럼 그 관리자라는 신이 왜 몬스터를 만드는 거예요?”

“조용히 해라. 이제부터 설명해 줄 거니까.”

“네.”

“관리자가 몬스터를 만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들과 신이 싫어서야.”

순간 진하는 할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싫어서 이런 짓을 저지른다고? 그럴 거면 애초에 인간을 만들지 말았거나 그냥 멸망시키면 되는 거 아닌 건가?

진하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할머니가 덧붙여 말했다.

“관리자는 말 그대로 관리자다. 관리만 하는 존재야. 인간이고 몬스터고 결국 만든 건 죄다 창조신이다. 그리고 멋대로 죽이지도 못하고.”

“하지만 이곳에 있는 몬스터를 만든 건 관리자 아닌가요?”

“그건 맞지. 근데 창조라기보단 모방이다. 그저 있는 걸 보고 베낀 거야. 그리고 그걸 무에서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할머니의 말에 진하는 뱀파이어 로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유독 뱀파이어가 많았던 이유, 그리고 그가 흡수했던 피 한 방울.

“얼굴을 보니까 대충 짐작 가는 게 있는 거지?”

“네, 뭔 뜻인지는 알겠어요.”

“아무튼 관리자마다 다르긴 한데 이번 관리자는 인간과 신을 극히 싫어해서 이런 일을 꾸민 거다.”

“고작 그런 이유로요?”

진하의 물음에 할머니가 클클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에 진하는 자신이 뭔가 잘못 질문했나 싶었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고작이라…… 글세 과연 고작일까? 우리가 인간이나 몬스터보단 강하고 신적인 존재지만 우리는 고정된 존재란다. 그에 비해 너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당연히 질투할 만하지 않겠느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고정된 존재라뇨?”

“한마디로 우리는 차원을 관리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란 거다. 오직 그 이유로 태어나서 그 일을 마치면 죽는 존재지. 생각해 봐라. 그건 차원을 사는 생명체들을 위해 태어난 존재 노예와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그럼…….”

“그래, 그런 생각을 가진 존재들이 너희를 미워하는 거지.”

“하지만 우리는 피해를 준 게 없잖아요. 그리고 정 싫으면 때려치던가요.”

“때려치는 건 죽는 것 외에는 없어. 거기다 너희 존재 자체가 피해이기도 하고.”

할머니는 그 말과 함께 옆에 있는 사서를 가리켰다. 사서는 할머니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사서님도 인간이라고 하셨지.’

“왜 피해라는 거죠? 사서님같이 인간이 관리자와 비슷한 존재가 되는 게 피해라는 건가요?”

“우리와 비슷한 존재가 되는 것도 싫지만 정확히는 그 이상도 노려볼 수 있다는 게 싫은 거다. 원한다면 창조신도 될 수 있거든.”

“네?”

“차원에 사는 모든 몬스터들은 신의 조각을 가지고 태어났어.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마음먹기에 따라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지. 그리고 그 성장의 시작을 알리는 게 자격이다.”

“자격…….”

진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인간이 창조신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충격적이었고, 그 시작이 자격이라는 점도 충격이었다. 그렇다는 건 진하 역시 그 첫발을 내디뎠다는 거니까.

“도대체 그 자격이라는 게 뭐죠?”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세상의 규칙에서 벗어났다는 소리입니다.”

가만히 있던 사서가 입을 열었다. 할머니 역시 자신이 말할 생각이 없는 건지 조용히 사서를 바라봤다.

“자격, 신성, 성불 많은 이름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그 실체는 하나입니다. 규칙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똑바로 필터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걸 말하는 거죠. 오롯이 혼자가 되고 그순간부터는 더 이상 분기점조차 생기지 않게 됩니다.”

“그게…… 좋은 건가요?”

“좋은 거죠. 적어도 꼭두각시 같은 일은 안 당한다는 소리니까. 오롯이 한 개체로서 태어났다는 걸 말하는 거라 보면 됩니다.”

사서의 말에 진하는 로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대공들을 보며 꼭두각시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는 건 진하는 그들처럼 조종당하지 않는다는 소리기도 하고 반대로 말하면 모든 인간들이 조종당하고 있다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뭐, 그 부분은 대충 그렇게 알아두시면 되고. 아무튼, 어떤 관리자가 좋아하겠어요? 안 그래도 노예같이 부려지는데 자신이 관리하는 존재들이 자신과 같은 위치 또는 그 위가 될 수 있다는 걸요.”

사서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은 알아들었다. 결국 그냥 질투와 자신의 위치가 위협받는 거에 대한 적의라는 거였다.

“그런데 그런 걸 왜 저한테 주시고 저를 돕는 거죠?”

진하의 질문에 할머니가 차를 후룩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뭐, 별거 있나. 그냥 맘에 안 들어서지. 난 은퇴 후 죽기 전까지 조용히 살고 싶거든.”

“전 애초에 할머니의 부탁도 있고 이 세상 이야기의 완결을 봐야 하는 입장이라서…….”

둘의 대답에 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엔 그냥 지금의 관리자라는 존재가 맘에 안 들어서 진하를 지원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뭐, 불만이 있느냐?”

할머니가 진하의 표정을 보며 물었고 진하는 고개를 저었다. 동기야 어찌 됐든 그들의 도움이 있어 지금 이 자리에 진하가 있다는 건 사실이니까.

“아무튼, 대충 설명은 끝났고, 이제 너를 부른 이유를 말하마.”

“네.”

“너, 내 문방구를 물려받을 생각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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