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고개를 돌려보니 이기수가 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
“아까 전에.”
“그럼 좀 깨우지. 상태 안 좋은 거 안보이냐?”
진하가 흠뻑 젖은 자신의 환자복을 가리켰다. 이기수는 그런 진하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오자마자 네가 일어난 거야.”
그 말과 함께 물병 하나를 건네는 이기수. 겨우 몸을 일으켜 물병을 받아든 진하는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또 악몽이냐?”
“어.”
폭탄이 터지던 그 날부터 진하는 계속 악몽을 꿨다. 세부적인 내용은 꿀 때마다 달랐지만 아무것도 없는 어둠과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항상 같았고, 중간에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하고 깨어나는 것까지 똑같았다.
“신혜는?”
“아무 말 안 해.”
“부탁할게. 편의 좀 봐줘.”
“지금도 많이 봐주고 있는 거야.”
이기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실 진하의 부탁이 없었다면 아니, 진하가 부탁을 했더라도 편의 따위 봐줄 생각은 없었다.
‘쯧, 도대체 왜 그런 거지?’
이기수는 아직도 그날의 행태가 이해되지 않았다. 폭발한 곳에서 발견된 것은 진하를 감싸고 있던 이신혜와 송하나였다. 송하나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납치한 장본인이 진하를 감싸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벌써 사형인데 말이야.’
의도나 시킨 배후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았다. 그러니 물어볼 것도 없는 상황, 진짜 진하를 구했던 그것만 아니었다면 벌써 죽여도 수백 번은 죽였을 상황이었다.
“너야말로 몸이나 신경 써.”
가장 겉을 감싼 이신혜는 사지 중 세 곳이 날아갔고 등은 파이다 못해 인공 피부로도 되돌려 놓을 수 있을지 애매할 정도로 다쳤다. 마찬가지로 송하나 역시 사지는 멀쩡했지만 충격파와 열기로 인해 온몸이 익고 혼수상태에 있는 상황이었다.
A, B급 헌터들조차 죽기 직전인 상태였다. 그런 폭발이었는데 아무리 가장 안쪽에 있었다지만 이미 죽기 직전인 진하가 살아있는 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예진의 생명력 공유가 아니었다면 죽었겠지.’
웃기게도 그 상황에서 진하를 살린 사람은 또 하예진이었다. 급소인 머리와 심장이 지켜진 진하는 매우 위험할 정도로 다치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았고 며칠이 지난 지금은 그래도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고 있었다.
“넌 진짜 복 받은 놈이다.”
이기수가 숨을 몰아쉬고 있는 진하를 보며 말했다.
“나도 알아.”
이기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진하가 쓰게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복이란 복은 다 받았다. 설마 또 그 3명에서 지켜질 줄이야…….
“하아…….”
자신의 한심함에 진하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도대체 자신이 뭐라고 그 3명이 목숨까지 내놓고 지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똑똑, 드르륵.
그때 누군가가 병실의 문을 두들긴 후 들어왔다. 그리고 나타난 사람을 보며 진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오랜만이에요?”
종합 음료 세트를 든 사서가 진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기수는 그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셔?”
“사서.”
“사서?”
순간 되묻던 이기수는 진하가 누굴 말하는 건지 깨닫자마자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건 빠르게 나으시라고 가져왔습니다.”
사서는 이기수에게 주스를 내밀었고 정체를 깨닫고 온몸을 긴장시키던 이기수는 순간 놀라며 그가 건넨 주스를 받았다.
“긴장하지 마세요.”
“아…… 네.”
사서는 이기수에게 빙긋 웃어주고는 근처에 있는 의자를 하나 가져와 앉았다.
“왜…… 오신 거죠?”
“흠…… 얘기하러? 근데 일단 모습부터 정갈하게 바꿔야 할 것 같네요.”
진하의 물음에 간단히 대답한 사서가 손을 딱! 하고 튕겼다. 그러자 상처로 가득해 움직이기조차 힘들어 보였던 진하의 몸이 깔끔한 모습이 되었다.
진하는 순식간에 나은 자신의 몸을 슬며시 움직여 보았다. 겉모습만 아니라 안까지 확실하게 나은 상태였다.
“이제 좀 낫네요. 그럼 이야기 좀 해 볼까요?”
“이야기요?”
진하의 물음에 사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격도 생겼겠다. 이제 당신과 이 세상에 대한 비밀도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네요.”
“설마, 고작 그거 하나 때문에 찾아온 건가요?”
“고작이라…… 뭐, 아직 자격에 대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면 그런 말 할 수 있죠. 아무튼, 이제 자격이 됐으니 당신은 알아야 하고, 선택해야 하며, 또 이겨내야 합니다.”
사서의 말에 진하가 큭 하고 웃었다. 사서가 말하는 게 뭔지는 몰랐지만 하나 확실한 건 이제 그에게 무엇을 할 만한 힘이나 그런 건 남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뭘 선택해야 하고 뭘 이겨내야 할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저에겐 그럴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요?”
“차라리 다른 사람이 자격을 얻을 때까지 다시 기다리시는 건 어떻나요?”
진하의 말에 사서가 옆에 서 있는 이기수를 쳐다보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진하가 로드를 이용해 이기수에게 자격의 씨앗을 건넸다는 건.
“알고는 있습니다. 설마 제가 심어놓은 씨앗을 남한테 양도할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에요. 그 사념이 참 쓸데없는 짓을 해줬어요.”
“그러니 저 말고 이기수와 이야기하시죠.”
“아뇨,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겁니다. 이미 준 기운을 당신이 마음대로 사용한 건 이미 준거니 그렇다 치지만 제가 당신에게 말하는 건 제 뜻이 아니거든요.”
“뜻?”
“네, 제가 할 일은 오직 하나, 당신이 자격을 갖췄으니 받은 부탁에 따라 당신을 데려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거부하면요?”
“거부하세요.”
사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진하를 바라봤다. 마치 거부하는 것을 기다리는 말투였다.
“저는 부탁을 받은 것뿐입니다. 그 내용에 절대로 강제는 들어있지 않아요. 당신이 안 가면 그냥 이대로 시간이 흐르는 것뿐이죠.”
“간다면?”
“뭐, 이대로 유지되거나 무언가 변화되거나?”
진하는 그의 말에 곰곰이 고민했다. 자신이 간다면 무언가 변화가 시작될 수도 있다는 말,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진하에게는 매력적인 말이었다.
“잠깐만요.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진하가 뭘 선택하고 뭘 해야 한다는 거죠?”
잠자코 듣고 있던 이기수가 사서에게 물었다. 사서는 그런 이기수를 보며 빙긋 웃어주었다.
“글쎄요. 많은 걸 선택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 선택은 본인이 겪고 결정하는 거고요.”
“제 말은 그 뜻이 아닙니다. 진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건지 똑바로 말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기수의 말에 사서가 이기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모습에 이기수는 순간 흠칫했다.
“하아, 이야기에 필요한 존재에 씨앗을 가진 존재니 내쫓기도 그렇고…….”
한숨을 내쉰 사서가 입을 열었다.
“그가 갈 곳은 문방구의 원주인이 있는 곳입니다.”
“원주인?”
“그렇게만 아세요. 당신은 그 이상 말해 봤자 이해조차 못 하니까요.”
사서의 단호한 말에 이기수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 정확히는 말하려고 했다가 알 수 없는 힘이 입이 다물어졌다.
“가면 뭘 알 수 있는 거죠?”
“그건 선택하면 알게 되겠죠?”
사서는 그 말을 마치곤 조용히 진하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한 그, 이대로 선택하라는 소리였다.
“가죠.”
진하가 고심 끝에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그가 이곳에서 할 일은 모두 끝내놨다. 더 이상 미래를 바꿀 만한 힘도 없었고, 지식은 모두 넘겼다.
그런 상황에서 뭔가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가는 게 옳았다. 적어도 진하의 생각에는 그랬다.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그럼 가죠.”
“잠시만요. 저도 갈게요.”
무언의 기운에 입이 봉해졌던 이기수가 겨우 입을 열며 말했다. 사서는 그런 그를 보고 살짝 눈을 빛냈다. 약하게 했지만 설마 입을 봉한 기운을 뚫고 말할 줄은 몰랐으니까.
“당신은 안 돼요.”
“어째서죠?”
“자격을 갖추세요. 사실 갖춘다고 해도 그분이 원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만 말이에요.”
이기수는 사서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진하는 그런 이기수를 보며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잠깐 다녀올게. 위험한 곳도 아니야.”
“네가 그러고 위험한 곳을 가는 게 한두 번인 줄 알아?”
“이번에는 진짜야.”
그 말을 한 진하는 몸을 일으켜 환자복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사서를 따라 병원 밖으로 나왔다.
“공기 참 좋죠?”
병원 밖으로 나온 사서가 아침 공기를 크게 마시며 말했다. 진하는 그의 말에 공감했다. 아침 공기는 그 역시 좋아했으니까.
“아침 공기 자체인 것도 좋지만 역시 고향의 공기라서 그런가, 특히 좋더라고요.”
“이곳에서 태어나셨습니까?”
신적 존재가 태어난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한국이 고향이라니 의외였다. 물론 동양인처럼 보이긴 했지만 딱히 그에게 고향이라는 것이 있을 줄이야…….
“네, 정확히는 여기 한국은 아니에요. 다른 차원의 한국이 고향이죠.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해요. 어떻게 수많은 차원 속에서도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리도 많고, 닮았는지.”
“또 다른 한국이라…….”
“네, 좋아요. 그 세상은 몬스터도 없고, 그저 평화롭게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사람밖에 없죠.”
사서의 말에 진하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몬스터가 없는 세상이라면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부모님 밑에서 자유롭게 뛰어놀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다 다치고 오면 하예진에게 혼나고 공부는 지지리도 하기 싫어서 숙제는 그녀의 것을 베꼈겠지.
그러나 크면 대학에 가서 이리저리 놀다가 평범하게 취직하고 평범하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좋은 세계네요.”
“뭐, 그 세계에서도 나쁘지 않은 곳에 태어났으니까 하는 말이죠.”
“꽤 오랜 시간 그곳에 가지 못했나 보네요.”
진하의 말에 사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의 시간상으로는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겠지만 연수로만 따지면 벌써 수십 년이 넘게 다른 차원을 떠돌았으니 진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일이 일인지라 고향에 가기 어렵죠. 사실 이 일도 하기 싫을 때가 많아요. 아니, 그냥 하기 싫죠.”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그럼 그냥 그만두면 되지 않나요?”
“아뇨, 못해요. 제가 선택한 길이니까요. 당신도 그런 적 있지 않나요? 너무 좋아서 시작했지만 가끔씩 때려치고 싶을 때. 하지만 그렇게는 하지 못하는 경우요.”
“뭐…… 있죠.”
진하가 그의 말에 공감했다. 확실히 진하에게도 그런 일들은 있었다. 그런데 신적 존재도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니 참 웃긴 일이었다.
“그런데 당신들은 신적 존재인가요?”
“신적 존재?”
“네, 인간을 창조하고 몬스터를 창조한 그런 존재요.”
진하의 물음에 사서가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힘이나 능력만을 보면 그들은 신에 가까운 존재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신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아뇨, 신은 아니에요. 저희도 신에게 창조당한 생명체니까요. 그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명 중 하나일 뿐이죠.”
“그런 힘을 가지고도요?”
“네, 저도 평범한 인간인 걸요? 그저 우연히 자격을 얻고 이만큼 살아가게 된 거지.”
“자격이라…….”
수없이 들어왔던 말, 그저 이 세상의 비밀을 알 수 있게 하는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격이란 건 어쩌면 생각보다 더욱 큰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 다 왔습니다.”
사서는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자신의 앞을 가리켰다. 진하는 사서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다가 멍하니 물었다.
“진짜 여기라고요?”
“네.”
“서울 한복판인데?”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일반적인 시내에 존재하는 집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런 곳이 목적지라니…….
“자, 어서 들어가죠.”
사서는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그를 지켜보던 진하는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떤 곳인지는 모르지만 따라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를 따라서 가야 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시끄러, 이눔아!”
사서의 말에 호통치며 나타나는 할머니, 진하는 할머니를 멍하니 바라봤다. 어디 있을까 했는데 설마 이렇게 근처에서 살고 있을 줄이야.
“뭐여, 왔냐? 왔으면 얼른 앉지 않고 뭐 해!”
갑작스런 할머니의 말에 진하는 재빠르게 할머니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사서 역시 쓰게 웃으며 그녀가 가리킨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근데 저는 이제 할 일 다 했으니까 가면 안 돼요?”
“왔으니까 배라도 먹고 가.”
그 말과 함께 할머니는 냉장고에서 배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배는 냉장고에 있던 것치고 매우 싱싱했다.
아삭!
“음, 이거 맛있네요. 할머니, 이거 더 있어요?”
“없어. 네가 나가서 사 먹어. 요 앞 시장에 싱싱한 놈 많이 있더라.”
“돈 없는 백수가 무슨 과일입니까? 사치입니다.”
“돈 없어? 그럼 내 밑에서 일하라니까? 시급도 괜찮게 줄게.”
“으…… 싫거든요? 억만금을 주더라도 싫어요. 그냥 차라리 백수로 이곳저곳을 떠도는 게 낫지.”
진하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보며 혼란스러웠다. 마치 그냥 일반 가정집에서 일반적인 대화를 나누는듯한 모습은 진하에게 너무나 이질적으로 보였다.
“얼씨구, 너는 또 왜 죽상이냐?”
사서와 대화를 나누던 할머니가 진하를 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진하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만져봤다.
“거, 알바하라고 맡겨놨더니 물건은 지가 다 사버리질 않나, 몸을 망치질 않나. 쯧, 쯧! 아무튼 요즘 젊은이들은 몸을 아낄 줄을 몰라요.”
“하하, 어쩌겠어요. 그 나이대에 그걸 알 리 없잖아요.”
“너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야. 너도 적당히 돌아다녀, 그러다 몸 상한다.”
사서는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의 튼튼함을 어필했지만 할머니는 그런 그를 무시한 채로 진하를 바라봤다.
“그래, 어떠냐 다시 살아본 소감이.”
“뭐…… 나쁘진 않습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망가지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