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쿠르릉, 쿠웅!
“이제 포기하는 건 어때?”
진하는 그녀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어차피 이미 끝난 상황이었다.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위치도 손쉽게 밝혀진 상황, 그녀가 더 이상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닥쳐.”
진하에게 일갈한 그녀가 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수화음이 들린 후 연결되는 전화음.
“이곳이 들켰어.”
―흠…… 48시간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럼 김진하를 죽여.
“아직 정보를 캐내지 못했다.”
―그게 중요하긴 하지만 괜찮아. 어찌 됐든 상대는 김진하만 없으면 갈가리 찢어질 놈들, 죽이기만 하면 돼.
‘뭐지?’
이신혜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분명 아쉬워하는 말이 가득했지만 엄청 급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본인이 만들어놓은 계획이 틀어진 사람치고는 묘하게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그럼 내 동생은?”
―걱정 마, 이미 치료비는 넣어놨고, 치료도 받을 거야. 죽이기만 해.
뚝!
자신의 할 말만 하고 끊어진 전화기. 옆에서 엿듣던 진하는 그의 목소리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미꾸라지 같은 놈.’
송하나가 분명 그의 계획을 망쳤을 텐데도 무섭도록 침착하게 다음 계획을 말하고 있었다. 말투로 보아 애초에 실패까지 염두에 둔 것 같았다.
채앵!
가만히 있던 이신혜가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는 멍하니 자신의 단검을 들어 진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진하를 향해 단검을 내리그었다.
사악!
순간 눈을 감았던 진하가 실눈을 떴다. 그녀의 검은 단검 대신 진하를 묶고 있던 특수한 밧줄을 끊어냈다.
“지금부터 넌 인질이 된다.”
그녀는 멍하니 있는 진하를 잡아당겼다. 잡아당겨진 진하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편, 이신혜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그녀는 신지하의 명령에 따라 바로 진하를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단검을 내리긋는 순간 그러지 못하고 그만 인질로 삼아버리고 말았다.
‘내가 왜 이러지?’
평소와는 다른 행동에 혼란스러워하는 그녀. 하지만 혼란스러워하는 머리와는 다르게 그녀의 손은 어느새 진하를 앞세웠다.
“가.”
“어딜?”
진하의 물음에 이신혜가 한쪽 벽을 만졌다. 몇 곳을 두들기자 열리는 벽, 그녀는 열린 벽 안쪽의 공간을 가리켰다. 진하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통로를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앞서 걷던 진하는 뒤에 있는 이신혜에게 물었다.
“왜 안 죽였지?”
“무슨 소리지?”
“나를 죽이고 혼자 빠져나가는 게 더 좋은 방법이었잖아. 왜 안 죽였냐는 거야.”
“그저 만약을 대비하는 것뿐이다. 혹여나 걸릴 경우, 너를 인질로 삼아 도망가기 위한 거지.”
그녀의 말에 진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그녀의 입장은 진하를 죽여야 했다. 이런 식으로 인질로 만드는 게 아니라 빠르게 죽이고 도망가는 게 정답이었다.
‘그런데도 나를 죽이지 않는다라…….’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진하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징조였다. 아직 그녀를 살리고 싶은 진하로서는 그녀가 마음을 고쳐먹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아직도 신지하의 말을 이행할 생각이야?”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바꿀 생각은 없어.”
그녀의 말에 진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가기나 해라.”
그녀는 어느새 밖으로 나가는 문을 향해 진하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진하는 그녀의 말에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며 뒤에 있는 이신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야……. 어차피 네가 뭘 하든 늦은 것 같은데 말이야.”
문이 열리고 드러난 광경은 비밀 장소를 감싼 조직원들, 그들은 저마다 아티팩트인 장난감 총을 든 채로 이신혜를 겨누고 있었다.
끼악!
그리고 위에서 들리는 소리, 진하는 그 소리에 간단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했던 명령 모두 취소하도록 하지.”
끼악!
그 말과 동시에 허공에서 내려오는 주작, 그리고 주작이 땅에도 닿기 전에 한 사람이 주작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꼴이 말이 아니네.”
“나야 뭐.”
송하나는 씨익 웃으며 진하의 목에 단검을 대고 있는 이신혜에게 말했다.
“너도 거기까지 하지?”
“길을 치워라. 아니면 이 인질의 목숨은 없다.”
“그런 협박이 정보 길드에게 통할 것 같아?”
송하나가 여유롭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어차피 이미 이 공간은 거의 제압된 상태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한 것은 그녀였다.
애초에 길을 비켜준다 해도 그녀가 진하를 살려주리라는 보장 또한 없었다.
“그만 포기하지 그래. 어차피 네 동생을 돌봐주려면 네가 있어야 하잖아.”
진하가 다시 한번 이신혜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신혜는 요지부동인 채로 진하의 목에 단검을 들이밀었다.
“치료비와 최신 치료, 그리고 모든 죄를 묻지 않을게.”
“거부한다.”
“이런 조건에도 신지하를 따르는 이유가 뭐야?”
“신지하를 따르는 게 아니야.”
“그럼?”
“그냥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뿐이다.”
그녀의 말에 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더 효율적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신혜는 그게 더 효율적이라고 믿고 있었다.
‘정신계에 당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신지하를 그렇게 따르는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아무튼…….”
그 순간 진하의 눈앞이 크게 빛났다.
* * *
[콰아앙!]
커다란 소음과 함께 폭발하는 모습이 생중계되는 화면, 그 모습을 보며 신지하가 혀를 찼다.
“너무 쉽게 생각했나?”
이신혜라면 김진하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너무 뭉그적거렸다. 거기다가 어설프게 인질로 잡기까지 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흐음, 분명 계약은 제대로 이행되고 있었는데 말이지.”
적어도 그에게 협조하는 동안에는 절대 배신하지 못하도록 아티팩트를 통해 계약을 맺기까지 했다. 그렇다는 건 그를 배신했다는 건 아니라는 건데 어째서 진하를 죽이는데 뭉그적거렸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뭐, 상관없나?”
만약을 대비해 건물 밑에다 깔아놨던 폭탄을 터뜨렸으니 살아 있을 리 없었다. 다른 헌터들은 몰라도 적어도 상처투성이에 죽기 직전의 상처를 가진 김진하는 확실히 죽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가 깔아놓은 폭탄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흐음,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김진하는 죽었고, 그는 무사히 국외로 탈출했다. 자신을 방해하던 커다란 방해물도 없어졌으니 이제 무얼 하든 그를 막아설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제 그딴 짓은 그만하고 싶기도 하고.”
초기에 잘못 행동해 걸렸던 목줄도 풀렸고, 건들 단체도 없었다. 그나마 협회나 정보 길드에서 시비를 걸어올 수도 있지만 혼란한 상황에서 그럴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정보 길드와 협회가 서로 사이가 좋을리 없었다.
그 중심점을 잡아주는 김진하를 날렸으니, 분명 알아서 싸우다 자멸할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건들 단체도 없는 기업은 그가 크게 관여하지 않아도 알아서 돌아갈 테니 새로운 일을 해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그때 그의 전화기가 울렸다. 그 소리에 신지하가 미간을 꿈틀거렸다. 왜냐하면, 올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오랜만이야.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신지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돌아와라.
“싫다고 말했을 텐데?”
―아무리 네가 싫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돌아와라. 네가 필요하다.
“하아, 젠장. 알았어.”
짧은 통화를 마치고 끊는 신지하. 잠시 혀를 찬 그는 옆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
“비행기 출발시켜, 목적지는 미국이다.”
“네.”
비서는 고개를 숙인 후 빠르게 기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혼자 남은 신지하는 창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아, 미국이라…….”
* * *
“여긴…….”
진하는 흐릿하게 보이는 주변 풍경을 살펴보았다. 흐릿하긴 했지만 그의 눈에 익숙한 공간, 문방구였다.
[어디 한번 뽑아 볼 겨?]
진하의 귓가로 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하가 들어봤던 목소리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뽑아? 뭘?’
진하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진하의 눈앞에 생겨나는 뽑기 판, 진하는 다급하게 뽑기 판을 잡아들었다.
[뽑아, 그러면 살려줄 수 있어.]
진하는 목소리의 말에 따라 다급히 뽑기를 잡아들었다.
띠링!
<포인트가 부족합니다.>
<부족한 포인트는 수명으로 대체됩니다.>
“무슨 소리야? 포인트라면 있잖아!”
아직 30만이 안 되게 포인트가 있었다. 한번 뽑는 데 5만 포인트인 뽑기가 안 뽑힐 리 없었다.
진하는 다급하게 자신의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포인트: 290,500포인트>
역시나 남아있었다. 진하는 다시 한번 뽑기를 뽑아보려고 했지만 뽑기는 요지부동이었다.
[왜 안 뽑아? 뽑으면 살려준다니까?]
“이익! 익!”
진하는 있는 힘껏 뽑기를 잡아당겼지만 뽑기는 절대로 뽑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진하는 그럼에도 계속해서 뽑기를 잡아당겼다. 이것만 뽑으면 하예진을 살릴 수 있었다.
[정말 살릴 수 있어?]
순간 낮게 깔리는 목소리, 진하는 그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하예진은 아직 안 죽었잖아. 어떻게 살리려고?]
[부활로 하예진이 일어날 수 있을까?]
[뽑기 전에 네가 먼저 죽을걸?]
진하 주위를 맴돌면서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 들, 진하는 그런 목소리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뽑기를 잡아당겼다.
그렇게 한참을 잡아당기기 시작하자 아주 조금이지만 뽑기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지지직, 지직!
‘된다! 살릴 수 있어!’
진하가 젖 먹던 힘까지 뽑기를 잡아당겼다. 이것만 뽑으면 살릴 수 있었다. 분명 하예진을 살릴 수 있었다.
지직, 뚝!
털썩!
뽑기가 뽑히고 잡아당기는 힘의 반동에 못 이겨 뒤로 쓰러진 진하는 기쁨에 찬 얼굴로 자신이 뽑은 뽑기를 펼쳐봤다.
“어?”
뽑기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끈적한 피가 묻어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진하는 뽑기를 닦기 위해 종이를 자신의 옷에 문질렀다.
[그걸로 지워지겠어?]
그 순간 그를 비웃는듯한 목소리가 진하의 귀에 꽂혔다. 진하는 애써 목소리를 무시하며 계속해서 종이에 묻은 피를 닦기 위해 노력했지만 피는 닦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살아나니까 기분이 좋아?]
[혼자만 살아남은 기분이 어때?]
진하의 주변을 맴돌면서 계속해서 속삭이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진하는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너 혼자 살고 모두를 죽인 살인자.]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결국, 진하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보길 포기한 채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자 들리지 않는 목소리.
“하아, 하아…….”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진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목소리만 안 들린다면 그를 괴롭히는 건 더 이상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
덥썩!
진하의 어깨를 잡는 손 하나. 진하는 오싹한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보인 사람의 얼굴은…….
“허억!”
거친 숨을 토해내며 일어난 진하는 익숙한 천장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또…….”
지독한 악몽이었다. 도대체 왜 계속해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일어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