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이신혜와 만난 건 그저 우연이었다. 던전을 오가며 이런저런 공략대에 몸을 실어 보내던 시기, 버팀목이었던 이진하를 잃고 완전히 절망하던 시기에 만난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녀와 사랑에 빠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녀나 진하나 세상에 신물이 나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서로 그런 지친 눈을 알아보았던 건지 둘은 빠르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둘은 항상 서로를 아꼈고, 더 가족 같기도, 또 웬수 같게도 살았었다. 마치 항상 가족 같았던 하예진과 모든 걸 포기한 채로 서로를 보듬어만 주던 송하나와의 중간이랄까?
그렇게 둘은 사랑했고,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였다. 정확히 그 순간만 아니었다면.
[꼭 그 던전에 가야 해?]
[응, 가야 해.]
[도대체 왜 간다는 거야? 딱히 좋은 던전도 아니잖아?]
[거기에 내 동생 병에 효과적인 치료약이 자생한다는 소문이 있어.]
그때 말렸어야 했다. 이미 죽은 동생의 치료약을 찾아봤자 쓸모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차마 많은 미련이 남은 그녀의 눈을 본 진하는 그녀를 말리지 못하고 같이 던전으로 들어갔다.
‘그때가 마지막이었지.’
던전에 진입하고 중간쯤 지났을 때 대규모의 몬스터 습격이 있었고 거기서 싸우던 그녀는 독에 중독되어 죽어갔다.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겠어.’
그때는 그저 몬스터의 독에 죽어간다고만 생각했다. 해독제도 잘 통하지 않는 그런 독. 실제로 그때 공략했던 던전은 특이한 독충과 독물이 많이 사는 던전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그때 그녀를 죽였던 것은 독이 아니라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최상위 A급이라면 절대로 그 정도 C급 최상위 독에 쉽게 죽을 수준은 아닐 테니까.
‘넌 그때도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구나.’
진하는 차갑게 자신을 바라보는 이신혜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직도 웃을 기운이 남았나?”
이신혜는 씁쓸히 웃는 진하를 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더 고문하자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고문하기도 어려웠다.
“아니,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그때 네가 보여줬던 태도는 진짜였을까, 아님 거짓이었을까.”
“무슨 소리지?”
“무시해도 돼. 그냥, 지나간 넋두리 같은 거니까.”
진하의 말에 이신혜는 불쾌해지는 걸 느꼈다. 처음 잡혀 왔을 때부터 진하는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곤 했다. 고문을 해도 원하는 대답을 하기는커녕 이상한 혼잣말만 하기 일쑤에 심지어 자신에게 뭔가 서글픈 눈동자를 보내기도 했다.
‘짜증 나.’
더욱이 싫은 사실은 그런 말과 눈빛에 그녀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뭔가 가슴속에서 몽글몽글한 감정이 피어오르곤 했다.
지금까지 같이 지내 온 진하에 대한 정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애초에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이기도 하고, 잡아 올 때까지만 해도 그런 감정이 피어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뭘 그리 고민해?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이라도 드는 거야?”
“닥쳐라.”
진하의 이죽거림에 이신혜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 죽어가면서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할 기회는 이제 얼마 없어. 너도 알겠지? 정신 능력자가 오면 너는 백치가 될지도 몰라.”
“큭, 상관없어.”
“살고 싶지 않은 건가?”
“딱히?, 내가 할 일도 다 했고, 살아갈 이유도 거의 남지 않았는데 살고 싶을까?”
지금의 진하는 그저 다 써서 고장 나기 직전의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쓸모도 없고, 그저 자리만 차지하는 그런 존재. 그나마 그런 그를 아껴주던 사람은 자신으로 인해 영원히 잠들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자살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저 숨 쉬고 살아갈 뿐이며 자신 앞에 있는 과거의 인연을 보며 슬퍼하기만 하는 것. 그게 지금 진하에게 남은 다였다.
“살 생각이 없나 보군.”
“약간은?”
“그럼 왜 탈출하려고 했던 거지?”
그렇게 삶에 미련이 없다면 처음에 굳이 탈출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진하는 탈출을 시도했다.
“짐이 되는 건 싫으니까. 그리고 널 도와주고 싶어서.”
“날?”
“그래, 협박당한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지금 보니 단순한 협박은 아닌 것 같고, 설득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그냥 있는 것뿐이야.”
욱씬.
이신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말에 가슴에 통증이 이는 걸 느꼈다.
“뭔 짓을 한 거지?”
알 수 없는 가슴의 통증에 이신혜가 진하를 보며 말했다. 진하는 그런 그녀를 보며 그저 씁쓸히 말했다.
“아무것도. 난 너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
“무슨 짓을 하든 소용없어. 몇 시간 후면 정신 능력자가 올 거고, 너는 모든 걸 토해내게 될 거야.”
“글쎄…….”
“아무도 널 도와줄 수 없어. 이기수도 올 수 없고 협회에서도 오지 않아.”
뭔가 격양된 이신혜를 보며 진하가 고개 저었다. 이기수도, 협회도 기대한 적 없었다. 납치한 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들이 올 걸 뻔히 아는데 대비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저 정신 능력자가 오더라도 그에게 밝혀낼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초연한 것뿐이었다. 아직 자격이 없는 자들은 그가 알고 있는 말을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그나마 알 수 있는 정보도 그다지 쓸만한 건 없었다.
“그나저나 너는 왜 그의 밑에서 일하는 거지?”
“…….”
“내가 아는 너라면 그런 일이 좋아서 했을 리는 없고, 동생 때문에?”
“잘도 그런 거짓된 정보를 아직도 믿고 있군.”
“거짓일 리 없잖아.”
회귀 전의 그녀가 자신을 속였을 리 없었다. 비록 자신의 정체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지언정 그에게 해줬던 말이 모두 거짓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처음 탈출을 시도할 때 동생이라는 말에 약하지만 흔들리던 그녀의 눈동자를 진하는 잊을 수 없었다.
“돈이 문제라면 협회에 말해. 해결해 줄 거야. 치료가 문제라면 포기해.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닥쳐!”
“너도 알잖아?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차도가 없다면 그저 연명치료를 할 뿐이란 걸.”
그녀에게 들었던 동생의 병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이 지나도 치료 방법을 찾지 못했던 병이었다.
지금에서야 찾을 리 만무하고 아무리 연명치료를 하더라도 결국 그녀의 동생은 죽게 되어 있었다.
“날 풀어달라는 게 아니야. 그저 네가 자유롭게 살라는 거지.”
회귀 전의 결과를 생각하면 그녀가 살아남을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신지하가 그녀를 죽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 달랐다. 어찌 됐든 신지하는 한국에 오래 남아 있지 못한다. 지금 하는 일도 국외로 도망가기 전에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행위지. 반격을 위한 행위는 아니었다.
결국 그녀가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부터 숨어서 살아. 한 1, 2년만 숨어 살면 너에게 자유가 올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말아라.”
“동생은 어차피 죽어. 너는 이용만 당하다 죽을 거고. 그냥 지금이라도 도망가서 자유롭게 살아.”
퍼억!
진하의 얼굴이 크게 뒤로 젖혀졌다. 주먹을 휘두른 이신혜는 죽일 듯이 진하를 노려보았다. 진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래, 그렇게 감정적인 게 내가 아는 이신혜지. 괜히 모든 걸 억누르지 마.”
“이…….”
무언가를 말하려던 이신혜가 결국 한숨을 크게 쉰 뒤에 뒤로 물러났다.
‘휘말려 들지 말자.’
그의 말을 들을수록 뭔가 가슴이 몽글했고, 불쾌했다. 감정 통제는 통하지 않았고 항상 냉정했던 그녀는 진하의 말 몇 마디에 모래성처럼 스르륵 무너졌다.
‘안 들으면 되는 거야.’
괴상하게 말하는 진하의 말을 듣지 않으면 되는 거였다. 그의 말을 들을수록 마음이 이상하게 흔들리는 걸 보면 무언가 술수를 부린 게 분명했다. 그러니 아예 아무것도 듣지만 않으면 문제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신혜는 울렁거리는 자신의 맘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앙!
위잉! 위잉!
―침입자 발생, 전 병력은 기지를 엄호한다.
갑작스런 사이렌 소리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아직 진하를 납치한 지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알기로 이곳은 정말 세심하게 지은 공간이었다. 이렇게 빠르게 들킬 가능성이 없었다.
“어떻게?”
“흠, 아무래도 우리 멍청이가 한 건 했나 보네.”
진하는 놀라고 있는 이신혜에게 말하며 씁쓸히 웃었다. 그런 진하의 손가락에선 반지 하나가 잘게 진동하고 있었다.
* * *
“뭐라고요?”
―이기수 헌터는 현재 동원하지 못합니다. 타 지역에서 지원요청이 왔어요.
“그걸 이기수가 받아들였다고요?”
진하가 납치된 시점에서 이기수가 그런 요청을 받을 리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알기론 이기수에게 진하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사람 중 하나니까.
―그게…… 타 지역에서 테러를 일으킨 테러리스트들이 인질을 붙잡고 이기수 헌터를 데려오라고…….
귓가에 들리는 말에 송하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너무나도 작위적인 상황, 딱 봐도 이기수를 떼어놓으려는 수작이었다. 이기수의 성격을 꿰뚫어 본 누군가의 소행이었다.
―일단 신지하 및 신후 그룹의 국외 출입을 금지시켰으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송하나는 수화기 건너편에 있는 송준하에게 역정을 냈다. 고작 그런 거로 그들을 막을 수 없거니와 막을 수 있다 하더라도 지금 그들을 막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진하를 찾는 게 중요했다.
―마음이 급한 건 알지만 조금만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이미 협회원과 당신의 조직원들이 모두 나서서 수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머리카락 하나조차 안 보이니까 하는 말 아냐!”
―진하 씨라면 무사할 겁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감정적으로 대응한다고 뭐가 되지도 않고요.
송준하의 말에 송하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협회를 뒤집은 송준하가 그런 말을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 변했군.”
―아뇨, 변하지 않았습니다. 송하나 씨가 오히려 감정적인 겁니다. 저도 진하 씨를 잃고 싶진 않습니다. 그저 이럴수록 냉정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됐어, 끊어.”
송하나가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답답한 가슴을 연신 두드렸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사실 그의 말에서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감정적인 대응을 해 봤자 쓸모가 없다는 걸 그녀도 너무나 잘 알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너무나 불안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감정적으로 대응할 정도로 진하에 대한 마음이 너무나 커져 버렸다.
분명 처음에는 호기심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새 그에 대한 마음이 너무 강해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그가 없으면 살기 싫다는 느낌까지 들고 있었다.
“젠장.”
땅을 내리친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인 반지를 만졌다. 애초에 이 반지만 아니었으면 진하와 딱 붙어있어 납치당할 일도 없었을 텐데…….
‘잠깐…….’
그녀가 반지를 매만지며 자신에게 걸린 명령에 대해 되짚어봤다.
‘진하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말 것.’
이 명령에 의해 그녀는 진하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정확히는 50미터 시점부터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구역질이 나고, 100미터부터는 메스꺼움이, 500미터 안쪽부터는 거부감이 드는 상태였다.
“반대로 말하면 가까워질수록 거부감이 심해진다……. 이봐, 모태빠.”
삐약!
“너 아직 날 수 있어?”
삐야악!
“가자.”
어쩌면 진하를 빠르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