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99화 (99/202)

#099

타악!

진하는 손에 잡힌 물건을 곧바로 입안에 집어넣었다.

<테이프 사탕:마치 테이프를 연상시키는 사탕, 입에 물고 츄르륵 먹다 보면 온갖 잡념이 사라진다. 다만, 한 번에 입에 넣으면 잡념이 사라지다 못해 정신이 날아갈지도?>

질겅, 질겅.

곧이어 진하의 머릿속에서 잡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 관리자의 정체, 시간이 끝난 후 부작용, 미래에 대한 걱정 등 진하가 싸우면서 저도 모르게 무의식중으로 생각하던 것들이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뭘 하는지 모르지만 죽어라!”

이슬라는 무언갈 씹고 있는 진하를 보며 그대로 블러드 커터를 날렸다. 그리고 그 스킬을 멍하니 바라보던 진하가 슬쩍 몸을 틀었다.

콰앙!

한 끗 차이로 블러드 커터를 피해 내는 진하. 그 모습에 이슬라는 어이없어하며 빠르게 진하를 향해 달려들었다.

휙! 휘익! 휙!

하지만 이슬라가 아무리 빠르게 달려들어 공격해도 한 끗 차이로 피하는 진하. 이슬라는 그 모습에 더욱 분노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뭔 생각이냐.]

한편, 진하의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로드는 진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진하가 피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진하의 본능과 로드의 의식 때문이었다.

진하가 무념무상이 되더라도 이슬라를 인식하고 있는 로드의 시선과 전투 중인 진하의 본능적인 감각으로 인해 겨우 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회피 이외의 공격이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웃긴 건 이것 자체를 진하가 의도한 것이라는 거였다.

[잠깐 나 좀 도와줘요.]

그 말만 남기고 자신의 정신 안쪽으로 깊숙이 침잠해 들어간 진하, 그의 의도를 로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뭘 하는 거냐.’

이제 고작 18분이 남았다. 당장 격을 벼르기 위해 노력하기도 빠듯한 시간인데 전투는커녕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아무리 로드가 인식하는 걸 도와주고 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건 진하의 본능, 점점 거세지는 이슬라의 공격에 점차 밀리기 시작하는 게 눈에 보였다.

한편, 모든 상황을 뒤로한 채 자신의 정신 깊숙이 침잠해 들어간 진하는 조용히 자신의 기억을 뒤지고 있었다.

‘당장 잡념을 없애지 못해.’

아무리 실습 때와는 다르고 느낌이 그의 감각에 남아있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거였다. 그는 한번 확실하게 느낀다고 바로 따라 하는 천재가 아니었다. 애초에 천재였으면 벌써 성공했을 테니까.

‘하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잡념을 없애고 무의식적으로 죽인다는 일념으로 격을 날카롭게 벼리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그와 비슷한 상태로 만들 수는 있었다.

‘가장 첫 번째는 1차 게이트 폭주 때 죽기 전.’

그때의 진하는 거의 정신을 놓기 일보 직전이었다.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쌓인 피로와 동급의 몬스터를 만나 죽기 직전까지 몰린 상태였었다.

그때, 진하가 가진 생각은 오로지 하나. 제발 죽여야 한다였다. 반드시 죽이겠다는 필살의 의지가 아니라 죽여야지만 살 수 있다는 절박함, 그게 필요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2차 게이트 폭주 마지막.’

이기수가 죽었을 때의 기억이 필요했다. 분노, 텅 빈 마음, 원망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섞여 몬스터를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던 그 순간이 필요했다.

‘죽여야 된다는 절박함에 분노라는 감정을 담는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연기를 해야 했다. 그 당시의 감정들을 끌어와 똑같이 표현해야 했다. 그래야 로드가 원했던 격을 벼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진하의 절박함 위로 분노의 기억들이 하나, 둘씩 쌓이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 휘두르던 칼은 이기수를 죽였던 몬스터를 향해 휘두르는 칼날이 되고, 몬스터를 바라보는 눈길은 제발 죽어달라는 절박함에서 죽여 버리겠다는 분노로 덧씌워져 갔다.

‘아니, 연기가 아냐.’

연기 정도로는 원하는 만큼 격을 벼릴 수 없었다. 결국, 두 감정과 사건은 모두 그가 겪었던 일이었다. 연기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생각해 내고 표출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저 죽여야 한다는 절박함과 분노.’

모든 감정과 생각을 끌어올린 진하의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제야 왔냐.]

정신을 차리자마자 보인 건 저 멀리 처박힌 이슬라였다.

[10분이나 생각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중간에 2초 정도 썼다. 남은 시간은 5분인데 가능하냐?]

“충분해요.”

나지막하게 말한 진하는 이슬라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눈에 보이는 이슬라는 몬스터, 이기수를 죽인 하나의 몬스터와 겹쳐 보였다.

그런 진하의 변화를 인식할 걸까? 날아갔던 이슬라는 진하의 변화에 몸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동시에.

콰앙! 탓!

이슬라의 강한 발 구름과 그 직후 들린 작은 발딛음 소리.

촥!

순식간에 몸통이 베인 이슬라가 통증을 참으며 이를 악문 채 주먹을 내질렀다.

‘힘을 빼고.’

기억 속의 나는 나를 죽이기 위해 공격하는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고자 몸에 힘을 뺏었다. 아니, 뺐다기보단 이미 빠진 상태에서 쓸 수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휘익!

“죽어!”

손쉽게 주먹을 피해 이슬라의 뒤를 점한 진하, 이슬라가 다급히 몸을 틀었다.

―배리어!

그와 동시에 이슬라의 몸을 얇게 감싸는 막 하나. 진하는 붉은색 막을 보며 생각했다.

‘이기수의 피, 그리고 몬스터를…… 벤다!’

서걱!

배리어와 함께 이슬라의 몸이 두 동강 났다. 두 동강 난 이슬라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기세가 바뀌었다지만 아티팩트에 도움을 받아 겨우 피륙에 상처를 주는 정도에 불과했던 실력이 이렇게 변하다니.

서걱! 서걱! 촤라락!

그 뒤로 이슬라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무심하게 검을 휘두르는 진하의 검에 따라 수십 조각으로 조각나기 시작했으니까.

‘벤다. 벤다. 벤다!’

초점이 나간 진하는 오로지 앞에 놓인 물체를 벤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미쳤군.]

로드는 그런 진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격을 벼리는 법을 알려 주고 실습과 시범을 보여 줬더니 설마 다른 방식으로 격을 벼릴 줄은 몰랐다.

잡념을 없애고 의지와 일념만으로 벼려야 하는 게 격이었다. 그런데 그걸 아티팩트를 이용해 잡념을 없애고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여 벼릴 줄이야…….

[어쩌면 네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르겠군.]

진하는 분명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생각하고 그 뒤를 이기수에게 맡기고 목숨을 내다 버렸다. 그런데 로드가 보기엔 아니었다.

문방구를 가진 것도, 자격을 얻은 것도 운이 아니라 모두 운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리 없으니까.

“크르륵…….”

진하의 검을 피해 안개 화를 한 이슬라가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를 쫓아 진하가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만!]

그 순간 로드가 자신의 힘을 이용해 트랜스 상태에 빠진 진하를 일깨웠다. 그러자 순식간에 트랜스 상태에서 벗어나는 진하.

[세이프다. 1분 남았어.]

로드의 말에 그제야 진하는 이슬라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거대했던 기운들은 조각나서 떠다녔으며 그 핵심인 이슬라의 생명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대로 죽이면 안 된다는 거 알지?]

“알고 있어요.”

[미련한 놈.]

곧바로 이슬라를 향해 뛰어 들어가는 진하를 보며 로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푸욱!

진하의 검에 꿰뚫리는 이슬라, 그와 동시에 진하는 이슬라의 목을 물었다.

“뭐, 뭐 하는 거냐!”

진하의 갑작스런 행동에 이슬라가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피폐해진 상태의 이슬라는 진하의 몸을 휩싸리 떨쳐 내지 못했다.

[잘 가라. 어리석은 핏줄아.]

로드의 말과 함께 진하에게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는 이슬라의 생명력, 이슬라는 로드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를 깨닫고 저항하려 했지만 이미 죽기 직전의 상태인 그로서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었다.

[명심해. 네가 그냥 내 힘을 사용한다면 생존 확률은 20%야. 하지만 이슬라의 생명력을 흡수한다면 100% 너는 죽어.]

[상관없어요. 그걸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그리고 어차피 20%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미련한 놈.]

로드는 이슬라의 생명력이 흡수될수록 속에서부터 부서지는 진하의 몸을 보며 신음했다. 분명 고통이 극심할 것이다. 몸이 조각조각 나는 고통을 인간이 쉽게 참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진하는 절대 이슬라의 목을 물은 입을 떼지 않고 있었다.

“절대로 뺏길 수 없어!”

이슬라가 진하의 목을 물었다. 서로가 서로의 목을 물게 된 형태, 그 상태에서 이슬라는 진하가 뺏어간 생명력을 다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놈.]

로드가 그런 이슬라를 보며 혀를 찼다. 자신의 힘에 심취하다 못해 아예 머리까지 바보가 되어 버린 게 분명했다.

“어째서, 어째서!”

이슬라는 흡수하자마자 흩어지는 생명력들을 보며 절망하며 소리쳤다.

[격이 낮은 자가 높은 자의 격을 담는 건 불가능하지.]

이슬라의 생명력은 진하에게 흡수되면서 격이 매우 높아져 버린 상태였다. 격이 낮은 기운은 더 높은 기운을 품을 수 없는 법이었기에 결국 흩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사실 격이 낮은 건 진하도 마찬가지였지만 진하는 이슬라와 약간 상황이 다른 상태였다. 이미 자격을 얻었고 로드 때문에 일시적으로 격이 높아진 상태이기에 흡수가 가능한 상태였다.

‘아니, 흡수가 불가능해도 상관없나?’

흡수하는 족족 흩어져버리더라도 사실 진하의 입장에선 손해 볼 건 아니었다. 어차피 진하의 목적은 이슬라의 생명력을 빼앗아 쌓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이대로 모든 걸 빼앗길 수 없어!’

동족을 먹으면서 오직 로드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택한 길이었다. 격이 낮아진다는 건, 그리고 귀족이 할 짓이 못 된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거대한 힘은 그 모든 걸 상쇄하고도 남았다. 격은 양으로 찍어누르면 되는 거였고, 자신이 로드가 된다면 아무도 그를 탓하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그렇게 택한 생명력들이 모두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모은 생명력들이 빠져나가고 이제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아무도 못 가져가!”

푸욱!

지지직, 지직, 쨍그랑!

이슬라가 자신의 생명의 근원을 손으로 찔러 넣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깨지는 그의 생명의 근원.

콰앙!

근원이 깨짐과 동시에 진하의 몸이 날아가 기둥에 박혔다.

“으…….”

“하, 하하! 지켰다! 지켰다고!”

진하가 날아갔던 그 장소에는 어느새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슬라가 행복감에 소리쳤다. 비록 많은 기운을 잃기는 했지만, 일부나마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비어 버린 생명력이야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차차 다시 채우면 되는 거였다.

“이 쓰레기 같은 놈들!”

이슬라가 기둥에 틀어박혀 있는 진하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자신의 생명력 대부분을 뺏어가고 생명 하나까지 뺏어간 놈이었다. 절대 곱게 죽일 생각은 없었다.

“쿨럭, 쿨럭. 흐으…… 쿨럭, 쿨럭!”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진하는 피를 토하며 무언가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 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드가 살짝 남아있는 생명력을 이용해 진하의 폐와 성대를 일시적으로 회복시켰다.

“쿨럭, 쿨럭. 아아, 이제야 말이 나오네.”

입에서 피를 뱉어낸 진하가 이슬라를 보고는 씨익 웃었다. 분명 다시 살아난 이슬라는 아직도 강해 보였다. 굳이 따지자면 SS급 중위?

하지만 상관없었다. SS급 게이트 보스 수준만 아니면 되는 거였다.

“이봐, 이슬라. 잘 가라고.”

굿바이 인사를 하는 진하의 손에는 어느새 구매한 신호기가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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