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진하는 생각했었다. 관리자라는 존재에 의해 이슬라는 변종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존재를 진하는 이길 수 있는가? 답은 YES였다. 다만, 공략대에서 진하 외에는 이길 수 없었다.
이슬라의 첫 번째 목숨을 죽인다고 하여도 SS급 보스로 거듭난 이슬라의 두 번째 목숨은 이기수와 잭 둘이서 잡을 수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레이나 정도?
그렇다면 게이트를 나와 다른 나라 헌터들과 연합하면 죽일 수 있는가? 그것도 YES. 하지만 분명 많은 피해를 입을 게 분명했다. 이미 이슬라조차 손을 쓴 관리자가 이슬라를 12층에만 묶어두리라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결국, 너를 죽이던가 최대한 타격을 입히는 게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이지.”
“네놈, 봤던 얼굴이군.”
“그러게, 구면이네. 잘 지냈냐?”
진하의 쾌활한 대답에 이슬라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뱀파이어의 수치로군.]
뒤이어 들리는 로드의 목소리, 이슬라는 로드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저 로드의 찌꺼기일 뿐인 존재가 뱀파이어의 수치를 논하다니 웃기군.”
[그런 존재에게 겁먹고 동족 포식을 한 너보단 낫지 않을까?]
로드의 비아냥에 이슬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진하를 내리누르는 압력.
“닥쳐라! 나는 다시 태어났다. 어딜 그 천한 입을 놀리느냐?!”
“천한 건 네가 아닐까? 이슬라?”
진하 또한 이슬라에게 비아냥거렸다. 로드와 동기화가 된 지금 진하는 누구보다도 이슬라의 상태가 잘 보였다. 그는 이제 뱀파이어라고도 부르기 힘들 정도의 정체성을 가진 상태였다.
[7대 죄악 중 폭식의 찌꺼기라…… 역시 더럽군.]
“저 잡다한 기운이 폭식이라는가요? 뭔지는 몰라도 확실히 깨끗해 보이진 않네요.”
더럽고 너무나 더러웠다. 눈에 보이는 모든 장소에 이슬라의 기운이 가득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기운이 너무나 탁해서 토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명심해. 용암 한 방울이 물 한 대야보다 위력은 강할지 몰라도 그 용암을 식히는 건 그 약한 물 한 대야니까.]
“알고 있어요.”
이쪽이 아무리 맑고 격이 높은 기운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쪽 역시 잔재에 불과했다. 자칫 방심했다간 수많은 기운에 압사될 가능성도 있었다.
[어이, 애새끼야.]
로드가 이슬라를 불렀다. 시안이나 비앙카를 칭할 때와는 극히 다른 말투, 로드는 진하를 노려보는 이슬라를 보며 한 마디 했다.
[대공들 중에 가장 강한 것은 네가 됐지만, 격은 혼혈인 담피르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구나.]
“이이이!”
로드의 도발에 제대로 걸린 이슬라가 그대로 진하를 향해 달려들었다. 진하는 눈 깜짝할 새에 자신의 코앞에 도달한 이슬라를 멍하니 바라봤다.
[정신 차려!]
로드의 외침에 다급히 팔을 교차시키는 진하. 그런 그의 팔 위로 이슬라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콰앙!
“크윽!”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진하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스킬을 모두 쓰고 로드와 동기화된 상태임에도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놓쳤다.
[뭐 해? 가르쳐 준 거 잊었어!]
―블러드 펌핑
로드의 다그침에 진하가 빠르게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이슬라의 주먹.
치이익―
―블러드 니들
가까스로 고개를 틀어 주먹을 피한 진하가 이슬라의 심장을 향해 피로 이루어진 송곳을 쏘아냈다.
쿠욱.
“우습군.”
방어도 하지 않은 채 송곳을 맞은 이슬라가 그대로 진하의 팔을 붙잡아 내던졌다. 빠르게 날아가 기둥에 박힌 진하는 정신없는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정신 안 차려! 날카롭게 벼리라고! 거대한 기운을 뚫으려면 격을 날카롭게 벼려야 해. 1시간 내내 맞다가 끝낼 거야?!]
“나도 알아요!”
뒤이어 귓가에 울리는 로드의 질책에 진하가 이를 악물었다. 그도 알고는 있었다. 이미 공략대를 기다리면서 이론으로 듣고 실습까지 수십 번을 했었는데 모를 리 없었다.
‘젠장! 너무 빨라!’
하지만 예상보다 이슬라가 너무 빨랐다. 아니 정확히는 이슬라의 속도에 진하가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격이 높아지고 기운이 커진 것까지는 좋았으나 실습 때와 다르게 실전에서는 여간 다루기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아까의 자신감은 어디 갔지?”
이슬라가 먼지로 뒤덮인 진하를 보며 비웃었다. 자신감 넘쳤던 초반 모습과는 달리 진하의 방어구는 모조리 부서지고 얼굴에선 피가 한줄기 흐르고 있었다.
“닥쳐, 이 잡종아!”
진하의 외침에 얼굴을 굳히는 이슬라. 진하는 그런 그에게 가볍게 엿을 선물해 주었다.
―블러드 커터
곧바로 진하의 중지를 향해 날아오는 블러드 커터, 진하는 빠르게 몸을 뒤로 숙이며 칼날을 피해 냈다.
“죽어라!”
그러자 곧바로 진하의 위에 나타나 주먹을 내리꽂는 이슬라, 진하는 그런 이슬라를 보며 씨익 웃어 주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지.’
당장 무의식적으로 격을 날카롭게 벼리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블러드 인챈트
핑글!
스킬 사용과 동시에 누운 상태로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며 허리춤에 있던 검을 발도하는 진하.
샤악!
장난감 검이 이슬라의 거대한 기운을 가르며 주먹에 깊은 상처를 내었다.
“크윽!”
날카로운 기운에 다급히 물러난 이슬라는 몸을 바로잡은 진하를 노려보았다.
“후, 자, 2차전 가자고.”
이번에는 장난감 검을 움켜쥔 진하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콰앙! 쾅! 쾅!
이슬라는 계속해서 진하의 공격을 피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분명 자신을 공격하는 진하의 공격은 둔탁하기 그지없었다.
진하가 사용하는 블러드 니들이나 주먹은 그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
‘저 이상한 검!’
날이 하나도 서 있지 않은 검으로 벨 때는 다른 공격들과 다르게 검이 그의 피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부서야 돼.’
하지만 그런 이슬라의 생각과는 달리 장난감 검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전혀 부서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검 면을 내리치거나, 발을 휘둘러도 꿈쩍하나 하지 않았다.
결국, 한참이나 검을 향해 공격하다 포기한 이슬라는 하는 수 없이 공격을 감수하며 진하를 노리기 시작했다.
반대로 계속해서 공격하던 진하 역시 상황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얕아.’
장난감 검과 블러드 인챈트 덕에 이슬라의 피부는 베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피부 안쪽 근육은 자르기 쉽지 않았으며 뼈는 아예 벨 엄두도 안 났다.
거기다가 가장 큰 문제는 재생속도. 끊임없이 재생하고 회복하는 이슬라와 다르게 아무리 로드와 동기화를 하고 스킬을 사용함에도 본질이 인간인 진하는 재생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격을 벼리라니까!]
‘나도 알아요!’
진하가 공격을 쳐내며 로드에 잔소리에 소리쳤다. 그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다만 격을 벼리는 속도보다 이슬라가 진하를 공격하는 속도가 더 빠르기에 제대로 격을 벼릴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놈도 맹탕인데 말이야.’
워낙 강한 힘을 가지고 태어난 데다가 갑자기 거대한 힘을 얻어서일까? 거대한 힘에 익숙하지 않은 진하처럼 이슬라 역시 힘을 커다랗게 휘두를 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10분이 지났어. 이대로라면 어떻게 될지 알지?]
‘알아. 아는데 잘 안되는 걸 어떡하라고요!’
[하아, 딱 1분이다.]
그 순간 그 말과 함께 진하의 의식이 뒤로 밀려났다.
“호오? 드디어 나온 건가? 로드.”
진하의 기세가 바뀐 것을 느낀 이슬라가 공격을 멈춘 채 로드를 바라봤다. 하지만 로드는 그런 이슬라를 무시한 채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지금부터 1분, 완전한 동기화 상태니까 실습 때랑 달리 잘 느껴질 거야. 1분 안에 익혀, 아니면 답 없다.”
[어?]
그와 동시에 사라지는 로드의 신형, 갑작스럽게 사라진 로드의 신형에 이슬라가 다급히 몸을 틀었다.
촤악!
하지만 한발 먼저 이슬라의 팔을 벤 로드는 곧바로 이슬라의 안면에 발을 꽂아 넣었다. 순식간에 기둥을 부수며 멀어지는 이슬라, 로드는 그런 이슬라를 쫓으며 말했다.
“격을 벼리는 것은 정신을 집중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촤좌작!
가볍게 휘두른 검에 이슬라의 온몸이 난도질당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로드는 곧바로 이슬라의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블러드 니들
푸욱!
진하가 만든 것보다 절반 이상 작은 니들, 하지만 매우 약해 보이는 니들은 순식간에 이슬라의 심장을 뚫고 지나갔다.
“격이란 그 존재 자체! 죽이고자 날카롭게 의지를 품으면 자동으로 알아서 벼려지게 되어있어!”
[하지만…….]
“넌 너무 생각이 많아! 죽인다, 없앤다. 오직 하나만 생각해! 이건 대련이 아냐! 다음 공격과 회피를 생각하지 말고 한 번에 죽이겠다는 생각만 해!”
어느새 이슬라의 몸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린 로드가 물러나는 이슬라를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렇게 격을 잘 벼리게 되면 이런 것도 가능하게 된다.”
―죽어라
촤롸라락!
순식간에 육 등분 되는 이슬라, 그와 동시에 진하의 의식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게 한계야. 이 이상은 못 도와줘. 남은 시간은 20분이다.]
1분이라고 말했지만 고작 20초였다. 고작 20초 만에 이슬라를 조각내 버린 로드를 보며 진하가 감탄했다.
“그냥 로드가 싸워도 됐겠는데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겨우 20초에 30분이라는 시간이 날아갔어. 처음부터 내가 네 몸을 전력으로 썼다 하더라도 저놈 못 잡아.]
로드의 말대로 조각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라는 자신의 몸을 빠르게 복구하기 시작했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아예 공격이 안 먹힌 것은 아닌지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기운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크윽…… 찌꺼기라도 역시 로드는 로드라 이 말인가?”
이슬라가 비틀거리며 다시 주도권을 찾은 진하를 노려보았다. 만약 이런 공격이 1분 이상 이어졌다면 분명 그는 죽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다시 되돌아갔어.’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로드 사념에게는 꽤나 큰 제약이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했다. 아마도 전투 중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한편, 몸을 회복하는 이슬라를 보며 진하가 이를 악물었다. 평소였다면 바로 공격할 수 있는 최적의 빈틈이었지만 공격할 수 없었다.
‘안 먹혀.’
아니, 먹힌다고 하더라도 겨우 한 번 가르는 게 끝일 것이다. 그다음에 바로 반격이 들어올 테니까.
[멍청아! 넌 생각이 너무 많댔지!]
계속해서 다음 상황과 다음 공격을 대비하면 싸우는 진하를 보며 로드는 답답해했다. 분명 아까도 말해 줬건만 똑같은 실수를 진하는 반복하고 있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요?”
진하도 알고 있었다. 빈틈이 보이자마자 바로 공격했었어야 했다는걸. 하지만 그걸 인식했을 땐 이미 공격 기회를 놓친 후였다. 그렇다고 뒤늦게 공격했다간 공격도 전에 바로 반격이 들어올 게 분명했다.
‘젠장. 이놈의 습관.’
진하는 언제나 약자의 위치였다. 그렇기에 그의 전투는 한 번에 베어 넘기기보단 도망가고 타격하고의 연속이었다. 완벽한 빈틈이 있거나 압도적인 게 아닌 이상 항상 고수해 온 습관이 쉽게 고쳐질 리 없었다.
“후, 아무런 생각 없는 게 뭐 쉽냐고.”
그런 게 쉬웠으면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 순간 진하의 머릿속에 한가지 물건이 스치고 지나갔다. 진하는 생각나자마자 빠르게 시스템 창을 향해 손은 넣으며 외쳤다.
“구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