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97화 (97/202)

#097

“후…… 이제야 다 왔네.”

12층으로 내려가는 통로를 보며 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빠르다면 빠르고 길다면 꽤 긴 시간이었다.

분명 겪은 시간도 짧고 많은 일을 겪지도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설마 혼자서 내려가라고 말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 줄이야.”

이제는 완전한 혼란에서 벗어난 진하가 혀를 찼다. 그놈의 자격이란 게 뭔지는 모르지만 하나 확실한 건 지금까지 안개가 낀 듯 가로막혔던 생각들이 깨끗하게 이어지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그나저나 왜 말 안 했어요?”

진하가 자신 안에 있는 로드에게 물었다. 내려오면서 얘기를 간간이 하면서 느낀 건데 로드도 사서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는 것 같았다.

로드가 만약 자신을 도와줬다면 처음 공략에 혼자 내려가야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반대했던 걸 좀 더 쉽게 설득했을지도 몰랐다.

[당연한 거 아닌가? 고작 첫 단추도 못 끼울 거면 애초에 시도할 자격도 없었어.]

“뭐, 틀린 말은 아닌 데…….”

로드의 말대로 그 정도 각오도 없었다면 지금쯤 멘붕이 왔을지도 몰랐을 것 같다. 지금도 세상에 대해서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지금껏 절반쯤 꼭두각시처럼 행동했다는 거에 절망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와 관련된 말은 그만해라.]

“왜요?”

[아무리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 해도 그와 관련된 말은 안 하는 게 좋아. 어쩌면 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관리자가?”

[…….]

진하의 물음에 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진하는 확답을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관리자.’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이 게이트를 만든 무언가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결국, 적이라는 소리였다.

‘답도 없군.’

그저 친구들을 살리기 위해 행동했는데 그 마지막 적이 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니 아득해졌다.

그래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 있다면 사서나 할머니와 같은 존재는 적어도 자신의 편이라는 정도?

‘뭔가 체스 말이 된 기분이지만 어쩔 수 없지.’

다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체스 말이라도 하는 게 당연한 거였다.

[잡생각 그만하고, 이제 내려가라. 그리고 내려가는 순간부터 이슬라의 영역이라고 생각해라.]

“알고 있어요.”

진하가 로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로드처럼 뱀파이어를 감지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통로 건너에서부터 느껴지는 불길함만 해도 그 지금까지의 층과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벅, 저벅.

진하는 스킬을 모두 사용한 채 아주 조심스럽게 통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두운 만큼 길을 걷는 진하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으며 예민하기 그지없었다.

[정지해라.]

우뚝.

한참을 걷던 진하는 로드의 말에 정지했다. 그리고는 아주 조심스레 건너편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크아악! 콰직! 콰직!

괴성 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물어뜯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하는 그 소리에 불쾌감을 느끼며 아주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앞으로 가면 당연하게도 들키겠죠?’

[당연하지. 조금 이따가 가야 될 듯하다.]

로드의 말에 진하가 잠시 그 자리에서 대기했다. 그리고 잠시 뒤, 완전히 기척이 사라진 것을 느낀 진하는 아주 조심스럽게 괴성이 들렸던 자리로 다가갔다.

“재라…….”

괴성이 들렸던 장소에는 뱀파이어의 사체였던 걸로 보이는 재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그 모습에 진하는 의아함을 느꼈다.

‘뱀파이어를 잡아먹을 만한 존재가 있던가?’

12층이면 주로 S급 몬스터가 나타나는 구간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뱀파이어를 잡아먹는 S급이 있다고 해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다만 문제가 되는 점은 12층은 이슬라의 영역이라는 점, 몬스터는 당연하게도 뱀파이어가 대다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가 되어 버리는 뱀파이어를 먹어서 이득을 보는 몬스터는 진하의 머릿속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뱀파이어다.]

로드가 짧게 대답했다. 진하는 로드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동족 포식이라는 소리였다.

‘뱀파이어가 뱀파이어를 먹어 치웠다고요? 뱀파이어도 동족 포식을 하면 강해지나요?’

[아니, 동족 포식을 한다고 더 강해지거나 그러진 않는다.]

‘그럼 어째서 먹은 거죠?’

[온전한 뱀파이어가 아니니까.]

로드의 말투에서는 꽤나 큰 불쾌함이 느껴졌다. 하긴 뱀파이어라는 종족의 왕에게 동족 포식을 하는 혼혈은 상당히 기분 나쁠 만했다.

[기분 나쁘군. 뱀파이어랑 그딴 놈이랑 뒤섞다니.]

‘뭔 소리예요?’

[그런 게 있다. 아무튼, 이 뱀파이어들은 지금까지 네가 본 뱀파이어들과 다르게 동족 포식으로 강해진다.]

‘그럼 그렇게 하는 이유는요?’

[당연하지. 힘을 한곳으로 모으는 거다. 마치 거미줄 바깥에서 안쪽으로 모이듯이. 지금까지 내려왔던 층의 생명력을 갈취한 것과 다르지 않은 행위다.]

로드의 말에 진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은 즉, 이슬라가 자신의 힘을 위해 동족을 죽이고 생명력을 갈취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왜?’

[관리자가 너의 존재를 대충 눈치를 채기 시작했거나, 아님,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다는 소리겠지.]

‘아니, 그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하지 말고요.’

자신의 존재가 왜 관리자에게 문제가 되는지, 그리고 진행 상황이란 게 뭔지 정도는 알려 주고 설명해 주는 게 정상인데 이 로드라는 작자는 구멍 난 치즈처럼 제멋대로 일부분씩만 설명해서 문제였다.

[아무튼, 더 이상 내려가지 마라. 이후부터는 공략대를 기다렸다가 같이 내려가.]

‘어째서요?’

[메리트가 없다. 오히려 염탐하다가 들킬 거다. 그리고 네가 혼자 내려가야 했던 이유는 이미 달성했잖아.]

로드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미 목적을 달성하긴 했다. 그것도 꽤 편하게, 그렇다 하더라도 아래로 내려가서 수를 줄이거나 염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분명 저 12층은 7층부터 거의 생명력을 축적해 온 존재들일 거다. 무조건 S급 이상일 텐데 잡을 수 있나?]

‘아뇨, 근데 그러면 막는 게 낫지 않나요?’

얼마나 되는 S급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저 생명력이 모두 이슬라에게 간다면 상당히 골치 아플 듯싶었다.

[괜찮아. 어차피 비대하기만 한 힘이다. 내가 싸우면 이겨. 네가 싸우는 것도……. 아마도 이길걸?]

로드의 말에 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믿기는 믿어야겠는데 뭔가 말투를 들어보면 믿기가 조금 그랬다.

* * *

“왔냐? 조금 늦었네.”

“빠르게 왔는데 늦기는 무슨.”

진하는 11층 통로 쪽으로 다가오는 이기수를 보며 반갑게 맞이했다. 역시나 7층부터는 아예 몬스터가 없어서인지 헌터들 모두 꽤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진하에게 다가온 이기수가 물었다. 주어와 목적어가 확실하지 않았지만 물어볼 게 하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진하는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슬라가 힘을 모으고 있어. 몬스터를 잡아먹으면서.”

생명력이고 뭐고 자세히 설명해봐야 필터에 가로막힐 것이기에 이런 식의 간단한 설명 방법이 가장 나았다.

“돌아가자.”

“아니, 지금 잡아야 해.”

굳은 표정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이기수를 보며 진하가 즉답했다. 지금도 점차 강해지고 있을 텐데 더 이상 기다렸다간 S급 보스가 아니라 SS급 몬스터가 될지도 몰랐다.

“계획은 똑같아 내가 먼저 돌입해서 싸운다. 신호를 주면 돌입, 신호가 없으면 후퇴.”

“이길 순 있어?”

“물론이지.”

“남은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을 텐데?”

“아니, 굳이 페널티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다.”

확실히 이기수의 공략대 역시 7~11층까지 몬스터의 공백으로 인해 빠르게 내려왔고 그가 지적하는 말 또한 맞았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패널티를 이용해 후퇴할 필요성이 사라졌다.

“아마 죄다 성안에 모여 있을 테니까. 내려가는 것도 금방일 거야.”

꽤나 빠르게 포식이 진행되고 있는 건지 공략대를 기다린 며칠 동안 어느새 뱀파이어들은 성안에만 보일 정도로 꽤나 숫자가 적어졌다.

‘숫자가 줄어든 건 좋은데 문제는 더 이상 포식을 안 하는 것 같단 말이지.’

성안에 남아있는 뱀파이어의 숫자는 대략 수백, 모두 S급 상위 이상의 존재들이었다. 진하와 이기수만 성안으로 들어간다고 쳐도 나머지 수백을 잭과 팀버, 다른 A급들이 감당하기엔 부족했다.

‘무엇보다 그럼 취지에 안 맞아.’

여기에 있는 A급들은 회귀 전 모두 이후 2차 게이트 폭주에서 꽤나 활약했던 헌터들이었다. 경험을 쌓게 하고 등급을 올리기 위해 데려왔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식이면 안 됐다.

‘하지만 가능하죠?’

[기세뿐이라면.]

그 말과 함께 진하의 몸속에서 느껴지는 조그마한 이물감, 그와 동시에 진하의 눈이 붉어졌다.

“너…….”

“아직은 아냐.”

진하가 이기수의 말을 정정해 줬다. 아직은 로드의 힘을 빌린 상태가 아니었다. 그저 아주 조금 기세만 빌린 것뿐이었다.

화악!

그 순간 12층으로 이어지는 통로로부터 강한 적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입질 좋네.’

진하는 강렬한 적의를 느끼며 히죽였다. 역시 이슬라라면 로드의 기운을 알아채리라 예상했다.

‘아마 지금부터 미친 듯이 동족 포식을 하겠지.’

로드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선택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 * *

“후, 역시나 줄었네.”

천천히 산보하는 느낌으로 이슬라의 성 앞에 도달한 진하가 진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예상대로 성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이슬라를 제외하고 총 9명, 엄청나게 줄어있었다.

‘저놈들은 남긴 게 아니라 못 먹은 걸 테고.’

나머지 9명의 기운도 최상위 S급인 것 같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딱 나머지 헌터들에게는 적절한 시련일 테니까.

“잭, 팀버 이기수랑 헌터들을 부탁해요.”

진하의 말에 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하는 마주 미소 지어 주고는 이기수에게 말했다.

“기수야.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다. 앞으로는 네 목숨을 1순위로 생각해.”

“갑자기 뭔 개소리야. 1시간 뒤에 볼 놈이.”

“그런 게 있어. 그럼 나 먼저 출발한다.”

진하는 가볍게 이기수의 팔을 툭 치고 성안을 향해 걸어갔다.

‘동기화 시작하죠.’

[작별 인사를 이렇게 해도 되겠나?]

‘뭐, 딱히 신파를 찍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요.’

[내가 누차 말했지만, 그냥 돌아가지 그랬어. 나중에 왔어도 됐지 않나.]

‘아뇨, 그럼 늦어요.’

공략대를 기다리면서 진하는 곰곰이 생각했었다. 사서는 왜 자신에게 이런 선물을 줬을까? 왜 할머니는 자신을 선택했을까? 그에 대한 진하의 결론은 그냥 우연이었다.

운이 좋아 회귀하고, 운이 좋아 이 세상에 대한 비밀 일부와 인위적으로 막혀 있던 생각에 대한 잠금을 풀 수 있었다. 정말 좋고, 매우 주인공 같은 일이었다.

‘근데 나는 여기가 끝이야.’

그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저 일반 헌터일 뿐, 더 이상 미래를 이끌어 갈 능력도 아티팩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이제 진하에게 남은 거라곤 로드의 잔재와 자격이라 불리는 것 하나뿐.

그렇다면 진하가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이대로라면 어떤 식으로든 회귀 전과 같은 미래가 되려는 것을 막고 다른 미래를 만드는 것.

‘로드, 만약 이번 것도 별 피해 없이 해결하면 그 관리자라는 존재가 꽤 많이 타격받겠죠?’

[타격을 좀 받기는 할 거다. 이번 사태는 억지로 만든 거니까.]

‘그거면 됐어요.’

방금 전 로드를 통해 자격의 씨앗을 이기수에게 넘겼다. 이기수라면 분명 진하처럼 자격이라는 걸 언젠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서에게 고맙군.’

만약 그가 자신이 맘에 들지 않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선택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하라는 인물이 애매하다는 걸 알려줬기에 다른 사람에게 짐을 넘기는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진짜 이런 식으로 목숨을 던져도 괜찮겠나?]

로드의 물음에 진하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예전부터 버린 목숨이었어요.’

친구들을 구하고 미래를 바꾸려는 순간부터 이미 버린 목숨이었다. 그러니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한 상황.

진하는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뱀파이어들을 지나 천천히 성문에 손을 뻗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드러나는 공동, 진하는 그곳에 있는 존재 SS급 게이트 보스 이슬라를 보며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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