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96화 (96/202)

#096

[괜찮나?]

“아니,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소리예요? 괜찮다니까? 왜 자꾸 물어보는 거예요?”

[처음이니까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몰라 걱정하는 거 아닌가? 어쩜 자네는 걱정을 해 줘도 그리 말하는가?]

“하아……. 저기요. 제 고통의 원인이 당신인 걸 생각하면 당연한 거 아닐까요?”

진하가 모래 위로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이놈의 사막은 지나도 지나도 끝이 안 보였다.

“내가 이래서 10층이 싫단 말이야.”

온통 끝없는 모래로 이루어진 사막을 보며 진하가 한탄했다. 회귀 전에도 게이트 폭주로 완전히 사막화되어 버린 10층을 건널 때 짜증 났었는데 지금은 그때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와…… 진짜 저 먹구름 못 없애나?”

진하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막을 보며 이를 갈았다. 뱀파이어들로 인해 생명력이 뺏겨 버린 10층은 뜨거움으로 진하를 괴롭히는 대신, 밤의 사막처럼 끝없이 진하의 체온을 뺏고 있었다.

[그나저나 자네, 맞게 가고 있나? 아무리 봐도 온통 모래인데 말이야.]

“잘 가고 있어요. 이 나침반도 그렇게 말하니까요.”

진하가 나침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북북서를 가리키는 나침반은 확실히 진하가 옳은 방향을 가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이정표라도 나타나면 좋을 텐데.’

일반적인 10층이었다면 선인장이 주기적으로 나타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쉽게 만들어 주었을 텐데 생명력을 모두 뺏겨 버린 이 사막은 선인장은커녕, 생명체 비슷한 것 하나도 발견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뱀파이어조차 7층 마지막에서 발견한 뱀파이어를 제외하고는 마주친 적도 없었다.

‘이렇게만 보면 도저히 폭주한 게이트라는 생각이 안 든단 말이지.’

너무나도 평온하게 내려온 덕에 오히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다는 건 분명 생명력이 모두 이슬라에게 모이고 있단 소리인데, 그 생각을 하면 과연 12층에서 마주할 이슬라를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이봐요, 로드.”

[왜 그러는가?]

“정말 이슬라를 상대하는 데 문제없죠?”

[문제없네. 애매하지만 이미 S급 뱀파이어 한 명의 피를 일부 섭취하지 않았는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적어도 한 번의 목숨 정도는 뺏을 수 있을 걸세.]

“그렇다면 상관없긴 하지만…… 그나저나 이렇게 생명력을 흡수당하면 이런 곳은 나중에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아무것도 살지 못하는 죽음의 땅이 되네.]

“역시…….”

[다만, 이곳은 프로그래밍 된 곳, 결국 똑같이 리셋 되겠지.]

“프로…… 그래밍?”

[그래, 프로그래밍, 뭔가 이상한 느낌이 오는가?]

“흠, 어감이 이상하네요.”

[쳇…….]

진하의 대답에 로드가 아깝다는 듯 혀를 찼다. 진하는 그런 로드의 태도에 의아해하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거죠? 그 부분은 아깝네요. 차라리 안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죽은 공간이면 추후에 몬스터들도 살 수 없을 거 아니에요.”

[뭐, 그건 그렇지만. 어차피 그런다고 다른 층에 몬스터가 없는 게 아니지 않나?]

“그래도 줄어드니까요. 그거라도 돼야 그나마 생존 확률이 올라가죠. 2차 게이트 폭주도 있고…….”

[그런 사람이 이런 사지에 혼자 내려왔나? 그것도 목숨을 걸고, 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리고 누구나 했을 만한 그런 행동이었고요.”

[당연하긴 개뿔, 세상에 어떤 인간이 나와 관계도 없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살리겠다고 자신의 목숨을 거나? 무엇보다 자네 추후에 겪게 될 대가는 잊지 않았지?]

로드의 말에 진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가, 당연히 알고 있었다. 7층에서 겪었던 고통이 애교일 정도의 대가를 그가 잊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안 그래도 심란한데 왜 그리 심통이십니까.”

[이해가 안 돼서 그런다네. 차라리 자네가 다른 영웅같이 선함이 가득하거나 사명감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런 것도 없는데 왜 목숨을 거는 건지 이해가 안 되네.]

“맞는 말이긴 한데. 그 수많은 사람들이 저보다 나으니까 하는 거죠.”

고작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앞으로 얼마나 강해질지 모르는 헌터들이 최소 수천 명이었다. 그 헌터들과 자신 한 명과의 교환, 아무리 봐도 수지맞는 장사였다.

“거기다 죽는 것도 확정 아니잖아요. 누가 들으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네.”

[내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 다만? 그나저나 자네, 일행들과 만나기까지 아직 여유 시간 남았지?]

“네. 꽤 여유 있죠?”

여유가 있다 못해 넘쳤다. 초반에 날아가면서 줄인 시간도 있었고, 예상과 달리 7층 이후부터 아무런 몬스터도 없어 단축한 시간도 꽤 있었다.

자신을 뒤따라오는 공략대 또한 빠르게 내려온다고 계산해도 충분히 시간은 많이 남았다.

[그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겠나?]

“부탁?”

[내가 알려 주는 곳으로 좀 갔으면 하네.]

“알려 주는 곳? 여기 처음 아니에요?”

[맞네, 근데 여기 내려오고 나서부터 계속 느껴지는 게 있거든, 나도 긴가민가했었는데 아무래도 맞는 거 같네.]

“그게 뭔데요?”

[피, 그리고 더러운 관리자의 흔적.]

로드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피와 더러운 관리자의 흔적이라…….

“뭐, 오래 걸리거나 위험한 거만 아니면 상관없긴 한데…….”

[그런 거 아니라네,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고 자네에게 좋으면 좋았지, 손해가 되지는 않을 걸세.]

“흠…… 일단 가 보기는 하죠.”

꽤 오랜 시간 같은 몸속에서 지내기도 했고, 게이트를 내려오며 얘기를 나눈 결과 지금까지 그에게 해를 끼칠만한 존재는 아니었기에 잠깐 정도는 나쁘지 않을 듯했다.

[일단 지금 장소에서 서쪽.]

진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로드가 빠르게 방향을 제시했다. 진하는 곧바로 방향을 틀어 로드가 제시해 준 방향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더러운 관리자라…… 사이가 안 좋나?’

문득 로드가 했던 말에 진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말만 들어보면 관리자와 사이가 좋지 않은 듯했는데 또 사서를 만났을 때는 가만히 있었다.

‘할머니와 사서, 로드가 한 편인 건가?’

지금 간단하게 생각하면 그런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사서는 친 할머니 성향, 로드는 중립이라고 보는 게 더 가까울지도 몰랐다.

‘확실한 건, 서로 어느 정도 대립하고 있는 것 같다는 건데…….’

그렇다면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 어째서 대립하는 걸까? 완전히 대립한다고 보기에는 서로 건들지 않지만, 또 그렇다고 아예 안 건드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뭔가 제약이 있나?’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사서도 함부로 나서거나 그러지 못하는 걸 테고.

진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깊은 사색에 잠기기 시작했다. 과거였다면 대충 짚고 넘어갔을 텐데 게이트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계속해서 이런 생각이 불쑥불쑥 떠오르고 있었다.

[여기, 스탑, 여기야.]

한참 사색하면서 걷던 진하는 로드의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사방이 사막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여기가 목적지 맞네.]

확신이 담긴 로드의 말에 진하는 다시 한번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딱히 뭔가 느껴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아무런 생명체도 살지 않는 사막이었으며, 특이한 건축물이나 자연물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잠시만 나에게 몸을 빌려주게.]

“네?”

[내 부탁함세. 잠깐이면 되네.]

약간은 간절해 보이는 로드의 말에 진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의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어차피 잠깐이라면 부작용도 없었고, 진하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주도권을 다시 찾아올 수 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주도권을 얻으니 더 확실하게 느껴지는구먼. 여기가 확실해.”

[그래서 그 피랑 더러운 관리자 뭐시기가 뭔데 그래요?]

진하의 질문에 로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피는 뱀파이어의 원본이 잠든 걸 뜻하네.”

[원본?]

진하의 물음에 로드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단검으로 가볍게 손바닥에 상처를 내었다.

주르륵.

치이이익―

로드의 피가 땅바닥으로 쏟아지기 시작하자 모래를 녹이며 파고드는 핏물.

“자네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나?”

[뭐 가요?]

“게이트 폭주라는 거에 대해.”

[많이 이상하죠.]

“그럼 그 보스가 뱀파이어인 것엔?”

[그게 왜요? 이상해야 하나요?]

진하의 물음에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분은 확실하게 이상하게 생각해야 하는 거였다.

“자네 세계에서 몬스터가 나오는 3개의 공간 중 무려 2곳의 보스를 뱀파이어가 차지하고 있네. 자네 생각에는 뱀파이어가 모든 몬스터들을 제칠 만큼 대단한 몬스터인가?”

[어…… 그건 아니죠?]

게이트 2차 폭주를 생각해 보면 그런 건 아니었다. 당장 12층 아래로만 내려가면 종류는 적긴 하지만 뱀파이어보다 대단한 몬스터는 넘치고 넘쳤다.

“그럼에도 뱀파이어가 자네들 세상에서 보스라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피 때문이라네.”

[피?]

“그래, 상위종일수록 그 몬스터를 생산하는 건 힘드네. 그 몬스터의 원본에 강한 힘이 서려 있거든.”

[그런데요?]

“그런데 보통 그런 원본의 피는 구하기 힘드네. 왜냐하면, 원본이 피를 흘릴 일이 거의 없거든.”

[잠깐만요. 그럼…….]

“맞네. 이곳에 있는 피는 내 본체의 피네. 뱀파이어의 특성상 피를 뿌리는 일이 많았던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퍼진 피 중 하나네.”

어느새 안쪽이 안 보일 정도로 깊이 구멍이 나 버린 곳을 바라보며 로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돌아와라.”

퐁당!

아주 작은 소리였다. 호수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 피 한 방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회수하는구먼.”

로드는 자신의 몸으로 흡수되는 피를 느끼며 쓰게 웃었다. 지난날의 과오 중 하나를 드디어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잠깐만요. 그럼 당신의 피로 인해 뱀파이어들이 쉽게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아니, 그 전에 생산이라뇨? 아니, 잠깐만, 나 뭐지?]

진하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생산’, ‘프로그래밍’. 지금껏 그가 그냥 넘어갔던 단어들이 떠올랐다.

도대체 왜 그것들을 그냥 넘어갔는지 왜 의심하지 않은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내가 자네한테 말하지 않았나. 자네한테도 좋을 거라고.”

[설마 좋다라는 건…….]

“축하하네. 자네는 드디어 자격을 얻게 되었네.”

[자격? 아니, 잠깐만 제대로 좀 설명해 줘 봐요!]

진하의 물음에 로드가 고개를 저었다. 설명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이곳은 관리자의 영역, 괜한 말을 길게 해 봐야 좋을 건 없었다.

[아니, 그런 고개…….]

“짓으로 넘어가지 말고!”

갑작스럽게 주도권이 넘어온 진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멍하니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아, 이 피 덕에 동기화가 꽤 올라가서 굳이 피를 안 마셔도 될 것 같네. 그리고 이번에 한해서는 부작용도 없을 거야.]

“아니,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요!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기고 들어가는 게 어딨어요?”

지금 안 그래도 갑작스럽게 깨달은 문제들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것투성이인데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는다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진하의 모습에 로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딱 3가지만 간단히 알려 주겠네.]

“말해 봐요.”

[첫째, 뭐가 바뀌든 자네의 목표는 안 바뀌지 않았는가? 일단 그냥 그대로 행동하게. 둘째, 지금 여기서 내가 설명해 줄 수 있는 건 거의 없네. 좀만 기다리게. 셋째, 솔직히 자네가 자격을 얻은 건 나랑 주변 사람들 덕이니까. 감사해하게.]

“네?”

진하는 얼척 없는 표정을 지었다. 첫째와 둘째는 그렇다 치고 셋째는 또 뭔 말이란 말인가?

[지금 할 일이나 집중하라는 말일세. 이만 끝! 난 자겠네.]

그 말과 동시에 로드의 사념이 진하의 정신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진하는 그런 뻔뻔한 로드의 행동을 보며 크게 소리쳤다.

“야, 이 나쁜 영감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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