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잭, 미리 설정한 경로는 알지?”
“알고 있어.”
달리면서 고개를 끄덕인 잭은 곧바로 계획해 둔 경로에 따라 스킬 범위를 설정했다. 싸우고 있는 헌터들을 피해 잭의 눈에만 보이는 일직선으로 그어진 선.
―샤워.
“크워?”
스킬의 사용되자마자 거센 소나기가 몬스터들 위로 쏟아졌다. 평소였다면 여기에 빙결 능력까지 사용했을 잭이었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파지지직!
잭이 만들어 놓은 구름을 향해 이기수의 전격이 쏘아졌다. 구름에 닿은 전격은 순식간에 퍼지고 증폭되었고 그걸 통제하던 이기수는 구름 전체에 전격이 퍼진 걸 느끼자마자 그러쥔 주먹을 땅을 향해 내리꽂았다.
콰콰콰콰!
파지지직!
굉음과 함께 일순간 새하얗게 변하는 시야. 잠시 후 회복된 시야에 들어오는 건 게이트 포탈까지 깔끔하게 비워진 길이었다.
“속도 높입니다. 잭!”
이기수의 명령에 따라 잭이 그어진 벽을 따라 얼음벽을 세웠다. 비록 강도가 엄청나게 강하지 않아 일시적이긴 했지만, 잠깐의 시간은 충분히 벌어 줄 만한 강도였다.
“게이트에 들어서면 바로 몬스터들이 있을 겁니다. 속성계열 헌터들은 공격 준비해 주세요.”
“네!”
이기수의 명령에 따라 달리던 마법사 및 속성 능력자들은 각자 능력을 사용할 준비를 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포탈 근처에 도착하였을 때 포탈이 일렁거리더니 몬스터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싸이클롭스 로드.”
“잡고 가야겠지?”
잭의 질문에 이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는 하위 S급, 이대로 그냥 잭의 능력으로 잠시 얼린 채 두고 가면 밖의 피해가 커질 가능성이 높았다.
“쯧,”
―전격 창
“크어…….”
달리면서 이기수가 모아 둔 전격이 빠르게 로드의 머리를 꿰뚫었다. 쓰러지려는 사체는 잭이 빠르게 사체를 동결시켜 넘어지지 않게 고정하였다.
“그 촌스러운 작명 좀 어떻게 하면 안 돼?”
“능력 사용하기 쉽게 쉬운 단어 사용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래도 뭐랄까. 기수가 지은 이름은 뭔가 촌스러워.”
“너나 나나 마찬가지야.”
“쳇, 그나저나 제1 게이트는 왜 이리 진행 속도가 빨라? 유럽 때랑은 다른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직 게이트가 터진 지 며칠이 되지 않았음에도 너무나 빠르게 나오는 몬스터들의 등급이 올라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A급조차 빠르게 나와서 의아하던 참인데 벌써 S급이라니…….
유럽 게이트 때와는 달리 폭주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잭, 우리 조금만 무리하자.”
“무리?”
“내려가면서 보이는 S급은 모조리 잡으면서 내려가야지.”
“그랬다간 자칫 잘못하면 약속시간에 늦을 텐데?”
“그러니까 너랑 내가 무리해야지.”
진하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아무리 늦어도 14일 이전에는 12층으로 내려가는 통로까지 내려가야 했다. 그 이상 늦으면 이번 계획은 애초에 의미가 없었다.
―이번 계획에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인 거 알고 있지?
―알아.
―네가 시간을 맞춰와야 이번 계획을 시작할 수 있는 거야. 아니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헌터들의 피해가 극심해지겠지.
―미안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패널티를 좀 더 잘 조절했을 텐데.
―그게 네 탓이냐. 근데 진짜 혼자 내려가게? 차라리 같이 내려가지?
―그 말은 그만, 이미 그렇게 하기로 정해진 거잖아.
14일,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진하의 페널티가 발동하기 전에 가야지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시간을 지키기 위해 S급 몬스터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밖에 있는 헌터들의 피해가 높아져 이런 작전을 시도하는 의미가 없어지는 거니까.
“하아…… 죽어 나가겠구만.”
잭의 푸념 어린 소리를 뒤로하고 이기수가 제일 먼저 포탈을 넘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쇳덩어리.
―전격 방패.
파지직! 쿠웅!
아슬아슬하게 가로막히는 쇳덩어리, 이기수는 충격에 휘청거리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뒤이어 들어온 잭은 재빠르게 땅을 짚었다.
―아이스 월.
파칭!
순식간에 땅에서부터 솟아난 뾰족한 창이 아이언 골렘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 모습에 이기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부터 소모가 심하잖아.”
이기수의 타박에 잭이 어깨를 으쓱였다. 빙결 능력을 이용해 조형하는 것과 달리 고정된 스킬인 아이스 월을 창처럼 조형하는 게 정신력이 더 많이 소모된다는 건 그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기수처럼 화력을 보조해 줄 전기라는 보조 스킬이 없는 완전한 범위 특화형인 그는 단순히 빙결 능력만을 이용해서는 아이언 골렘을 한 방에 잡을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덕분에 빠르게 공간을 만들었잖아?”
잭이 아이언 골렘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거대한 얼음에 의해 반쯤 기울어진 채 서 있는 아이언 골렘의 사체 덕에 공략대를 향해 다가오는 다른 아이언 골렘들은 빠르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익스플로젼
―윈드커터
―플레임 버스터.
…….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포탈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헌터들이 몬스터들을 향해 공격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완전히 모든 사람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 이기수가 잭을 바라보았다. 잭은 이기수가 뭘 바라는지 아는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샤워
밖에서 때와 마찬가지로 1층 전역을 적시는 소나기, 이기수는 딱딱이로 빠르게 전격을 모으며 외쳤다.
“방어 능력자!”
파지직!
―배어리
―윈드 실드
―어스 월
…….
이기수의 외침과 함께 전격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자 헌터들은 빠르게 벽과 배리어를 펼쳤다.
콰르릉! 쾅! 쾅! 쾅!
그들이 세운 벽 위로 수많은 번개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잭은 쏟아지는 전격을 보며 걱정스레 이기수를 바라보았다.
“기수, 괜찮아?”
“아직은 할 만해.”
“어떤 맘인 줄 알겠는데, 적당히 해.”
잭의 말에 이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들은 잭은 혀를 찼다.
‘소모 속도가 너무 빨라.’
애초에 넓은 범위에 단순히 비만 쏟아붓는 그와는 다르게 이기수는 넓은 범위 안에 전격을 가득 쏟아붓고 있었다.
즉, 소모되는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 자신에게는 정신력 소모를 줄이라고 얘기했으면서 정작 이기수는 그러지 않고 있었다.
‘너무 미련해.’
최대한 자기가 짊어지고 가려는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유럽에서와 다르게 뭔가 더 힘이 강하게 들어간 것 같았다.
출발하기 전부터 그래서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의 조국이기에 그런가 싶었는데 계속 지켜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지킨다는 것보단 뭔가 죄책감? 부채감을 느끼는 것 같은데…….’
잠시 곰곰이 고민하던 잭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떤 것이든 간에 좋지 않은 현상이었다.
“저기…….”
“가자!”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앞으로 달려나가는 이기수, 곧바로 빠르게 이기수를 따라잡은 잭은 그의 표정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무엇을 말한들 통하지 않을 듯했다.
* * *
“총원 152명 모두 들어왔습니다.”
인원을 확인하던 헌터 한 명이 보고를 마쳤다. 온전히 모두가 들어온 것을 확인한 이기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바로 던전을 공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요.”
“왜 그러시죠?”
“이기수 헌터와 잭, 그리고 팀버 헌터는 남아 주세요.”
헌터의 말에 이기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쉬기 위해서는 다 같이 공략해야 할 텐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까.
“이 던전은 A급 헌터들이 공략해 놓을게요. 이기수 헌터는 쉬고 계세요.”
“네?”
“4층 거의 끝까지 내려오면서 대부분은 몬스터는 이기수 헌터가 처리하셨잖아요. 적어도 이 던전은 우리가 처리할게요.”
“그래도 다 같이…….”
“소형 던전입니다. 그것도 B급, A급 헌터 149명이 공략하면 1시간도 안 걸려요.”
“그래, 다른 헌터들에게 맞기고 우리는 쉬자.”
옆에 있던 잭이 헌터를 거들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기수는 승낙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제안한 헌터의 뒤로 돌아간 잭이 입을 벙긋거렸다. 그 모습에 이기수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무리하지 마세요.”
“네!”
이기수의 승낙에 헌터는 재빠르게 대답하고는 헌터들이 모인 곳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잭은 팀버에게 작게 눈짓하고는 이기수를 끌고 외진 곳으로 향했다.
“뭔데 그래?”
잭을 따라가던 이기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팀버와 떨어지면서까지 이야기할 만한 게 뭐가 있을지 예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어볼 게 있어.”
“뭔데?”
“왜 이렇게 구성했어?”
“뭔 소리야?”
“공략대 구성 조금 이상해서. 안 그래도 S급 이상은 3명 밖에 없는데 A급 헌터들 수준이 너무 뒤죽박죽이잖아.”
이기수는 분명 최정예 A급 헌터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수준이 너무 뒤죽박죽이었다.
일부 상위 A급들은 게이트 밖을 지키기 위해 남겼다 하더라도 공략대에 A급 하위 헌터들이 있다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하가 준비한 수라는 건 뭐야? 그리고 뭐가 그리 초조한 거야?”
자세한 작전을 설명하기는 했지만, 진하가 무슨 방법으로 이슬라를 죽일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심지어 11층에서 후퇴할 수도 있다는 말까지 했으니 당연하게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이기수는 4층까지 능력을 풀로 쓰면서 왔다. 같이 싸워봤던 잭이 느끼기에 이렇게 싸운다는 건 백 퍼센트 초조하다는 이야기였다.
“뭐가 문제인데? 말 좀 해봐.”
“문제없어. 그리고 A급 헌터들은 확실하게 최정예야.”
“진짜 숨길 거야? 적어도 같이 싸우는 동료인데 숨기는 건 없는 게 낫지 않아?”
“하아, 진짜 문제없어. 진하가 준비한 수는 말했다시피 아티팩트야. 그리고 나 안 초조해.”
이기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모습에 잭은 인상을 찌푸렸다.
“자꾸 그러면 나도 협조적이기 힘들어 기수. 숨겨야 하는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건 알겠지만 적어도 수뇌부에 해당하는 사람들한테는 제대로 설명해야지.”
“아니, 진짜라니까?”
“제대로 설명해 줘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돌아보니 팀버와 하준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팀버! 사람 안 오게 좀 막아달라니까.”
“막으려고 했지. 근데 무슨 이야기 할지 다 알고 답해 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가는데 어떻게 막냐?”
“당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 내가 말해 주지.”
“뭐? 정말?”
하준수의 말에 잭이 반색했다. 반대로 이기수의 인상은 찌푸려졌다. 하준수는 그런 이기수를 보며 말했다.
“적어도 수뇌부는 알아야지. 그리고 잭의 말대로 신뢰 관계가 중요하다. 우리가 입을 다물면 잭과 같은 사람들의 입장에선 소외된 느낌을 받을 거다.”
“맞아, 맞아! 거참 말 잘하네.”
“하아…… 그럼 하준수 씨가 대신 대답해 주세요.”
이기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이탈했다. 잭은 그런 이기수를 잡으려다 하준수의 만류에 멈춰 섰다.
“지금은 냅두는 게 낫습니다. 오늘 자기가 초조했다는 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이 기수이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비밀이라는 게 뭐죠?”
팀버의 질문에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수의 고민은 모르더라도 나머지 2가지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출발 전에 이야기했던 게 다 이기는 합니다. 12층에서 만나 진하가 보스룸에 먼저 들어간다. 그리고 신호가 없으면 후퇴한다. 그게 다입니다.”
“그럼 그 방법은요?”
“아티팩트, 정확히는 인천 전투 당시 비앙카를 잡을 때 썼던 아티팩트를 사용할 겁니다.”
“혼자 가는 이유는요? 아니, 왜 같이 공략하지 않죠?”
“그 아티팩트를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선 혼자일 필요가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피아를 구분하기 힘들어서 혼자 보스전을 들어가는 거고요.”
하준수의 말에 잭이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하준수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바라보았다.
이내 흔들림 없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딱히 거짓이 없음을 깨달은 잭이 물었다.
“그럼 어찌 됐든 진하의 희생이 바탕이라는 소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