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이거 왜 이러는지 알아요?”
진하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 뱀파이어 로드의 사념에게 이곳에 관해 물었다.
[뭐긴 뭐야. 죽은 땅이지.]
“아니, 내가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하늘을 봐요, 하늘. 딱 봐도 뱀파이어의 소행 같은데 무슨 의도로 하는 건지 아냐고 묻는 거잖아요.”
[하아, 아마도 생명력을 모으는 거 같네.]
“생명력?”
[그래, 뱀파이어의 힘의 원천이 뭐인 줄 아나?]
“피?”
[정확히는 핏속에 존재하는 생명력이라네. 그게 뱀파이어의 힘이자 목숨 그 자체라고 보면 되네.]
“그럼 지금 힘을 모으고 있다는 거죠?”
[그렇네.]
“왜요?”
진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힘을 모은다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을 이유는 없었다. 그가 알기론 이슬라는 오만한 성정을 가진 뱀파이어였다.
보통 힘을 모은다는 건 적을 상대할 준비를 한다든가 힘이 부족할까 봐 불안해서였다.
그런데 이슬라가 그럴 리는 없었다. 그가 본 거라곤 고작해야 갓 A급이 되었던 진하라는 인간이 다였다. 그런 진하가 무서워서 힘을 모을 리도 없고 그에게 강대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그나저나 아무리 생각해도 조잡한 방법이구먼.]
뱀파이어 로드가 죽어 버린 땅을 보며 혀를 찼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확연히 티가 나는 말투였다.
“뭐가 조잡하다는 건데요?”
[이런 식으로 힘을 모으는 건 힘의 격이 낮아져. 그냥 양만 늘리는 거란 말이네.]
“그게 뭔 차이예요?”
[간단하게 얘기하면 거품만 낀 힘이라는 거네. 그래, 인간으로 따지자면 자네는 대야에 담긴 물이랑 용암 한 방울이랑 뭐가 더 아플 것 같은가?]
“그거야 용암 한 방울이죠.”
[말 그대로야. 힘 자체는 커질지 몰라도 그 밀도가 약해지지. 적어도 귀족이라 칭하는 뱀파이어들은 절대 하지 않는 방법이네.]
뱀파이어 로드의 말에 진하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알기론 대공이라고 칭하는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매우 오만하고 고고하다고 생각한다. 즉, 프라이드가 높았다.
그런데 그런 존재들이 이런 방법을 사용한다? 아까 전의 생각과 합쳐 생각하면 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럼 이거 왜 이러는지 알아요?”
[뭐긴 뭐야. 그렇게 ‘프로그래밍’ 됐으니까 하는 거지.]
“프로그래밍?”
[그래, 아무리 고고한 뱀파이어라도 그런 식으로 잡다한 피가 섞인 상태니 아예 무시하기는 힘들겠지.]
“흠…… 그렇군요.”
[…….]
진하의 대답에 로드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 지금 나한테 뭐 질문 없나?]
“아뇨, 딱히 없어요. 대충 이해가 되네요.”
[쯧, 그래. 들을 수 있는 게 어디냐.]
뱀파이어 로드가 혀를 찼다. 그래도 어느 정도 괜찮아진 듯싶었는데 아직 멀은 듯싶었다.
“뭔 소리예요?”
[아무것도 아니네. 그나저나 계속 여기에 서 있기만 할 건가?]
“아뇨, 가야죠. 다만 뭐가 있을지 몰라서요.”
[그냥 가. 아무것도 없어. 뱀파이어가 느껴지면 내가 알려 주겠네.]
뱀파이어 로드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주변을 살피며 걷던 진하가 뱀파이어 로드에게 물었다.
“하나만 물어봅시다.”
[열 개 물어봐도 돼.]
“이슬라가 힘을 모은다고 했는데 그럼 저희가 이길 수 있나요?”
분명 출발하기 전에 뱀파이어 로드에게서 받아 낸 대답은 예스였다. 하지만 이슬라가 이렇게 힘을 모으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질지도 몰랐다.
[반반이네.]
“진다는 소린가요?”
[그건 아니고.]
“정말요?”
[적어도 1시간 안에 죽지는 않아.]
애매한 뱀파이어 로드의 말에 진하가 혀를 찼다. 결국에는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소리였다.
‘이러면 애매한데.’
이슬라의 힘만 거의 빼놓아도 사실 성공적이긴 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이기수가 온전히 이슬라와 한 번만 싸우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정 내이긴 했다.
“저번에 당신과의 동기화라는 거, 올리는 방법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진하가 뱀파이어 로드에게 물었다. 분명 공략대가 출발하기 전 여러 번 계획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이슬라의 힘이 예상외라도 동기화를 높이면 상관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없어.]
“거짓말하지 말고요.”
[꼭 해야겠나?]
“이미 낙장불입인 거 알면서 그런 말 하시는 거예요?”
[난 분명 경고했네. 선택은 자네가 한 거야.]
“알았으니까 알려 줘요.”
[간단하네. 뱀파이어의 피를 마시게.]
뱀파이어 로드의 말에 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로드가 하는 말은 진하보고 뱀파이어가 되라는 말이었다.
“분명 계획 세울 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뱀파이어가 되지 않고 이길 수 있다 하지 않았어요?”
[내가 피를 마시라고 했지 뱀파이어가 되라곤 말하지 않았네. 말 그대로 그냥 마시게. 뱀파이어화가 되는 건 내가 막아 주겠네.]
“그럼 그냥 마시기만 하면 된다? 좋네요.”
[그렇네. 하아, 그런데 내가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도와주는 건데 감사한 마음을 좀 가지고 공손하게 행동할 생각은 없나?]
“사념이라서 죽어 봐야 다시 본체로 돌아간다면서요.”
[본체는 본체고! 그리고 내가 어른인데 어린노무시키가!]
“네, 종이 달라서 안타깝게도 적용이 안 되네요. 그리고 분명 저한테 빚진 거 갚는다는 명목으로 하는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자넨 자네 손으로 동족을 죽이면 얼마나 기분이 묘한 줄 아나?]
진하는 뱀파이어 로드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죄책감이 들 거였으면 애초에 비앙카를 죽이지도 않았을 게 분명했다. 괜한 엄살이었다.
“장난 그만치고, 아무튼 아무 뱀파이어의 피나 마시면 되는 건가요?”
[아니, 여기 기준으로 적어도 A급 상위 뱀파이어 수준은 되어야 하네.]
“최소 얼마나?”
[A급 기준으로 10마리?]
뱀파이어 로드의 말에 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많았다. 안 그래도 몬스터의 피를 먹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데 10마리라니…….
[그러지 말고 S급은 어떤가? S급이면 빠듯하게는 한 명, 넉넉히는 두 마리 정도면 되는데?]
“제가 못 잡아요.”
아무리 하위 S급이라도 진하의 수준으로는 잡기 힘들었다.
[익숙해질 겸 내 힘을 아주 조금만 쓰면 되네. 그리고 어차피 자네에게 선택권은 없어.]
“네?”
[8층이라 했나? 그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통로에 S급 한 마리가 길을 막고 있거든.]
“그걸 왜 이제 말해요?”
[그냥?]
“이런 망할 영감이…….”
진하는 한숨을 내쉬며 8층으로 내려가는 길 쪽을 바라봤다.
* * *
[이 이상 나아가면 저 뱀파이어가 자네의 냄새를 맡을 걸세.]
“당연하게도 망토가 통하지 않겠죠?”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나? 고작 그런 허접한 망토로 S급을 속이려고?]
뱀파이어 로드의 말에 진하는 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그의 말이 맞긴 했지만 애초에 S급이 7층에 존재해서도 안 됐다.
‘10층부터 존재하는 놈들이 왜 여기 있냐고.’
[그만 구시렁거리고 이번 한 번은 내가 보여 줄 테니 잘 기억하게. 자네도 알지? 이슬라라는 아이와 싸울 때는 자네가 몸을 움직여야 하는 거?]
“알았으니까. 얼른 하세요.”
진하가 스킬을 모조리 시전한 후에 뱀파이어 로드에게 통제권을 넘겼다.
“흠, 흠, 역시 젊은 몸이 좋긴 좋구먼.”
통제권을 얻은 뱀파이어 로드가 진하의 몸 이곳저곳을 만지며 말했다. 진하는 이곳저곳을 만지는 뱀파이어 로드의 행동에 소리쳤다.
[빨리, 하려는 거나 해요!]
“거참, 성질 급하기는.”
적당히 혀를 찬 뱀파이어 로드가 장난감 칼을 꺼내 들었다.
“잘 보게. 자네를 위해 딱 맞춰 스킬 형태로 만든 거니까.”
―블러드 펌핑.
로드의 작은 속삭임과 함께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진하의 심장. 그에 따라 빠르게 가속하는 피가 그의 몸을 붉게 물들였다.
“신체 능력이 강화됐다고 힘을 퍼뜨려서는 안 돼. 아주 작은 점으로 모아서 뒤쪽에는 충격파가 없게 해야 하네.”
숨을 크게 들이켠 뱀파이어 로드가 목표인 뱀파이어를 향해 몸을 굽혔다. 그리고 아주 가볍게 발을 굴렀다.
핑― 서걱!
작은 소음과 함께 목이 잘리는 뱀파이어. 로드는 기울어지는 뱀파이어의 목을 붙잡아 그대로 이빨을 박아넣었다.
꿀꺽! 꿀꺽!
빠르게 피를 마신 로드가 시체에서 몸을 떼며 말했다.
“참고로 뱀파이어들은 빠르게 재가 되니까 피를 재빨리 마셔야 되네. 이번 한 번은 내가 그냥 마셔 주는 거야. 아, 이슬라에게 신호 안 가게 막아 놨으니까 걱정 말고.”
[알겠어요. 빨리 몸이나 넘겨주세요. 더 큰일 나기 전에.]
진하의 말에 뱀파이어 로드는 통로에서 꽤나 떨어진 곳까지 걸어간 후 가볍게 칼을 휘둘러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었다.
그 후, 작은 보호막을 만든 후 안으로 들어간 뒤 다시 흙을 덮은 그는 진하에게 말했다.
“결계도 쳐 놨고, 소리 질러도 문제없을 거네.”
그 말과 함께 주도권을 넘기는 뱀파이어 로드. 진하에게 주도권이 넘어감과 동시에 진하의 몸이 이리저리 뒤틀리기 시작했다.
으드득, 꾸득, 으드득
“끄윽…….”
진하가 핏발이 선 눈으로 이를 악물었다. 온몸이 뒤틀리는 고통은 매우 생소해 그로서도 버티기 쉽지 않았다.
까드득!
진하는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참으며 이리저리 몸을 뒹굴었다. 그렇게 1분 후, 가까스로 고통에서 벗어난 진하가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독하네, 독해. 비명 질러도 된다니까.]
“고작 이 정도로 비명 지르면 12층에선 애초에 쓰지도 못할 거에요.”
온몸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며 진하가 말했다. 고작 이 정도 고통이었다. 몸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닌 그저 고통이기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쯧, 미련하기는, 근데 동료들을 그렇게 속여도 괜찮나?]
“어차피 알면 반대했을 텐데요, 뭐.”
* * *
콰앙! 쾅!
밖으로 나가려는 몬스터들과 막아서는 헌터들로 인한 폭발음이 가득한 공간, 그곳을 지켜보던 이기수는 자신의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모든 준비를 마친 헌터들이 저마다 몸을 풀고 있었다.
“헤이, 기수 긴장한 거야?”
그때 옆에 있던 잭이 이기수의 목을 휘어 감으며 말했다. 이기수는 장난스럽게 말을 거는 잭을 보며 쓰게 웃었다.
“고맙다.”
이 계획이 완벽하게 성립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잭과 다른 S급 헌터의 전적인 협력 덕이었다.
사실 그로서는 잭이나 다른 S급 헌터가 반대해 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야 진하가 내세운 계획이 불가능해지니까.
“뭘 그렇게 말하고 그래. 너하고 진하가 독일을 위해 목숨을 건 걸 아는데 우리가 어떻게 거부하겠어.”
‘그래서 고맙고, 또 밉다.’
이기수는 미처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자신의 말을 꾹 눌러 담은 뒤 뒤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준비는 모두 됐습니까?”
“네!”
커다랗게 외치는 헌터들. 이기수는 자신감 있게 외치는 한국 헌터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은 모두 숙지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기수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자세히 설명하기는 했지만 아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을 거고,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 그만 연설하고 갑시다! 어차피 우리나라 사람끼리 뭐가 그리 고맙습니까? 해야 할 일인 거지.”
장난스럽게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에 이기수가 그쪽을 바라봤다. 휘젠이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뭐, 확실히 그만하죠. 그럼 이제 갑시다.”
이기수가 웃으며 게이트를 향해 돌아섰다. 다른 헌터들 역시 달릴 준비를 모두 마쳤다.
“출발합니다.”
그 말과 함께 152명의 헌터들이 모두 게이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