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후우, 왜 그러세요. 결국에 모두 가능성이 높다는 거에는 동감하셨잖아요.”
“미안해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전 진짜 괜찮아요. 그럼 전 이만 갑니다.”
진하가 곧바로 내렸다. 그가 내리자 몇몇 헌터들의 시선이 잠시 쏠리기는 했지만 금방 사라졌다.
“하아, 죽겠네.”
저 멀리 커다랗게 보이는 게이트를 보며 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괜찮다고는 얘기했지만 여기서부터 게이트 12층까지 갈 생각을 하니 막막하기는 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힘들어도 진행해야 했다.
“가자.”
마음을 다잡은 진하가 미리 챙겨 온 망토를 집어 들었다. 곧바로 망토를 뒤집어쓴 진하는 아주 조심스레 최전방 방어선을 지나갔다.
다행히 망토는 제대로 작동하는지 경계를 서고 있는 헌터들의 시선이 진하가 있는 곳을 향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를 알아채지 못했다.
<마법의 망토: 흉터를 가진 마법 소년이 애용하던 망토를 본떠 만들었다. 설정에 충실한 편, 장난을 치거나 숨을 때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습을 가리는 능력에 치중되어 있어 만능은 아닌 듯?>
‘근데 이런 걸 문방구에서 팔던가?’
문방구 구석에 있던 망토를 사용하여 지루하게 게이트를 향해 나아가던 진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생각해 보면 문방구치고는 좀 너무 다양한 물품들이 존재했다.
뭐랄까…… 문방구에 있어선 안 될 물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문방구에 있기에는 이런 것도 존재해? 이런 의문이 생기는 물품들이 많았다.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아티팩트인 것도 말이 안 되지.’
이내 진하는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사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모든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장난감으로 이루어진 아티팩트라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거였고, 할머니라는 존재도 말이 되지 않는 거였다. 그리고 사실 건물 상호명이 문방구일 뿐이지 문방구라도 보기 어려웠다.
‘문방구라 읽고 그냥 아티팩트 상점인 거나 다름없지.’
그렇게 문방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때쯤 마법 망토를 쓴 진하는 잠들어 있는 몬스터들의 코앞까지 다가설 수 있었다.
‘역시 쉽지 않네.’
눈앞에 잠들어 있는 몬스터들을 보며 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각자를 경계하며 잠들어 있는 사이를 뚫고 나갈 생각을 하니 절로 한숨이 내쉬어졌다.
차라리 서로 싸우기라도 하면 그나마 쉬울 텐데 서로 경계할지언정 서로 싸우지 않는 상태로 잠들어 경계 난이도는 오히려 대폭 올랐다.
‘인간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고 해도 뭔가 이상해.’
인간 자체를 서로 죽이지 않을 정도로 싫어하거나 말살의 대상으로 봤다면 사실 밤에도 몬스터는 공격해야 했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그러지 않았고, 게이트 근처에서 서로를 경계하며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제일 이상한 건 유령 종.’
진하는 몬스터들 사이를 조심스레 지나가며 마찬가지로 가만히 둥둥 떠 있는 유령 종을 바라보았다.
스펙터부터 시작해서 벤시까지 모든 유령 종이 마치 잠이라도 든 듯 가만히 있는 상황, 진하는 그게 제일 이상했다.
사실 억지를 부리자면 몬스터까지는 어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령 종은 잠이 없다. 심지어 밤이 가장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시기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누가 조종하는 것처럼.’
진하는 순간 이슬라의 특수 능력인가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건 모든 게이트 폭주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결국 게이트 보스들의 공통된 특징이라는 거지, 이슬라 개인의 특징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크륵, 우뚝.
진하가 천천히 걷던 걸음을 멈췄다. 슬며시 눈알만 돌려 확인해 보니 다행히 잠꼬대였는지 눈이 감긴 채 움직이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진하는 혹시나 싶어 더욱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걸 왜 당연하게 생각했을까?’
진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이 사실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무도 의문을 표한 적이 없었다. 그저 그러려니 했을 뿐.
심지어 회귀 후에도 여전히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했고, 최근이 돼서야 진하만이 조금씩 의심을 싹틔우는 중이었다.
그 밖에 의심하는 사람은 진하를 제외하고는 진하와 연이 닿았던 자들 정도?
‘이것도 신의 배려일까?’
진하의 머릿속에 할머니와 사서라고 칭했던 남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신이라고 생각할만한 존재들, 신인지 악마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다 왔다.’
한참을 나아가던 진하가 게이트 앞에 멈춰 섰다. 다행히 아무런 몬스터에게도 들키지 않으며 게이트 코앞까지 다가온 진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네.’
이제 좀만 더 걸어가면 바로 게이트 안으로 입장이었다. 지금이야 B급까지의 몬스터들만 나와 있지만 저 안에는 A급 이상의 몬스터들이 득실거릴 것이다.
그리고 진하는 그 공간을 잠입해서 12층까지 내려가야 했다.
쿠웅!
그 순간, 작은 진동과 함께 게이트에서 커다란 발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 발은 바로 앞에 있는 이미 부서진 협회의 건물을 뭉개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사이클롭스.’
A급 몬스터의 출현에 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막 들어가는 타이밍에 나와 사이클롭스가 완전히 나오기 전까지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어서 지나가라.’
진하는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사이클롭스가 어서 게이트를 벗어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진하의 생각과는 달리 사이클롭스는 벗어날 기미가 안 보였고, 심지어 졸린 건지 게이트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자마자 건물을 눌러 땅을 평평하게 한 뒤에 바로 그 자리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던 진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게이트 바로 앞을 막다니…….
드르릉!
곧이어 콧소리까지 내며 잠들어 버리는 사이클롭스. 진하는 사이클롭스를 피해 옆으로 지나가기 위해 왼쪽과 오른쪽으로 빙 둘러 돌아 다녀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여기가 제일 낫네.’
다른 곳은 유령 종으로 가득하거나 너무 아슬하게 부서진 건물이 가로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 곳은 간격이 너무 빽빽했고, 한 곳은 무너진 건물 사이로 어떤 몬스터가 숨어 있을지 몰라 다가가기 꺼려졌다.
결국, 가장 가운데에 뻥 뚫린 곳에 대자로 누운 사이클롭스 옆을 지나가는 게 제일 나은 상황이었다.
‘괜찮겠지?’
진하가 덮어쓴 망토를 꽉 붙잡았다. 지금까지 나온 몬스터 중 지금 나온 사이클롭스가 첫 번째 A급 몬스터였다.
일단 나오는 도중에는 문제없이 진하를 발견하지 못하긴 했지만 과연 가까이 다가갔을 때도 아무런 기척을 흘리지 않은 채 지나갈 수 있을지 애매했다.
‘스킬도 못 쓰고…….’
스킬을 쓰면 비약적으로 신체 능력이 올라가지만 동시에 기껏 죽여 놨던 기척이 드러나 버리니 패스, 그건 너무 도박 수였다.
그렇다면 역시 방법은 그냥 이대로 지나가는 게 베스트이긴 했지만 그러기엔 몬스터의 등급이 걸렸다. 기껏해야 진하가 가진 건 1, 2만 포인트짜리 망토뿐인데 모습은 둘째치고 기척 없이 지나갈 수 있을지 너무 걱정됐다.
‘일단 가자.’
한참을 서성이며 고민하던 진하가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이 방법밖에 없었다.
사이클롭스가 깊이 잠들기까지 기다리며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역시나 다른 방법은 없었다.
스륵, 스르륵.
아무런 발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나아가는 진하. 다행히도 망토의 기능이 먹히는 건지, 아니면 깊이 잠든 건지 사이클롭스는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약 10분 후, 엄청나게 짧은 거리를 10분에 걸쳐 천천히 움직인 진하는 눈앞에 보이는 게이트 입구를 보며 겨우 긴장감이 풀리는 걸 느꼈다. 게이트까지 거리는 약 40미터, 조금만 더 가면 되는 상황이었다.
휘익!
그때 사이클롭스의 팔이 진하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 모습에 순간 뒤로 빠르게 발을 박차려던 진하는 가까스로 발을 멈춰 세웠다.
쿵!
진하의 바로 앞으로 떨어지는 사이클롭스의 팔. 사이클롭스를 쳐다보자 여전히 깊이 잠든 상태였다.
‘잠버릇 한번 더럽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실제로는 꽤 위험한 상황이었다. 자칫 반사적으로 움직여 버렸으면 기척을 내 버려 몬스터들에게 들켜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거기다 사이클롭스가 크게 뒤척이는 바람에 잠을 자던 몬스터들이 깨어나 버려 다시 잠들 때까지 움직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답답하다.’
잠입이라는 걸 아예 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전문적으로 한 것은 처음이었다.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계속 있는 건 나름 고역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다시 모든 몬스터들이 깊이 잠든 걸 확인한 진하가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바로 40m만 가면 되는 짧은 길이었지만 앞을 가로막는 사이클롭스의 팔 때문에 또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망토의 사용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 순간 들려온 소리, 진하는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하고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가 메시지에 대해 이해하기도 전에 몬스터들이 반응했다.
끼아아악!
‘크윽!’
벤시의 비명 소리에 진하가 급히 귀를 막았다. 그리고 진하는 곧바로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벤시와 스펙터 무리를 확인했다.
“이런 젠장!”
들킨 것을 확인하자마자 진하가 다급하게 <과거의 후회>를 사용했다. 순식간에 깃드는 3개의 환영. 진하는 곧바로 발을 박찼다.
‘20m!’
몇 번의 박참으로 20m를 나아간 진하는 곧바로 몸을 굴렸다.
피리릭!
아주 작은 소리와 함께 진하의 머리가 있던 곳을 내리긋는 벤시의 손톱. 진하는 상황을 확인할 시간도 없이 곧바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스걱!
몸을 날리자마자 스펙터의 낫이 진하가 있던 자리를 베고 지나갔다.
‘젠장!’
순식간에 모여드는 벤시와 스펙터를 보며 진하가 혀를 찼다. 유령 종이라 그런지 속도가 매우 재빨랐다. 게이트까지는 이제 15m만 가면 되는 상황인데 벌써 그의 주위로 가득 찬 몬스터들.
‘쯧, 벌써 쓰면 안 되는데.’
진하는 혀를 차며 파우치에서 구슬을 집어 들었다. 하필이면 유령 종이라 일반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쿠워어!”
그때 잠에서 깨어났는지 사이클롭스가 진하를 보며 괴성을 질렀다.
‘나이스!’
진하는 사이클롭스의 괴성에 스펙터와 벤시의 영체가 살짝 흐트러지는 걸 보자마자 곧바로 게이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쿠어!
그와 동시에 진하를 향해 손을 내리찍는 사이클롭스. 진하는 몸을 옆으로 날리는 대신 게이트를 향해 더욱 빠르게 바닥을 박찼다.
스으윽.
게이트를 통과한 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 뒤질 뻔했네.’
자칫 잘못하면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 자체도 꽤 힘들 뻔했다. 이제 바로 스킬을 풀어 다시 기척을 죽이고…….
그그극!
진하는 그 생각을 곧바로 취소했다. 게이트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건 온갖 골렘들과 사이클롭스들.
“이런 니미럴.”
진하는 잠들어 있어야 할 몬스터들이 이미 깨어 있는 걸 보며 빠르게 몸을 날렸다.
크어어!
그리고 가장 앞에 있던 사이클롭스를 기점으로 모든 몬스터들이 진하를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콰앙!
진하는 가장 앞으로 쏟아지는 주먹을 피하며 사이클롭스의 다리 아래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진하를 향해 날아오는 발, 하지만 다행히도 방향이 약간 어긋난 상태라 진하에게 닿지는 않았다. 대신.
퍼억!
커다란 둔탁음과 함께 가랑이 사이를 부여잡는 사이클롭스. 같은 남자로서 괴로워하는 사이클롭스의 명복을 빈 진하는 빠르게 다른 사이클롭스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갔다.
콰앙! 퍼억! 퍽! 콰직!
진하가 움직임에 따라 수많은 둔탁음과 파괴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사이를 돌아다니던 진하는 그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야.’
게이트 안에 몬스터들이 모두 깨어 있던 건 불행이었지만 그 몬스터들이 죄다 대형 몬스터라는 건 다행이었다. 둔한 상태에 거대한 몸뚱이까지 서로를 방해하는 덕에 상대적으로 매우 작은 진하는 편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대로만 나아가자.’
끼아악!
그 순간 또다시 들려오는 비명 소리, 골렘의 주먹을 피해 사이클롭스 뒤로 숨은 진하는 비명이 들리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수많은 스펙터와 벤시들이 게이트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