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기우뚱, 털썩!
하준수의 신형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재희는 그 모습을 보며 시위를 당겼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스킬을 사용한 것은 확인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죽지는 않았을 것이고, 곧 있으면 달려들 게 분명했다. 여기서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적당히 미쳐버린 그를 상대로 버티는 것.
스르륵.
그녀의 예상대로 하준수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어났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눈의 초점이 약간 나갔다는 정도?
다시 한번 그녀가 하준수의 머리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타악―
하지만 좀 전과는 다르게 그의 손에 잡히는 화살, 그녀는 이를 악물며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하준수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까득!
그 멀었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재희는 하는 수 없이 그를 향해 마지막 화살을 쏨과 동시에 손을 교차시켜 앞을 막았다.
콰앙!
순식간에 뒤로 밀려나는 그녀. 그녀는 허벅지에서 뽑아 든 단검을 재빠르게 휘둘렀다.
퍼억!
“여전히…… 무식하시네요.”
단검에 꿰뚫린 하준수의 손을 바라보며 재희가 쓰게 웃었다. 역시나 스킬을 사용한 직후부터 그는 아무런 방어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크윽…….”
순간 그녀를 향해 주먹을 내뻗던 하준수가 멈칫했다. 재희는 그 틈을 이용해 파우치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콰직!
순식간에 터지며 그녀의 온몸에 발라지는 액체.
<본드: 강력한 순간접착제. 바르는 순간 그 무엇으로도 뗄 수 없다. 다만 순간접착제라 10분이 지나면 저절로 떨어진다.>
그 순간 멈칫했던 그의 주먹이 다시금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재희는 그의 주먹 사이로 파고들어 그에게 달려들었다.
퍽!
그 순간 파고든 그녀의 몸통을 하준수의 반대 손이 가격했다. 그로 인해 극심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미소를 지은 재희는 곧바로 그를 안았다.
찰싹!
순식간에 붙어 버리는 둘의 몸, 하준수는 순간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붙어 버린 몸으로 인해 거리가 멀어지지는 않았다.
‘됐어.’
재희는 의도한 바가 모두 이루어졌음에 쾌재를 불렀다. 이제부터는 그를 믿고 그녀가 버틸 차례였다.
퍽!
하준수의 주먹이 그녀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생각보다 적은 통증, 붙어 버린 몸과 그녀가 하준수의 팔과 자신의 팔을 엮은 덕에 제대로 된 공격이 되지 않고 있었다.
“크윽!”
하준수는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에 불편함을 느끼며 거칠게 몸을 움직였지만 그런다고 그의 몸이 제대로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한쪽 손과 몸이 그녀의 몸통에 붙어 버린 하준수와 그 상태에서 자신의 팔로 최대한 그의 나머지 팔을 엮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재희, 그리고 그런 그녀를 움직이기 힘든 팔로 계속 가격하는 그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이상한 모습이었다.
뚜둑!
“으윽!”
계속되는 공격에 갈비뼈가 나간 것을 느끼며 재희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그러니 이겨 내야 했다.
[전에 말씀드렸던 방법이요, 아무래도 좀 바꿔야 할 듯하네요.]
[근데 진짜 할 거예요?]
그저께 찾아와 진하가 얘기해 준 방법이었다. 이조차 통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2분이 지나갔다.
“이제, 정신…… 좀 차리죠?”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그녀가 그를 불렀다. 그의 팔과 엮였던 그녀의 팔은 부러졌고, 그의 주먹에 얻어맞은 그녀의 몸은 중상이라고 봐도 무방한 상태였다.
콰직!
그 순간 하준수의 이빨이 그녀의 목을 물었다.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한 것이 답답했는지 이빨까지 동원하는 그.
“진짜…… 죽이게요?”
그녀가 대답 없는 하준수에게 물었다. 이대로 그의 이빨이 그녀의 목을 물어뜯는다면 그녀는 확실하게 과다출혈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실패인가?’
지금 생각하니 정말 말이 안 되는 방법이었다. 다른 방법도 분명 찾아보면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았다. 지금이 아니라면 다음에는 불가능해질지도 몰랐으니까.
마지막임을 느낀 재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녀의 각오가 무색하게 그녀의 목을 물은 하준수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질질질…….
그녀의 목을 타고 하준수의 침이 섞인 그녀의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입은 더 이상 다물어지지 않았다.
재희는 지금이 기회라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정신 차려요. 그건 당신 여동생 목소리가 아니에요.”
아주 조금씩 벌어지는 하준수의 입, 이내 2분에 걸쳐 천천히 벌어진 하준수의 입이 그녀의 목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를 내리치던 주먹도 완전히 멈춘 상태였다.
“미련한…….”
“제정신으로 돌아왔으면 됐어요.”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재희가 그대로 무너졌다. 그 모습에 당황한 하준수가 재빠르게 자신의 파우치에서 홀리 포션을 꺼내 그녀의 목에 뿌렸다.
치이익―
급속히 회복되어 가는 그녀의 목, 나머지 물약조차 재희에게 먹인 하준수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 *
“어디 갔다 와?”
훈련으로 인해 젖은 땀을 식히고 있던 하예진은 안으로 들어선 진하를 보며 물었다.
“어느 미친 커플 성사되는 거 보고 왔어.”
“미친 커플?”
“어. 미친 커플.”
진하는 방금 전 상황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물론 그가 가르쳐 준 방법이긴 했지만 그걸 그대로 시행한 재희나 이겨 낸 하준수나 미친 건 똑같았다.
‘그래도 어찌 해결책을 만들었네.’
원래 진하가 충고해 줬던 방법은 몬스터를 죽이는 것에만 열중하는 그에게 자신의 필요성을 어필하라는 거였다. 그가 생각하기엔 가장 큰 문제점이 그거였으니까.
하지만 하준수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단순히 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팀, 이제 네가 완전히 맡아라.]
[왜? 내가 부탁하긴 했지만 네가 이끄는 게 맞잖아.]
[아니, 나는 더 이상 팀을 이끌기 힘들어졌다.]
스킬을 사용할수록 강해지는 광증과 그로 인한 피아 구분 불가,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독일 이후로 컨트롤하기 어려워졌다는 게 그 이유였다.
‘문제는 아무리 살펴봐도 스킬에 그런 부작용은 없었다는 거지.’
버서크 스킬에 광증이 있다는 설명은 없었다. 그렇다고 전투 본능이라는 스킬의 문제인가 싶었지만 설명을 들어보면 하준수의 생각과는 달리 그 스킬의 문제도 아닌 것 같았다.
만약 그의 생각대로였다면 스킬을 사용하기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광증에 시달려야할테니까.
결국, 그가 광증을 앓는 이유는 단순의 그의 정신 문제였다. 여동생으로 인해 만들어진 일종의 광증.
그래서 진하는 이 사실을 재희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고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바로 목숨을 건 방법을.
‘다시 생각해도 미친 짓이긴 해.’
하준수의 트라우마는 여동생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그로 인해 자신을 탓하는 게 문제였다. 자신이 소중한 동생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였으니까.
그래서 같은 방법은 사용했다. 이성을 잃게 만들고 소중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재희가 목숨을 건다면 어쩌면 고쳐질지도 몰랐으니까. 소중한 사람을 죽였다는 게 트라우마라면 같은 상황은 절대 안 만들 거라는 전제하에 고안한 방법이었다.
아니,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행할 거라고도, 성공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준수가 재희의 목을 물었을 때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곧바로 달려들려고 했었다. 그녀가 작게 고개 젓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아, 몰라. 그 둘은 이제 알아서 하겠지.”
처음 한 번이 어려운 거였다. 광증을 이겨 낼 정도로 그녀가 소중하다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완치는 가능했다.
“우리는 씻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진하가 앉아 있는 하예진에게 말했다. 새해인 만큼 더 이상의 방해는 받고 싶지 않았다.
“응, 그러자. 로비 앞에서 만나.”
“오케이. 너 빨리 씻어라?”
“너나 늦지 마세요.”
그 말과 함께 일어나는 하예진, 진하는 피식 웃으며 샤워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친 하준수.
“어, 훈련했어?”
진하는 모른 척 그에게 인사했다. 하준수는 인사하는 진하에게 다가왔다.
“너도 마침 훈련소에 있었군.”
“그치, 훈련은 필요하니까.”
“잘됐군.”
“잘됐…… 응?”
퍼억!
진하는 복부에서 느껴지는 격한 통증을 느끼며 하준수를 노려봤다. 하지만 하준수는 그런 진하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예전에 이기수랑 같이 말하지 않았나? 네 방법 거칠고 안 좋다고.”
“하하.”
“잘못됐으면 너를 죽였을 거다.”
그 말을 마치고 샤워실로 들어가는 하준수. 진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잘못될 일 없었다고.”
기껏 뒤에서 몰래 지켜보면서 도와주었는데 이런 대우라니…….
“이래서 커플은 도와주면 안 된다니까.”
선택도 재희가 하고 실행도 재희가 했는데 괜히 자신에게 화풀이였다. 심지어 진하는 사고 안 나게 시간까지 할애하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니 열받네?”
물론 위험한 방법을 제시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실행한 것은 재희였다. 아니, 따지고 보면 광증을 가졌으면서 제대로 정신과 치료도 안 받은 하준수도 문제였다.
“오케이, 내가 한마디 한다.”
순식간에 옷을 벗어 던진 진하가 샤워실 문을 거칠게 열었다.
쾅!
“야! 하준수! 음?”
샤워실 문을 열었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거야 그럴 수 있었지만 다들 뭔가를 힐끗힐끗 보고 있었다.
‘뭐지?’
“뭔가?”
그 순간 진하의 부름에 대답하며 돌아서는 하준수, 진하는 하준수와 마주 보고 나서야 모든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음, 아냐 미안했다고.”
빠르게 하준수와 자신의 몸을 번갈아 본 진하가 말했다. 절대 뭔가 묘하게 질 것 같아서는 아니었다. 그냥 사람들이 있어서 뭐라 하기 그런 거였다. 정말 그런 거였다.
* * *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진하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하예진을 바라봤다. 늦을 줄 알았는데 웬일로 빠르게 나온 듯했다.
“오, 빠르게 나왔네?”
“네가 빠르게 나오라며. 그러는 너는 늦냐?”
“뭐 늦고 싶어서 늦은 건 아니고.”
차마 하준수랑 같이 나가고 싶지 않아 오래 샤워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진하는 대충 말을 넘겨짚었다.
“그건 그렇고, 가자. 나 배고프다.”
“나도 배고프거든?”
벌써 저녁 6시 반이었다. 거기다 훈련까지 해서 그런지 배가 너무 고팠다.
“근데 지금 저녁 먹고 우리 야식 먹을 수 있어?”
“가능하지. 그래서 오늘 저녁은 뭔가요?”
“네가 좋아하는 냉면 어때?”
“콜!”
웃으며 말하는 하예진을 보며 진하가 웃었다. 이제부터는 진짜로 완전히 휴식 시간이었다.
“김진하 님.”
그 순간 누군가 진하를 불렀다. 한이었다.
“응? 당신이 여기에 왜 있어요?”
“죄송하지만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한의 말에 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이 직접 찾아왔다는 건 확실히 뭔가 일이 있다는 거긴 했다.
“미안하면 안 가면 안 되나? 표정을 보아하니 급한 일은 아닌 듯하고, 그리고 굳이 권한이 없는 나를 끌고 갈 필요는 없잖아?”
정보 길드의 일은 모두 송하나가 결정하고 진행했다. 애초에 진하가 끼어들 일은 없었다.
그나마 송하나에게 알려 준 미래를 토대로 블랙 길드와 관련된 특이사항이나 게이트 관련된 일이 있을 때나 만나서 회의를 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급한 일이 있은 적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만 오늘 내로 김진하 님과 회의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합니다.”
“하아…….”
“진하야, 다녀와.”
대화를 듣던 하예진이 진하에게 말했다.
“미안해. 금방 다녀올게.”
“걱정 말고, 해결하고 와. 야식 시켜 놓을게.”
진하는 고개를 끄덕인 후, 한을 바라봤다.
“안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