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86화 (86/202)

#086

1월 1일, 새해.

협회장실에서 지친 얼굴로 커피를 마시던 송준하는 어느새 중천에 떠오른 해를 보며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협회장이라니.’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저 헌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독립해 지난 몇 년간 C등급에서 헤매기만 했었는데, 고작 반년 만에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집에 들어와라!]

[아버지, 그럴 수 없어요. 제가 무슨 생각으로 헌터가 됐는지 아시잖아요.]

[그만! 그건 사고였다. 네 어머니가 죽은 건 너 때문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몇 년째 C등급 하위에서 머무르고 있잖니, 이 아비는 네가 잘못될까 봐 잠 못 드는 거 알고는 있는 거냐?]

정확히 작년 1월 1일에 아버지와 했던 이야기였다. 더 이상 발전도 없고 위험한 헌터일은 때려치우라고, 그리고 차라리 자신을 따라 정계에 입문해라 했던 아버지.

송준하는 슬픈 표정을 짓는 아버지에게 차마 모진 말을 하지 못하고 공략은 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예비 헌터들을 가르치는 일만이라도 허락해 달라고 말했었다.

“그때는 생각 못 했는데 말이야.”

송준하가 남은 커피를 들이켰다.

사실 아버지에게 말했던 것도 발악에 불과했다. 재능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몬스터를 제대로 죽이지 못하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아버지를 위하는 척 말했던 그런 발악.

“근데 이렇게 바뀔 줄이야…….”

인생사 새옹지마라니, 설마 포기했던 일이 이렇게 변하게 될 줄은 그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태창”

<이름: 송준하

능력: 정의 관철

스킬: 1. 정의 관철

칭호: 없음.

상태: 수면 부족.>

<정의 관철: 자신의 신념이 강할수록 성장 속도가 빨라진다. 능력과는 별개로 성장 속도가 적용된다.>

너무나도 간단한 설명을 가진 스킬, 바닥이었던 그가 이제는 어엿한 A급 헌터가 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다시 한번 스킬을 읽던 송준하는 진하가 설명해 줬던 스킬의 메커니즘에 대해 되뇌었다.

[스킬은 신념이에요. 강한 신념을 가져야 스킬이 생길 수 있다고 들었어요.]

“내가 바보였지.”

그가 약했던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각오가 부족했던 것, 어머니를 죽인 몬스터를 죽이기 위해 게이트에 달려들었던 그 각오가 부족했던 것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의 말에 위안을 얻어 각오 자체가 물렁해진 걸지도 모르고.

“이제는 아니지만.”

환상이지만 또 한 번 소중한 이들을 잃는 것을 봤다. 허술했던 마음은 단단해지고, 더욱 노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스킬이 송준하의 각오를 증명하고 있었다.

“뭐, 내가 전투를 나가는 건 아니지만.”

협회장이 된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자리에 앉아 버렸다. 결국 협회장이 되는 바람에 꿈이었던 몬스터를 죽이는 일은 하지 못하게 됐지만 송준하는 이렇게 서포트라도 하게 된 것을 감사했다.

적어도 지금은 무력하게 행동하지는 않으니까.

똑똑.

“들어와.”

송준하의 말에 문이 열리고 비서 한 명이 들어왔다. 비서는 얇은 서류 더미를 몇 가지를 안고 들어와 소파에 기댄 채 커피를 마시고 있던 송준하에게 말했다.

“올해 처리할 서류입니다.”

“올해? 아직 올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렇게 많아?”

“협회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비서가 싱긋 웃으며 서류를 탁자에 놓았다. 그러고는 어질러져 있던 쓰레기들을 치우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협회장님 아버지이신 송지석 국회의원님이 내일 협회에 찾아온다고 합니다.”

“사적으로? 아님 공적으로?”

“공적입니다. 최근 게이트 폭주와 관련되어서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는 상태라 그에 대한 대책을 들으러 온답니다.”

“일부러 그랬네.”

보통은 청문회를 열어서 물어보고 탓하는 게 국회의원들이 하는 짓이었다. 특히, 이번에 협회에 저질렀던 비리들을 생각하면 그게 당연한 절차이기도 했다.

그런데 굳이 아버지가 찾아와 직접 얘기를 나누겠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아들인 그를 생각해서 국회의원들을 설득했다는 소리였다.

“송지석 국회의원님 오시면 제대로 맞이하고, 임원들에게는 괜히 오버하지 말라고 해.”

“네.”

“그래서 다음 일정은?”

어느새 쓰레기를 모두 치운 비서가 탁자 위에 있던 서류 한 장을 건네주었다.

“오늘은 점심에 유럽 협회 임원과 식사가 잡혀 있습니다. 그와 그의 수행원에 대한 자료는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교차검증은?”

“정보 길드에서 제공한 정보와 협회의 정보 교차검증 모두 마친 자료입니다.”

비서의 말에 송준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지. 적어도 초대하는 입장이니 미리 가는 게 좋을 듯하니까.”

“차량 대기시키겠습니다.”

비서가 나가고 혼자 남은 송준하는 창문 너머로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게이트를 바라봤다.

이제 반년, 예상되는 게이트 폭주까지 남은 시일이었다.

* * *

콰앙!

거대한 소음과 함께 협회 훈련장의 벽 한 면에 금이 갔다. 벽에 금을 가게 만든 하준수는 굳은 얼굴로 검게 물든 자신의 팔을 바라봤다.

‘약해.’

아무리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다지만 팔 한쪽을 희생하고 만든 결과가 겨우 이거였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A급 정도의 평균 파괴력을 상회하는 정도였지만 하준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태창”

<이름: 하준수

능력: 리미트 브레이크

스킬: 1. 버서크 2. 전투 본능

칭호: 없음

상태: 전신 중상, 한쪽 팔 괴사 직전.>

<전투 본능: 인간의 본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없어지지 않는다. 영혼이 육체를 떠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적과 싸운다.>

뱀파이어와의 전투 때 얻은 스킬이었다. 하지만 하준수는 이 스킬을 본 순간 절망하고 말았다.

‘강해질 수 없어.’

리미트 브레이크와 버서크가 있기에 그는 강했다. 극한까지 끌어올린다면 A급의 신체 능력으로도 S급 몬스터를 아슬아슬하게 잡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더욱 갈망했다. 고작 시간제한이 걸린 능력으로는 길게 싸울 수 없으니까. 더욱 길게, 더욱 강하게 싸우길 원했다.

까득!

그런데 고작 패시브로 얻은 전투 본능이라는 스킬이 다였다. 그로 인해 변한 건 없었다.

더욱 강해지지도, 길게 싸우지도 못한다. 그저 리미트 브레이크를 최대치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피아 구분도 못 하는 쓰레기 같은 능력이기까지 했다.

“아직도 그러고 있어요?”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재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웬일이지?”

“리더가 새해부터 훈련장에 박혀 있다니까 찾아온 거죠.”

“쓸데없군.”

하준수의 말에 재희가 쓰게 웃었다. 반겨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반감을 가질 줄이야.

“훈련 그만하고 나오죠? 아무리 홀리 포션이라지만 만능은 아니라고요. 나가서 밥이라도 먹고 오죠.”

“됐다.”

하준수의 말에 재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때의 일 맘에 두고 계세요? 길드장은 충분히 제 역할 했어요.”

“아니, 못했다.”

“아직 S급에 제대로 오르지도 못한 헌터가 S급 몬스터 한 마리 잡았으면 됐지, 뭐가 그리 부족하다는 건데요?”

“반쪽짜리니까.”

“아, 진짜!”

재희는 답답함에 몸부림쳤다. 분명 하준수는 독일에서 잘 싸웠다. 아직 신체 능력이 S급에 들지 못하는 상태에서 S급 몬스터를 잡았으며 1시간 동안 수많은 몬스터를 잡았다.

그런데도 그게 부족하다니, 얼마나 강해지려고 하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봐요. 길드장 씨, 당신 아직 A급이라고, 스킬 갓 각성한 사람이 다른 완연한 S급 헌터들과 비교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러는 너도 그만하는 게 어떤가?”

“뭐요?”

“네가 아무리 그래도 받아 줄 마음은 없다.”

하준수의 말에 재희가 까득하고 이빨을 갈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입구로 들어와 하준수를 마주 봤다.

“뭐가 문제인데? 내가 그렇게 별로야?”

“아무런 문제도 없다. 오히려 매력적인 여성이다.”

“그럼 뭔데?”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그럴 시간이 없다.”

하준수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재희가 뭘 원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장 예정된 게이트 폭주가 반년 뒤였다. 아니, 더욱 빠를지도 몰랐다. 그런데 피아 구분 못 하고 1시간밖에 싸우지 못하는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연애는 사치였다.

“나한테 시간을 쏟아붓느니 차라리 원래의 이름을 찾는 데 시간을 투자하는 게 어떤가?”

“그런 건 이미 포기했어.”

“그런 사람이 새로운 성을 안 만드나?”

대재앙의 날 당시 재희가 잃은 것은 이름이었다. 정확히는 성.

어떠한 몬스터인지 모르지만 그 몬스터와 마주친 이후로 그녀는 정확한 이름으로 불릴 수 없었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녀의 성은 자신도 남도 부를 수 없게 된 그녀는 성을 찾기 위해 게이트로 들어오게 되었고, 여전히 찾지 못한 상태였다.

“해제.”

재희가 앞으로 팔을 뻗은 채 말하자 작은 활 하나가 그녀의 손에 잡혔다. 그녀는 활을 몇 번 튕기더니 그대로 활시위를 당겼다.

“무형시.”

피잉―

투명하게 날아오는 화살,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빠르게 피한 하준수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지? 방금 분명 살기가 있었다.”

“맞아요. 죽이려고 쐈어요. 처음에 스킬을 소리 내서 말한 건 경고라는 거 아시죠?”

재희의 말에 하준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그가 그녀의 민감한 문제를 꺼낸 건 맞았지만 무영시라니, 너무나 심하게 반응을 하고 있었다.

<무형시: 무형의 화살을 생성해 낸다. 이때 화살의 강도와 위력은 사용자의 숙련도에 비례한다. 숙련도: 40%>

“지금 싸우자는 건가?”

“네, 싸우자는 거예요. 이대로는 못 참겠어요. 당신의 그 지긋지긋한 생각을 오늘 뜯어고쳐야겠어요.”

그 말과 동시에 무형시가 쏘아졌다. 하준수는 빠르게 몸을 피하면서 재희에게 다가갔다. 최대한 다치지 않게 잡기 위해 한계를 적당히 푼 채로.

“고작 그 정도로! 절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재희가 빠르게 몸을 뒤로 물리며 소리쳤다. 아무리 그녀가 그보다는 약하다지만 그녀도 A급, 하준수가 어설프게 능력을 사용해서는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애초에 궁수인 그녀의 민첩함은 그보다 더욱 빨랐다.

“적당히 하지 그러나.”

하준수가 자신의 급소를 노리며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내며 말했다. 화풀이라기엔 막아 내기 어려웠고, 그렇다고 그녀를 잡기 위해서 스킬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왜요? 두려워요?”

“적당히 해라.”

“내가 말했죠. 진심이라고.”

그녀가 연신 무형시를 날리며 말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적당히 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제대로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죽일 생각이었다.

“이대로 가면 당신 진짜 죽어요.”

재희가 아직도 아슬아슬하게 화살을 피하는 하준수를 보며 말했다.

하준수가 그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리미트 브레이크의 한계를 꽤 높게 풀어야 하는데, 이미 훈련으로 몸이 많이 망가진 그로서는 그녀를 잡기 위해선 스킬을 써 몸을 치유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 안 사용할 거예요?”

“안 사용한다.”

“그럼 죽으세요.”

재희가 더욱 빠르게 활을 잡아당겼다. 더욱 많아진 화살을 그를 점차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이내 화살 하나가 그의 어깨를 꿰뚫었다.

“다음은 머리예요.”

까득!

하준수는 도대체 그녀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나더니 그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죽일 수도 없었고, 제압하자니, 치유액이나 홀리 포션을 먹을 여유는 없었고 스킬을 사용할 생각도 없었다.

―죽여.

그 순간 그의 귓가에 들리는 작은 목소리. 하준수는 그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그 즉시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하는 목소리.

―죽여. 죽여. 죽여

―죽여야 해. 적이야. 죽여!

하준수는 이를 갈며 몸을 멈춰 세웠다. 아직 스킬을 사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문제는 크게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퍼억!

재희의 화살이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