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문방구에 도착한 진하는 찌뿌둥한 몸을 풀며 시간을 바라봤다. 시간은 벌써 저녁 9시, 잠깐 얘기한다는 게 저녁때까지 그녀와 내내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드르륵.
“진하야 왔어?”
“어?”
진하는 문을 열자 보이는 하예진을 보고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불이 켜져 있기에 누가 있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그게 송하나라고 생각했지 하예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너, 게이트에 갔던 거 아니었어?”
“이번 홍보 영상 찍는 건 1층에서만 했거든. 그래서 빨리 끝났어.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내가 저녁 해 놨어.”
하예진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이 만든 요리를 가리켰다. 김치찌개에서부터 제육볶음까지 진하가 좋아하는 음식투성이였다. 그 모습을 본 진하는 뒤통수에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아, 저녁 먹고 왔는데…….’
“뭐야? 반응이 왜 이리 뜨뜻미지근해? 저녁 먹었어?”
“아니! 설마 먹었겠냐? 게이트 간 네가 여기 있어서 살짝 얼빠져서 그런 거지. 그나저나 이건 또 언제 만든 거야? 너 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엣헴! 내가 손 하나는 빠른 거 모르냐? 그리고 나야 그냥 홍보지만 너는 전쟁터 다녀온 거잖아. 너에 비하면 하나도 안 힘들지.”
하예진의 말에 진하는 뭔가 양심이 찔리는 게 느껴졌다. 방금까지 이신혜와 재밌게 얘기도 나누고 저녁도 먹고 온 입장에서 하예진의 말은 그를 마치 바람피운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에휴, 뭔 바람이냐. 예진이가 날 좋아하는지도 아닌지도 모르는데.’
“자, 그럼 어디 한번 먹어 볼까? 그러고 보니까 내가 네 밥 마지막으로 먹은 게 꽤 오래됐지?”
진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음식이 놓여진 자리에 앉았다. 마찬가지로 반대편에 앉은 하예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응, 마지막이 아마 헌터 진급 시험 전날이었을 거야. 그 이후로는 우리 둘 다 진짜 바빴잖아.”
“그치, 바빴지. 생각해 보면 진짜 많은 일이 있었네.”
고작 반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생겼던 일을 생각하면 반년이 아니라 1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정도의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제 밑 작업은 끝이니까.’
가장 아슬했던 구간은 지나갔다. 처음 계획처럼 되지는 않았지만 나름 만족스러울 정도의 결과를 이끌어 냈다. 그러니 이제 폭주들만 막으면 되었다.
“또, 또! 게이트 생각하지? 밥 먹을 땐 밥만 먹자.”
“알았어.”
“근데 진하야. 너 새해에 뭐 할 거야?”
“새해?”
“응, 이제 곧이잖아.”
하예진의 말에 진하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생각해 보니 확실히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곧 새해였었다. 그리고 그런 진하의 모습에 하예진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설마 곧 있음 새해인 것도 몰랐어?”
“응, 까먹었었다.”
“아무튼, 그때 뭐 해?”
“글쎄? 아마 게이트 폭주를 대비해서 너랑 훈련하고 있지 않을까?”
진하의 말에 하예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하는 한숨을 내쉬는 하예진의 마음은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게이트 폭주에서 살아남으려면 훈련은 필수였다.
특히, 하예진의 경우 진하의 동료들 중 가장 신체 스펙이 쳐지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꼭 훈련시켜야 했다.
“놀 생각 하지 맙시다. 게이트 폭주가 곧이야. 아니, 언제 일어날지도 몰라.”
“누가 논데? 나도 알거든?”
“대신 저녁에 훈련 끝나면 같이 야식이나 먹자.”
“거기에 소주 콜?”
“오케이.”
진하의 대답에 삐진 표정을 푸는 하예진, 그제서야 진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겨우 위험을 벗어난 진하는 그녀가 만든 김치찌개를 한술 떠먹어 보았다.
“어? 너 실력 늘었어? 이제는 먹을 만한데?”
“뭐? 원래 잘 만들었었거든?”
“킥킥, 장난이야. 더 맛있어졌단 소리지.”
“내놔! 내가 다 먹을 거야!”
“야! 제육볶음을 통째로 가져가는 사람이 어딨냐?”
심술 어린 표정으로 제육볶음을 뺏어가는 하예진을 보며 진하는 웃으며 이 선택을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한 사내가 그런 진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선택이라…… 잘하면 되겠네요.’
* * *
삑, 삑, 삑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는 모니터링 장비를 보던 한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남자를 보았다.
“보스.”
아무런 감정 없이 무감각하게 그를 부르는 한, 그러자 가만히 있던 남자가 눈을 스르륵 떴다.
“왔느냐.”
“예.”
“하나는 뭐라 하더냐.”
“아가씨께서는 저에게 깨어나는 대로 바로 연락을 취하라 했습니다.”
한의 말에 보스라 불린 남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군. 혹여나 정에 휩쓸려 바로 병원에 와서 내 상태를 확인했다면 조금 실망스러웠을 거야.”
“보스 그런데 어째서 아가씨에게 일어난 것을 알리지 말라 하신 겁니까?”
“안 그래도 안팎으로 복잡한 일이 가득한데 알아서 좋을 건 없지. 그리고 적들을 생각하면 곧 죽을 노인네 한 명과 움직이기는 힘들어도 살아 있는 노인네의 차이는 꽤 커.”
아무리 이곳이 보안이 좋다고 하더라도 의식이 깨어났다는 사실은 결국 적에게 알려지게 될 게 뻔했다. 그러니 지금처럼 죽기 직전의 노인네, 하지만 잘하면 죽기 전에 한번 의식을 차릴 수 있는 사람, 그 정도가 딱 좋았다.
“그러니까 최대한 난 죽은 사람처럼 있는 게 나아. 그나저나 오늘 그 애가 했던 일들은?”
“간단하게 정리해 왔습니다. 말씀하시면 언제든지 바로 브리핑하도록 하겠습니다.”
“해 봐.”
보스의 말에 한이 천천히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로 오늘 송하나가 했던 일과 결정들에 대해 읊기 시작했다. 한이 말하는 내용을 듣던 보스는 그가 브리핑을 모두 끝마칠 쯤이 되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아졌네. 하지만 아직 미숙해.”
“어떤 점이 말씀이십니까?”
“우선 블랙 길드랑 협회. 줄타기하는 것도 좋지만 협회가 우세인 상황에서는 확실하게 협회에 붙는 게 나아. 그 대신 블랙 길드들에겐 몰래 퇴로를 마련해 줌으로써 스파이처럼 보이게 하는 거지. 그래야 블랙 길드에게 더 강한 신뢰를 얻을 거고, 협회에게도 더 우호적인 모습이 될 테니까.”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그래, 협회에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고, 블랙 길드에게 그렇게 신경 쓰면 들어갈 비용이 많아지겠지. 그런데 그게 정답이야.”
보스의 말에 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스의 말도 맞는 것 같았지만 굳이 위험부담을 안고 가는 방법은 한 또한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맞장구치지 않았다.
“역시, 자네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아닌 건 아니라고 티 내는 거.”
“죄송합니다.”
“아냐, 자네나 하나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니니까. 다만 내가 걱정되는 건 지금 이룬 것들이 모두 하나의 것이 아니라는 거야.”
“네?”
“정보 길드의 통합도 그렇고, 협회와의 관계도 그렇고 모두 그 김진하라는 놈이 중심이더군.”
“예,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한의 말에 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딱히 뭐라 하는 건 아니었다. 막상 그 역시 그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나도 아네. 다만 앞으로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야. 정보 길드의 보스가 누군가에 밑에 있어선 안 되지.”
“그래서 결혼이란 방법이…….”
“그래서 자네가 무르다는 거네.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게 가능할 것 같은가?”
잠시 고민하던 한은 고개를 저었다.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있다는 것은 느껴지지만 아무리 봐도 이어진다기보단 송하나가 매달린다는 쪽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지금이야 상관없겠지. 하지만 그러다 사이가 틀어지면? 그러면 그 아이에겐 뭐가 남지?”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아티팩트에 의해 계약되어 있습니다.”
“알아, 그러니 함부로 건들기 어렵겠지.”
아티팩트에 의한 계약은 그리 무른 것이 아니었다. 아티팩트를 파괴하기도 어렵고, 그 사람을 죽여 계약을 무효화시키는 것 또한 힘들었다.
계약의 주체가 되는 자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들어갔다간 아티팩트의 제재를 받게 되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애가 계약을 어겼을 때나 그런 거지. 다른 사람이 독단으로 움직이는 건 상관없지 않은가?”
“그를 제가 죽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를 건드리는 건 좋지 않습니다.”
지금의 진하를 건드리는 건 마이너스 요소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를 건드리면 움직일 단체가 한둘이 아니었고, 지금 아직 완벽하게 안정되지 않은 정세를 생각해서도 좋지 않았다.
“그를 건드리면 이기수가 움직일 겁니다. 그리고 협회도요. 그냥 안전한 루트로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 오히려 지금이 적기야. 아직 혼란한 정세여야 가능성이 있어. 오히려 안정되면 절대로 김진하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걸세.”
한은 보스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계약에 의해 송하나가 가지고 있는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명목, 김진하는 한 번도 그녀의 것을 탐내거나 뺏으려 한 적이 없었다.
보스의 말처럼 미래에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런 가능성 하나 때문에 커다란 리스크를 지는 것은 너무나 말이 안 되었다.
“큭, 나도 생각이라는 게 있네. 설마 우리 하나에게 그런 짐을 지울 생각은 없네.”
“그럼…….”
“그래, 지금이 적기야. 아직 혼란스럽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는 용의선상에서 벗어나지.”
보스는 그 말과 함께 한을 바라보았다.
“자네에게 하나 묻지, 자네는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가?”
“저는 보스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습니다.”
한을 거두고 키워 준 것이 보스였다. 그렇기에 그만큼 송하나가 소중했지만 1순위를 따진다면 보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를 위해서 죽어 줄 수도 있나?”
“명하신다면.”
“그럼 자네, 나와 함께 죽어 주게.”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로서는 송하나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유와 권력을 쥐여 주고 싶었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을 하나밖에 없지.’
이제 그에게 남은 거라곤 늙어빠진 몸뚱이와 무늬뿐인 위치뿐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해 줄 일은 하나였다.
바로 김진하를 죽이고, 그녀에게 모든 걸 안겨 주는 것.
“지금부터 자네는 조직에서 따로 불만 세력을 모으게. 그리고 그들의 수장이 되어 송하나를 배신하게.”
“……그리고 김진하를 죽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럼 송하나에겐 아무런 피해도 없을 거야.”
실패를 해도 그녀에겐 피해 없이 불만 세력을 정리할 것이고, 성공한다면 그녀는 자유와 온전한 권력을 얻게 될 것이다.
물론 김진하가 죽는다면 협회와 이기수가 가만히 있진 않겠지만 상관없었다. 모든 화살은 한과 그가 지고 갈 거니까.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나마 빚을 갚을 수 있다면 저에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옛날 거리에서 죽어가던 한을 살려 주고 이름을 준 순간부터 애초에 그의 목숨은 보스의 것이었다.
“바로 준비할 수 있겠지?”
“네. 며칠이면 됩니다.”
“그러면 결행 일은 1월 1일 저녁이다.”
“네.”
한은 대답을 마치고 곧바로 병실을 나갔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움직여야 했으니까.
보스는 나가는 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 그가 할 일은 결행일까지 의식이 없는 척하는 일밖에 없었다.
‘부디 이 선물이 너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