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84화 (84/202)

#084

“하아…….”

“왜 그러십니까?”

“아냐 좀 그런 게 있어.”

송하나는 질문하는 한에게 대충 대답하고는 창문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밖의 풍경은 전혀 보이지 않고 대신 아까 전의 일만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되었다.

‘으…… 너무 나갔나?’

좋긴 했지만 갑작스럽게 진도를 너무 뺀 거 아닌가 싶었다. 아니, 뽀뽀 정도야 할 수 있었지만 내연녀라니…… 그녀가 생각해도 너무 심한 장난이었다.

“그가 그렇게 좋으십니까?”

“어, 어? 무슨 소리야?”

“김진하 말입니다. 김진하가 그렇게 좋냐고 물었습니다.”

“아니, 내가 말했지. 그에게 관심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권력과 아티팩트에 대한 게 대부분이야.”

“일부는 사적인 마음이 있으시단 소리군요.”

한의 장난스런 말에 송하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분파가 어려웠을 때는 안 그랬는데 여유로워지니 요즘 들어 과거에 놀아 주었던 시절처럼 한의 장난이 늘은 것 같았다.

“그 이야기는 그만해. 그나저나 내가 지시한 건?”

송하나의 말에 한이 한쪽에 쌓아 놨던 서류를 넘겨주었다. 송하나는 그가 넘겨준 서류의 가장 앞장을 들췄다.

“흠, 항암 그룹의 주식은 잘 매입해 가고 있네. 신후 그룹은 약간 아쉽고. 항암 그룹이랑 신후 그룹 쪽에서는 반응 없고?”

“항암 그룹은 없습니다. 당장 협회가 넘겨주는 이득에 눈이 팔린 것처럼 보이니까요. 다만 신후 그룹의 경우 움직임은 없지만 워낙 주식을 꽉 잡고 있어서 이렇게는 경영권을 뺏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알고 있어. 어차피 이건 그냥 써먹는 무기 중 하나일 뿐이야. 애초에 이걸로는 항암 그룹도 잡아먹을 수 없어. 그 부분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이 두 곳 말고도 다른 그룹들 주식들도 조심히 매수해.”

“네.”

“그리고 블랙 길드들은?”

송하나가 또 한 장의 서류를 넘겼다. 그곳에는 온갖 블랙 길드들의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요즘 살짝 위험한 느낌이 듭니다. 그전까지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거나 움직여도 작게 움직였는데 뭔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게 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거 아마 게이트 폭주일 거야.”

“게이트 폭주요?”

“응, 그게 일단 폭주하면 다들 혼란에 빠지니까 그걸 이용해서 한탕 해 먹겠다는 거지.”

“하지만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데요? 그리고 더 이상 터지리라는 보장도 없고요.”

“이미 유럽은 터졌어. 언제가 되든 한국도 터질 거야. 그리고 미리 준비라고 해 봤자 안 터져도 걔들은 크게 손해 볼 건 없잖아? 이득은 크고, 리스크는 적으니 당연히 준비하는 거겠지.”

“그럼 어떻게 할까요.”

“지금은 건드려 봤자 그냥 들쑤시는 격이야. 그냥 두고 대신 협회한테 정보를 넘겨. 단, 그냥 넘기지 말고. 또 블랙 길드들한테도 쓸모없는 협회 정보 일부 넘겨. 아무리 협력 관계라지만 우리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해야 해. 알지? 블랙 길드한테 아예 등을 돌리면 우리가 타깃 되는 거.”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석은 어떻게 됐어?”

“수급이 어렵습니다. A급까지는 어찌어찌 되었었지만, S급부터는 알다시피 공급도 매우 적고, 발전기 대신 돌리기 위해 사용하다 보니 수급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최대한 수급해 봐. 이제는 A급도 거의 쓸모 없다고 했으니까.”

“알겠습니다.”

송하나는 한이 넘겼던 서류를 다시 한번 빠르게 훑었다. 그의 보고와 똑같이, 대신 좀 더 자세히 적힌 서류를 모조리 읽은 그녀는 다시 서류를 한에게 넘겼다.

“아, 맞다. 그리고 이신혜라는 헌터 뒷조사 좀 해.”

“어디까지 조사할까요? 기본적인 신상정보는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더 해. 알 수 있는 건 모조리 알아 와. 애초에 가지고 있는 신상정보도 거의 협회 정보와 비슷하잖아. 그런 건 속이려면 속일 수 있어.”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고…… 더 보고할 거 있어?”

송하나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한이 입을 열었다.

“보스, 병원에서 그러는데 보스의 아버지가 곧 깨어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뭐? 정말이야?”

“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주 안에는 깨어날 것 같다는 소견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깨어나면 바로 보고해. 그리고 송준하한테 선물 하나 보내고. 어찌 됐든 협회의 협조 덕에 아버지의 치료가 쉬워졌으니까.”

“네.”

* * *

딸랑!

“어머? 돌아오셨어요?”

이신혜가 카페로 들어온 진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하는 놀란 그녀를 보며 웃으며

“네, 방금 왔어요.”

“근데 집으로 가시지 않고 바로 이쪽으로 오신 거예요?”

“바로 집으로 갈까 했는데 신혜 씨랑 약속한 게 생각나서요.”

“약속이요?”

진하의 말에 이신혜가 생각에 잠겼다. 진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살짝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생각 안 나나 보네요. 그럼 전 이만 갈게요?”

“아! 잠깐만요. 설마 기억 못 하겠어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면 되죠?”

“네.”

진하의 대답에 이신혜는 빙긋 웃으며 곧바로 뒤돌아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진하는 바로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그녀가 커피를 만드는 것을 구경했다. 만드는 모습이 매우 자연스럽고 익숙했다.

‘처음에 봤을 때는 그래도 좀 어색했는데 이제는 완전히 카페 사장이네.’

처음에 봤을 때만 해도 아직 손에 일이 익지 않아 어색함이 많이 보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손에 익은 게 눈에 띄었다. 확실히 그녀는 헌터일보다는 이런 일이 더 잘 어울렸다.

“여기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이신혜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다가왔다. 그러고는 진하에게 컵 하나를 내밀었다. 진하는 그녀에게 받아 든 커피를 살짝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코로 가져가 옅은 향을 잠깐 맡았다.

그리고.

벌컥벌컥!

“음! 역시 제일 맛있네요.”

“풋!”

벌컥벌컥 커피를 마시는 진하의 모습에 이신혜가 웃었다. 진하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뭔가 이상해요?”

“네, 많이 이상해요.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커피를 그렇게 마시는 사람은 처음 봐서요.”

“아, 제가 좀 벌컥, 벌컥 마시죠?”

“아뇨, 그런 사람들은 많아요. 근데 정말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바라보고 향을 맡다가 그렇게 벌컥 들이켜는 사람은 처음이네요.”

이신혜의 말에 진하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왜냐하면 이 버릇을 가르친 게 그녀였으니까.

[또! 내가 그렇게 막 마시지 말랬지!]

[솔직히 커피는 카페인 맛으로 먹는 거잖아. 그리고 아메리카노가 쓰기밖에 더하냐?]

[말 다 했어? 그럼 앞으로 커피 안 타 준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커피 마시는 법 알려 줄 테니까 그대로 따라 해 알겠어?]

[응!]

결국 그녀가 가르친 커피 마시는 버릇이 굳어져 버린 게 지금의 진하가 커피를 마시는 방식이었다.

‘그러고 보니 결국 막 마시는 건 못 고쳤지.’

향을 느끼고 바라보게 하는 것까진 어떻게 따라 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커피를 느끼는 법은 결국 못 따라 했다.

솔직히 말하면 향을 느끼고 바라보는 것도 그냥 버릇이 된 거지 실제로 느끼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진하에게 커피란 그저 카페인 섭취의 한 방법이었고, 그가 제일 선호하는 커피는 믹스커피였다.

“그러고 보니 커피 향을 느끼고 바라보는 방법 누구한테 배우셨어요?”

“아는 사람한테 배웠어요.”

“그래요? 신기하네요. 제가 커피 향을 느끼고 바라보는 방법이랑 많이 비슷하거든요.”

‘당연하지. 너한테 배웠으니까.’

이신혜의 말에 진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또 과거의 추억이 생각날 줄이야…….

‘그러고 보니까 이때쯤에 아직 살아 있던가? 살아 있는 거로 기억하는데?’

진하의 기억이 맞다면 아직은 그녀의 동생이 살아 있는 거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죽는 건 1차 게이트 폭주 직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저기 뭐 하나만 질문 드려도 될까요?”

“네. 어떤 거든지요.”

“혹시 외동이세요?”

진하의 질문에 그녀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순식간에 표정을 푼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세요? 호구조사?”

“아뇨, 그냥 뭔가 어른스러워서요. 외동은 보통 철이 없다고들 하잖아요. 그래서 남매나 자매가 있나 했죠.”

“네, 있어요. 동생이 한 명 있어요.”

“오, 많이 이뻐하시겠네요?”

진하의 질문에 그녀가 약간 슬픈 미소로 끄덕였다.

“많이 좋아하죠. 다시 뛰어노는 걸 보면 좋을 텐데…….”

“아, 동생이 혹시…….”

“많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여쭤봐서 죄송해요.”

“아뇨, 물어볼 수도 있죠.”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진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녀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애초에 그걸 위해서 모르는 척 물어본 거였으니까.

‘협회의 지원금 명목으로 도와주면 되겠지?’

그렇게 도와주면 진하가 도와준다는 걸 알지 못하게 몰래 도와줄 수 있을 듯했다.

‘그러고 보니까 빚도 있지 않나?’

그녀가 죽기 직전에 분명 빚이 있던 거로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훨씬 전이어서 지금도 있을지는 모르지만 확인해 봐서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저도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생각에 잠겼던 진하에게 이신혜가 말했다. 진하는 그녀의 물음에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얼마든지요. 어떤 거든 물어보세요.”

“왜 존댓말 하세요?”

“네?”

“정말 좋은 친구라면서요. 그런데 아직까지 존댓말을 하시니까요. 제가 불편한가 싶기도 하고 아니면 존댓말이 원래 편하신가 싶기도 하고, 궁금하더라고요.”

그녀의 말에 진하가 피식 웃었다. 확실히 그녀에게 의식적으로 존댓말을 하긴 했다. 혹시나 반말을 했다가 회귀 전처럼 대해 버릴 수가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그녀에게 실례되는 일을 하는 거기 때문에 계속 존대를 했었다.

‘뭐 가까워질까 봐 무섭기도 하고.’

“그냥 하는 거예요. 절대로 신혜 씨가 불편하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요?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며 진하는 저도 모르게 계속 미소가 지어지는 걸 억눌렀다. 확실히 이런 모습은 그가 아는 이신혜 그 자체였다.

“아, 불편한 거 아니면 저 부탁 하나 있어요.”

“뭐요?”

“반말하면 안 돼요? 저희 나이도 비슷하잖아요.”

“어…….”

“안 되나요?”

“아뇨, 돼요. 그냥 갑자기 이야기하셔서 살짝 당황해서 대답이 느렸네요.”

“다행이다! 그럼 이제 말 놔요!”

“어…… 그럴까?”

진하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사실 어색하지 않았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놓으면 그것도 좀 이상할 것 같아 매우 어색한 모습을 연기했다.

“너도 말 놔.”

“응, 알았어.”

진하의 말에 그녀 역시 말을 놓았다. 그녀는 말을 놓게 되니 뭔가 편한 듯 보였다.

“후, 그동안 불편했는데 살겠다.”

“그렇게 불편했어?”

“응, 생각해 봐. 나랑 엄청 친한 것 같고 모든 게 잘 맞는 사람이 존대하면 어색하지 않아?”

“그건 그렇지?”

“내가 딱 그랬어. 처음 봤을 때부터 모든 게 잘 맞았고 얘기하니까 금방 친해졌는데 이상하게 네가 말을 안 놓더라고.”

“하하, 미안.”

말을 놓지 않은 거야 일부러 그랬으니 당연하게 그렇게 들릴 만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도 당연히 잘 맞을 수밖에 없었다. 개그 코드나 취미, 그녀가 좋아하는 이야기 등을 당연하게도 진하는 알고 있었고, 그걸 그녀와 얘기할 때 사용했으니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까. 유럽에서는 어땠어? 많이 힘들었어?”

“아냐, 많이 안 힘들었어. S급 헌터들이 다해서 내가 한 건 별로 없었어. 그러고 보니까. 독일 음식은…….”

진하는 그녀와 이야기하면서 뭔가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하예진과 이야기할 때와는 또 다른 편안함,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만, 딱 오늘만 이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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