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갑작스런 잡아당김에 진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엘리사가 진하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놀아 줘. 연기 잘했잖아.”
“또?”
진하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분명 그가 연기를 잘하면 다 끝난 이후에 놀아준다고 약속은 했었다. 실제로 몇 번이고 놀아줬었고.
그런데도 또 놀아달라니…… 애정결핍이 심하다는 건 알았지만 진하 외에는 딱히 다가가지 않는 걸 생각하면 이건 정도를 조금 많이 넘어선 것 같았다.
“하하, 미안해요. 한국에 가면 진하 씨가 바쁘니까 다가가면 안 된다고 언질을 줬는데 또 이러네요.”
“아뇨 재희 씨,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놀아주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요. ”
“그래도 이상하게 진하 씨에게 붙어 있으려고 해서요.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뭐, 인기 많으면 좋은 거죠. 그나저나 엘리사, 같이 놀자고?”
진하의 물음에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하를 놓치기 싫다는 듯 꽉 잡는 손, 진하는 어쩌면 그녀가 단순한 애정결핍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8살이라…….’
18살의 고등학생 정도의 소녀, 어쩌면 분리불안 장애의 일종일 수도 있었다. 특히, 어떤 부분에서는 원래의 나이보다 정신 연령이 어렸다.
그렇다면 어린 나이에 헌터 일을 하면서 죽은 동료들을 분명 많이 보면서 그렇게 될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진하는 어릴 때부터 헌터 일을 하면서 이런 식으로 트라우마성 장애를 가지게 된 사람들을 본 적이 몇 번 있었다.
‘근데 왜 나일까?’
정확히 분리 불안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진하에게 집착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진하에게만 특히 많이 집착하는 것일까?
“안 바쁘면 저희랑 뒤풀이나 좀 하시죠?”
재희가 진하의 생각을 끊으며 말했다. 곧바로 진하에게 팔짱을 낀 재희는 하준수를 보며 물었다.
“리더도 갈 거야?”
“난 됐다. 너희끼리 알아서 놀아라.”
하준수는 그 말과 함께 곧바로 공항 쪽으로 걸어갔다. 진하는 그런 하준수와 재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 좋은데 둘의 치정 싸움에 나를 끌어들이지 말래요?”
“미안하지만 치정 싸움 아니에요.”
“재희 씨가 저한테 이런다고 길드장이 질투하겠습니까? 저 무뚝뚝한 사람이? 그냥 고백하시죠?”
“까였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에요.”
재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음, 벌써 까였나?’
재희의 말에 진하가 곰곰이 하준수에 대해 생각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준수도 재희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안 받아 주는 걸까?
“왜 까였어요?”
그 이유를 알 수 없기에 진하가 곧바로 재희에게 질문했다.
“참, 아픈 곳을 아무렇지 않게 후벼파시네요.”
“그러길래 누가 저 이용하랍니까?”
“하아, 자기는 할 일이 있다고 거절했어요.”
“흐음, 대충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유는 알겠네요.”
“진짜요? 뭔데요?”
진하의 말에 재희가 눈을 반짝이며 진하에게 붙었다. 진하는 바짝 달라붙은 재희를 밀어내며 말했다.
“아마도 몬스터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미쳐 있어서 그런 걸 거예요.”
하준수의 신념에 대해서 이미 어느 정도 들은 것이 있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몬스터에 대한 분노가 원동력인 사람이 사랑에 신경 쓸 새가 있을 리 없었다.
하물며 스킬을 각성했다는 것 자체가 신념이라는 것에 주박이 씌워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뭘 더 말하겠는가.
‘흐음, 그렇다고 스킬 하나로 저렇게 신념에 잡아먹힐 정도는 아니긴 하지만 말이야.’
스킬을 하나 각성하는 정도의 신념에 저 정도 반응을 보이는 건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물론 스킬 각성하는 것 자체가 강한 신념을 보이는 것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건 그냥 과민 반응일 뿐이었다.
‘몬스터에 대한 분노 외에는 아무것도 안 가지려는 건가?’
어쩌면 스킬을 더 각성시키려고 일부러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긴 애초에 S급 몬스터를 거의 1대 1로 잡았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다. 잡은 원리야 하준수에게 들어 알 수 있긴 했지만 사람이 할 짓은 아니었으니까.
“흠, 근데 굳이 저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진하가 재희에게 물었다. 까놓고 말하자면 하준수는 현재 어떤 면에서는 광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그 어떤 사람이 몬스터와 싸우기 위해 몸을 초 단위 이하로 부수면서 싸우겠는가? 죽음을 경험하면서 싸운다는 것 자체가 정상인이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니었다.
“저 사람밖에 없어요.”
단호하게 대답하는 재희, 진하는 그런 재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러면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될지는 모르지만 아마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일 거예요. 일단 알려는 주는데 제가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니거든요? 듣고 아니다 싶으면 그냥 포기하세요.”
진하는 재희에게 하준수를 꾀어낼 방법을 알려 주었다. 진하의 말이 계속될수록 얼굴색이 변해 가는 그녀.
“아무튼, 전 방법을 알려 줬으니 이제 저는 끌어들이지 마시고요.”
진하가 재희의 손을 완전히 떼어 내며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엘리사를 보며 말했다.
“리사야. 정말 미안한데. 오늘은 힘들어서 그런데 나중에 같이 놀까?”
진하의 말에 엘리사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진하는 그런 엘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대신 그때는 진짜, 진짜 재밌고 많이 놀아 줄게.”
진하의 말에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팀원 중 한 명에게 달려갔다.
‘이것도 법으로 제정하자고 해야겠네.’
싸울 수만 있으면 나이에 상관없이 헌터 일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물론 능력 각성한다면 나이와 상관없이 신체 자체는 일반인보다 뛰어난 게 각성자였지만 그렇다고 그 각성자들이 정신적으로 단단한 건 아니었다.
“이거 아무래도 법 제정이 필요하겠네요.”
진하와 같은 생각이었던 걸까? 송준하가 저 멀리서 팀원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엘리사를 보며 말했다.
“네, 그래야죠. 몬스터가 나타나고 게이트가 생긴 게 벌써 10년이 한참 넘었어요. 사실 지금도 많이 늦은 거죠.”
지금까지는 헌터라는 직업을 제정하고 일반인들 사이에서의 각성자들의 처우와 인식을 바꿔 왔다면 이제는 각성자들을 위한 법을 만들 때였다.
“그건 저한테 맡기세요. 그나저나 저는 이제 진짜로 빠져야겠네요. 진하 씨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송준하가 그 말과 함께 한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송하나가 팔짱을 낀 채 진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특히 그녀의 눈길이 송준하에게 닿을 때면 그 눈빛의 강도는 더욱 강해졌다.
“고생하세요. 전 먼저 차량 쪽에 있겠습니다.”
송준하가 재빠르게 공항으로 도망갔다. 진하는 한숨을 내쉬며 다가오는 송하나를 바라보았다.
“왜 왔어.”
“그거야 알려 줄 것도 있고 얘기할 것도 있고?”
“그건 부하들 시켜서 말하면 되는 거 아냐? 애초에 그렇게 여유 있는 자리가 아닐 텐데?”
“뭔데? 뭐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건데?”
“이기수.”
진하의 말에 송하나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진하는 그걸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랬어. 왜 기수한테 그런 정보를 넘긴 건데.”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어.”
“하아, 그 사람은 동료 아냐? 뭘 그렇게 감싸고 도는 건데. 당신이 다 떠먹여 줄 건 아니잖아.”
“각자의 역할이란 게 있어. 그리고 그 부분은 이기수가 몰라도 되었던 부분이고.”
진하의 말에 송하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이번에 내가 독단으로 행동한 건 사과할게. 하지만 난 어디까지나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한 거야. 이기수는 너무 물렁해. 분명 그대로 뒀으면 암살이 아니라 송환을 했을 거야.”
“나도 알아. 네가 말한 부분이 뭔지도 알고 그러니까 그냥 너한테 이러는 정도로 끝내는 거야.”
사실 굳이 얘기 꺼낼 것도 아니었다. 이미 유럽에서 이기수와 얘기 나누면서 정리한 이야기니까. 이기수는 그녀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고마워했었다. 덕분에 정신적으로 좀 더 성장한 것 같다고.
“에휴, 아무튼 내 주변에 내 말을 듣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난 말 잘 듣는 편인데?”
“일단 우리 집으로 안 오고 나서 그런 말 하면 안 될까? 그나저나 내가 맡겼던 일은 잘하고 있어?”
진하의 말에 송하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더욱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 일단 하예진은 아예 전문 팬클럽이 생겼어. 가입자만 10만이 넘어갔고, 아마 지금도 게이트에서 홍보 영상 찍고 있을걸? 그리고 협회의 이미지도 좋아지고 있어.”
“너는?”
“나는…… 팬클럽 8만에 지금까지 훔친 물건들은 돈으로 잘 환전해서 어려운 계층에게 썼어.”
“역시 맡기길 잘했어, 도적 소녀.”
진하는 부끄러움에 송하나의 귀가 까딱이는 걸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역시 싫다고 말해도 맡긴 일 하나는 잘 해결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제 뭐 할 거야? 할 거 없으면 같이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안 돼. 할 일 있어. 그러니까 저녁을 먹는 건 다음에 하자.”
“하아, 이제 좀 그만 좀 튕기면 안 돼?”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송하나의 말에 진하도 한숨을 내쉬었다. 튕기는 게 아닌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나만 우리 확실하게 정하고 가자. 미안하지만 나는 너에게 튕긴 적이 없어. 그리고 너 안 좋아해.”
“거짓말.”
“진짜야.”
“그런 사람이 평소에 그렇게 다정하게 대하나? 비즈니스라기엔 너무 대하는 게 여우였는데? 그렇다고 네가 여우 과인 것도 아니고.”
그녀의 말에 진하가 침음성을 흘렸다. 확실히 그 부분은 진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녀를 죽였든 어쨌든 정을 줬던 인물이기에 바뀐 모습을 보면서 잘 대해 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건 내가 사과할게. 하지만 확실하게 말하지만 난 너랑 사귈 생각이 없어.”
“바로 결혼해도 되는데?”
“그것도 안 한다는 소리야.”
“나도 알아. 네가 누구한테 마음이 있는지 정도는.”
“알면서 그러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미안하지만 네가 내 마음을 가져갈 확률은 10퍼센트도 안 돼.”
“오, 높네? 1퍼센트 미만일 줄 알았는데.”
그녀의 말에 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게 얘기만 하면 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송하나는 빙긋 웃으며 진하에게 말했다.
“그거 알아? 나 블랙 길드인 거.”
“당연한 소리를 왜 얘기하는 거야?”
“블랙 길드 수장들은 대대로 같은 소속끼리 정략결혼을 하거나 아니면 결혼을 안 했어.”
“그래서?”
“대신 양자를 들이거나 아님, 우수한 유전자의 씨만 취하거나 아이만을 낳게 했지.”
그녀의 말에 진하는 순간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뭐, 정실이 아니어도 좋아. 적당히 내연녀 정도로 해 둘까?”
송하나가 진하의 가슴을 톡톡 건드렸다. 진하는 그녀의 말에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내연녀라니…….
“미안한데 한국은 일부일처제란다. 그리고 나는 바람을 필 생각도 없고.”
“그건 걱정 마. 하예진이야, 내가 알아서 구슬리면 되니까.”
“하지 마, 제발. 부탁할게.”
“쿡, 장난이야.”
송하나의 미소에 진하는 그제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리 찜찜하지.’
“아무튼, 나는 진짜 일 있으니까. 먼저 간다.”
진하는 그 말과 함께 공항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송하나가 진하의 팔을 붙잡았다.
쪽!
“이건 지금까지 내가 잘했으니 상으로 받아 간다.”
진하가 입술이 닿은 볼을 어루만졌다. 살기가 없어서 안 피했는데 설마 이럴 줄이야…….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아무리 내연녀라도 3번째는 싫다? 그 여자를 들이더라도 내가 2번째야.”
“뭐, 뭔 소리야!”
당황한 진하가 소리쳤다. 송하나는 그런 진하에게 빙긋 웃어 주었다.
“이신혜, 틀렸어? 아무튼 난 먼저 간다. 아 맞다, 그리고 이건 여자의 질투 겸 너의 안전을 위해서 그 여자 뒷조사 좀 할게?”
진하는 천천히 멀어져 가는 송하나를 멍하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