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82화 (82/202)

#082

“왔나?”

둘을 처음 본 시안이 제일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얼굴은 하얗다 못해 거의 새하얀 백지인 게 아무리 봐도 정상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끼이익―

문이 닫히고 이제는 완전히 시안과 진하, 레이나만 남게 되었다. 그러자 오만하게 있던 시안의 입에서 약간의 피가 흘러나왔다.

“몸이 안 좋아 보이네. 부하 앞이라 참고 있었던 건가?”

“뭐, 내 대부분의 힘을 가진 분신이 죽었으니까. 하지만 그뿐이다. 문제는 없지. 그러고 보니 너는 그때의 거대한 새의 주인이군.”

진하를 알아본 시안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게이트의 보스답지 않게 적의를 띄우고 있지 않았다.

“예상외로군.”

“뭐가 예상외라는 거지?”

“몬스터가 덤벼들지 않는 게 의외라는 거.”

레이나의 말에 시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그런 저급한 몬스터들과 같은 느낌으로 바라봐 주지 말게나. 물론 나도 인간을 죽이고 싶다는 충동은 느끼지만 나 정도 되면 그런 본능을 억제할 수 있다네.”

“억제할 수 있으면서 인간은 왜 공격한 거지?”

“본능이니까. 굳이 막을 이유는 없지. 지금이야 어차피 덤벼도 이기지 못하는 걸 아는데 굳이 본능에 이성을 맡겨서 싸우고 싶지 않은 거고.”

시안의 말에 레이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고작 본능 때문에 인간을 죽인다는 소리에 레이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진하는 그 모습을 보고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떤 기분인지는 아는데 몬스터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요. 그냥 무시하는게 낫죠. 그리고 나와 한 약속은 잊지 않았겠죠?”

“……알고 있어요.”

“그럼 됐어요.”

레이나를 토닥인 진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거기 시안, 미안한데 뭐 좀 물어봐도 되나?”

“얼마든지. 승자는 패자에게 질문할 권리가 있지. 그나저나 너는 참 신기한 존재로군. 있을 리 없는 로드의 향기가 느껴져.”

“로드? 너 로드의 존재를 알고 있나?”

“알다마다. 알기 때문에 나를 대공이라 부르는 것이고, 로드가 되려 하는 것이지.”

“하지만 비앙카는 모르던 것 같던데?”

진하의 말에 시안이 코웃음을 쳤다.

“비앙카? 그 되다만 존재를 말하는 건가? 아무리 같은 대공이라고 불린다지만 비앙카 같은 존재는 그저 햇병아리일 뿐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지.”

“그럼 로드의 존재는 너만 알고 있는 거냐?”

“아니, 이슬라도 알고 있지. 이슬라,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또 다른 뱀파이어 대공이다.”

“알고 있어. 그러니 그건 넘어가고, 그럼 어째서 로드가 되려는 거지?”

로드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면서 로드를 칭하고 로드가 되려 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적어도 대공이라는 존재는 똑똑한 편일 텐데 그럼에도 되지 못하는 존재를 추구하는 건 진하가 생각해도 이상했다.

“큭, 당연한 걸 묻는군. 이 세상에는 로드가 없다. 그럼 결국 강한 존재가 로드가 되는 거 아니겠나? 다른 대공들을 흡수하고 로드가 되는 것, 그게 우리의 목적이지. 나 역시 하나 묻겠다. 너는 이 세상에 없는 로드의 향을 어떻게 가지고 있지?”

“로드의 정신이 내 안에 있으니까.”

“큭, 로드가 인간의 안에 있다니 어처구니없군. 인간, 혹시 로드를 부를 수 있나?”

“글쎄,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라서 말이야.”

진하라고 정신 속에 있을 로드의 사념을 안 만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다만 있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념과의 접촉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이봐, 로드. 듣고 있죠? 네 종족이 로드를 만나고 싶다는데 그냥 이대로 있을 거예요?”

진하가 허공에 대고 얘기했다. 그 모습을 레이나가 이상하게 바라보긴 했지만 진하는 무시한 채 자신의 정신에 집중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너의 로드는 너를 만나…….”

[잠시 주도권을 넘겨줄 수 있겠는가?]

“허, 평소에는 불러도 아무런 대답도 없었으면서.”

[미안하네. 하지만 사념이다 보니 정해진 총량이라는 게 있네. 함부로 얘기하고 그럴 순 없어서 그런 거네.]

“얘기하고 싶은 거죠?”

[…….]

“좋아. 주도권을 넘겨줄게요. 대신 나에게 빚을 졌다는 걸 알고만 있으라고요.”

[야박하군.]

진하는 로드가 뭐라 하든 무시했다. 로드는 그런 진하를 잠시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진하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진하는 로드의 말에 따라 정신을 안정시키며 안쪽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그렇게 진하의 정신이 가라앉고.

“흠, 흠…… 이 몸은 역시 익숙하지 않군.”

“로드군. 향이 짙어졌어.”

“로드는 아니라네. 정확하게 로드의 사념이지.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뭐지?”

시안의 말을 정정한 로드가 물었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로드 당신도 없고, 이곳에서 묶인 채 왜 살아가야 하는 거지?”

“너의 존재 이유를 묻는 거냐?”

“그래, 항상 생각해 왔지. 나는 왜 묶여 있는가, 그리고 왜 이런 본능을 가지고 있는가 하고 말이야.”

시안의 말에 로드는 슬픈 얼굴로 시안을 바라봤다. 모든 존재가 그의 피로부터 시작되었기에 로드는 고뇌하는 시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묶인 이유는 가짜이기 때문이다.”

“가짜?”

“그래, 나의 피로부터 태어났으나 묶여서 조정받는 꼭두각시. 그게 너이지.”

“그럼, 우리는 영원히 이렇게 살아가고 죽어야 하는 존재인가?”

“아니, 삶은 꼭두각시일지라도 죽은 뒤에는 자유를 찾을 것이다. 죽은 뒤에도 꼭두각시로 사는 건 로드인 내가 용서하지 못하거든. 좋든 싫든 너는 내게서 태어난 존재니까.”

“그런가…… 자유라…… 정말로 그럴 수 있으면 좋겠군.”

“길게는 얘기하지 못하지만 이것 하나는 말해 줄 수 있다.”

“뭐지?”

“적어도 너는 뱀파이어 대공으로서의 품격을 아주 잘 이행했구나. 잘했다.”

로드의 칭찬에 멍하니 있던 시안이 아주 작게 웃었다. 대공으로서 군림해 왔던 그에게 칭찬을 하는 존재라니, 자존심이 상해야 했는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시안에게 있어 너무나 생소하고도 이질적인 감정이었다.

“뭐, 그렇대.”

제한 시간이 끝난 것인지 다시 원래의 주도권을 찾은 진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인간을 죽이는 몬스터의 입장 따위 솔직히 그에겐 아무 생각 없었지만, 주도권을 넘기고 사라진 로드의 잔여 감정은 진하의 가슴을 약간이지만 찡하게 만들었다.

“고맙군, 인간. 너의 질문은 뭐든지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도록 하지.”

“아니, 뭐 질문할 건 이제 하나밖에 없어. 하나가 로드에 대한 거였으니까.”

진하가 질문하려던 질문 중 하나는 정신 속에 잠들어 있던 로드의 사념을 깨우는 방법이었는데 의외의 방법으로 사념이 깨어났기에 이 부분은 더이상 물을 필요도 없었다.

“하나만 더 질문할게. 이슬라의 고유 능력 그건 뭐지?”

“생명이다.”

“생명?”

“그래, 그는 한 번 죽더라도 다시 살아나지. 이걸로 모든 질문은 끝났나?”

시안의 질문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은 그런 진하를 보며 추가로 입을 열었다.

“하나 더, 이슬라를 조심해라. 그와 나는 비슷할 정도의 무력을 가졌지만, 어찌 보면 나보다 더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한 존재다. 이슬라를 안다는 건 만나 보고 성공적으로 도망쳤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이슬라는 너를 지독하게도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

“충고 고마워.”

“자, 그럼 이제 죽여라. 그리고 내가 죽어도 뱀파이어들은 너희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시안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비록 재가 될지라도 왕으로서 그는 마지막까지 위엄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레이나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면서 불의 검을 생성해 냈다.

“예의 그 검이로군. 예우를 해 주는 건가?”

“몬스터 따위에게 예우는 없어. 그저 최선을 다할 뿐.”

푸욱!

그 말과 함께 레이나의 백색 검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리고 잠시 미소를 짓던 시안은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졌다.

“뭔가 뒷맛이 찝찝하군요.”

검을 없앤 레이나가 진하를 보며 말했다. 진하 역시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분명 인류를 위협하는 적이었고, 몬스터였다. 하지만 그런 보스의 최후치고 너무나도 그는 당당했으며 자신감 있게 죽었다.

“뭐, 어쨌든 몬스터를 죽였으니 된 거죠.”

진하가 여전히 찝찝해하는 레이나를 다독였다. 찝찝하긴 하지만 어찌 됐든 끝난 일이었다. 끝난 일을 가지고 계속 찝찝해하는 건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

“그렇죠. 그러고 보니 일도 모두 끝났는데 당신은 그러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레이나의 질문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한국으로 돌아가야죠. 더 이상 이곳에는 할 일이 없을뿐더러, 언제 제1 게이트가 터질지도 모르니까요.”

“혹시나 해서 묻습니다만 우리 독일에 귀화할 생각 없나요?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아티팩트만을 매우 높게 평가하는 것 같지만 그것과 별개로 전 당신 자체도 매우 귀한 인재라고 생각합니다.”

“미안하지만 그건 거절하도록 하죠. 제 모든 것이 한국에 있거든요.”

진하의 대답에 레이나가 피식 웃었다. 애초에 될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단호한 대답이라니…….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적어도 독일은 한국에게 빚을 졌어요. 물론 저의 능력 밖으로는 도와줄 순 없지만, 일이 생긴다면 최대한 도와드리도록 할게요.”

“그건 고맙게 받도록 하죠.”

* * *

일주일 뒤 한국.

“어서 오세요, 여러분.”

정식으로 협회장이 된 송준하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진하 일행을 맞이했다. 진하는 그런 송준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요. 어차피 당신이 협회장이 될 거라고 했죠? 늦었지만 축하합니다, 준하 씨.”

“이렇게 된 이상 열심히 해야죠. 바로 집으로 가실 건가요?”

“가야죠. 그전에 제가 가기 전에 말씀드렸던 것들은 고쳤나요?”

“네. 게이트 폭주를 대비한 모든 경계 준비는 모두 완료됐습니다. 진하 씨의 도움이 컸어요.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만들었는데 설마 그런 방법으로 허점이 드러날 줄은 몰랐거든요. 대단하시네요, 진하 씨는.”

송준하의 감탄에 진하가 쓰게 웃었다. 진하가 그 사실을 아는 이유는 똑똑해서가 아니었다. 회귀 전 협회가 만들었던 경계 시스템이 게이트 2차 폭주 때 뚫렸기 때문에 그 부분을 지적해 준 것뿐이었다. 즉, 그냥 경험에 의한 조언이었다.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아는데 그것조차도 대단한 겁니다. 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어도 보통 사람은 쉽게 넘어가는 부분이니까요.”

송준하의 말에 진하가 더욱 쓰게 웃었다. 송준하에게도 미래를 본다고 알려 주긴 했지만 실제로 미래를 본 게 아니었으니까.

“송준하 씨 혹시 제가 과거로 돌아온 거. 즉, [회귀]한 거 아시나요?”

“죄송하지만 못 들었습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역시나 회귀에 관련된 것은 모든 게 여전히 먹통이었다. 진하는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송준하를 보며 다급히 주제를 돌렸다.

“별거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랭크가 어떻게 되세요?”

“저는 이제 B 랭크입니다. 진하 씨가 알고 있다는 미래보단 아직 못하죠?”

진하는 송준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분명 미래에 그가 알고 있던 송준하보다는 못하다. 하지만 그거야 직접 각성을 한 게 아니라 진하에 의해 각성 당해서 그런 것이다.

애초에 정의관철은 신념이 강해야만 더욱 증폭되는 능력, 아무리 환상을 이용해 계기를 마련해 줬다고 해서 그게 직접 겪은 것보다 강렬할 리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송준하의 가치는 단순히 무력이 아닌 그의 수완이므로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 그게 할 이야기의 끝인가요?”

진하의 물음에 송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러분을 맞이하러 온 거니까요.”

“협회장인데?”

“여러분은 협회의 주축이시고요.”

송준하가 진하의 말을 너스레 떨며 받았다. 뭔가 진하가 아는 회귀 전의 사람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뭐,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야 저희야 감사하죠.”

“별말씀을요. 자, 그럼 이제 가시죠. 집까지 저희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네.”

쿡쿡.

그때, 송준하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기려던 진하를 누군가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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