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80화 (80/202)

#080

진하에게 말한 것은 레이나였었다.

“네?”

“미사일을 요격해 줘서 고맙다.”

레이나의 말에 진하가 피식 웃었다.

“고마울 것까지 있나요? 그리고 저격은 이기수가 했습니다.”

어차피 모두가 함께 싸웠고, 함께 이겨낸 전투였다. 누구에게 고마움을 받고 말고 할 게 없었다.

“그래도 고맙다. 모든 헌터들에게 고맙지만, 특히 너희들에게 고마워, 너희들이 아니었으면 더 큰 피해가 있었을 거다.”

레이나는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그녀의 입장에선 둘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둘이 변신 능력자를 이용해 이기수를 빼돌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해도 끔찍했다. 분명 몬스터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피해가 일어났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을 향해 떨어지는 핵폭탄을 막아 준 것에 감사했다. 공중에서 폭발한 규모로 보아 만약 터졌다면 이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할 게 분명했으니까.

“뭐, 그건 뒤로 미뤄두고 우선 뒤처리부터 하죠. 아직 할 일 많이 남았으니까.”

“물론이지.”

* * *

2일 후, 진하를 비롯한 각국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중앙에서 레이나는 그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말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 타국을 비난하지는 않겠습니다. 뱀파이어가 유럽 연합 깊숙이 숨어있을 거라곤 저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레이나의 말에 재빠르게 헌터들을 뒤로 물렸던 국가의 각 대표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유럽 협회에 속한 이들에게 몇 가지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뭘 하신 겁니까?”

“그게…….”

“뱀파이어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의 무능함으로 인해 벌어진 일입니다. 애초에 핵은 협회와 정부 둘의 공동 승인하에 쏘아지는 거 아니었나요? 거기다가 일반인들이 있는 상황에서 탈환 계획은커녕 바로 미사일부터 날릴 생각을 하는 게 정상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레이나의 말에 유럽 협회에 속한 대표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어리석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특히, 김준태가 부협회장이 된 것에 많은 비리가 있더군요. 단순히 뱀파이어의 세력이 불어나면서 부협회장이 된 건 아니더라고요.”

레이나에게서 나오는 기운이 점차 흉흉해졌다.

“게이트를 헌터들이 막는 동안 그 외적으로 실무나 정책을 만드는 게 협회의 일 아니었습니까? 지금까지는 헌터와 협회 간에 공적으로 각자 맡은 바가 있어 터치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저를 포함한 몇몇이 헌터들의 대표로서 협회의 일에 참여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서로의 영역 침범이 아닙니까?”

프랑스 대표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럼 그 영역을 제대로 지키셨어야죠. 애초에 지금 이렇게 돼서 가장 피해를 입은 게 누굽니까? 일반인하고 헌터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헌터들이 뱀파이어를 놓쳐서 일어난 일 아니오?”

영국 대표가 프랑스 대표를 옹호하며 말했다.

“제가 지금 뱀파이어에 협회가 넘어가서 이런 말을 하는 거로 보입니까? 제가 말한 부분은 협회의 썩은 부분입니다. 어떻게 뱀파이어들이 세력을 넓힐 동안 뇌물을 쳐 받아먹고 넘어가거나 형식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죠? 그러고도 협회의 간부직에 앉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나요?”

“큼, 그 부분은 우리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하는 건…….”

영국 대표의 말에 다른 대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협회의 잘못이 크다고 한들 이렇게 멋대로 진행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제가 지금 여러분을 설득하는 거로 보이십니까?”

“그럼 지금 통보라도 한다는 소리인가?”

레이나의 말에 한 대표가 발끈하며 소리치자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협박입니다. 저희의 간섭이 싫으시다면 저를 포함한 유럽에 속하는 S급 이상의 헌터들은 따로 단체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반대로 묻죠. 그쪽은 자신이 있으십니까?”

레이나의 말에 모든 대표들이 입을 다물었다.

현 상황은 어느 정도 진정됐다곤 하지만 아직 게이트 폭주도 끝나지 않은 상황이고, 심지어 숨어든 뱀파이어를 모두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레이나를 포함한 고위 헌터들이 따로 단체를 만든다는 건 기존의 협회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들이 협회를 나간다면 다른 헌터들도 그들을 따라 나갈 게 분명했으니까.

‘이래서 등급이 깡패지.’

옆에서 회의를 지켜보던 진하가 속으로 유럽 협회를 비웃었다.

현시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산은 힘이었다. 그런 점에서 S급 이상의 헌터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현 체재를 지키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누가 뭐라 해도 그들의 조국은 유럽이었으며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약간의 손해를 감소했던 거니까.

그런데 이번 일을 통해서 그 무능력함이 드러났으니 없어져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확실히 단합되긴 했네.’

한국과는 달리 원래 유럽 협회는 헌터보다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 S급이 한 명이어서 최상위 헌터를 대함에 있어 조심스러웠던 한국과는 달리 어느 정도 막 대하기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S급 이상의 헌터가 여러 명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파벌을 만들어 헌터들을 서로 대립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사태로 인해 나뉘었던 파벌이 하나로 뭉쳤다. 이 또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럼 승낙한 거로 알겠습니다.”

통보를 마친 레이나는 계속해서 다음 안건들을 꺼내놓았다. 사망한 헌터들에 대한 보상부터 몬스터의 사체 처리 등, 수많은 안건이 빠르게 내놓아졌고 의결되었다.

‘레이나…….’

진하는 안건을 진행하는 내내 레이나를 주시했다. 시안을 죽여 결론적으로 이 전투를 끝낸 영웅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회귀 전에도 분명 레이나는 존재했다. 그리고 시안도 잡혔다. 하지만 진하가 알기론 협공을 통해 잡은 거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레이나는 그런 시안을 너무나 쉽게 잡았다.

‘정말 SS급인가?’

물론 같은 등급에서도 편차가 나뉘는 편이다. 당장 갓 SS급이 된 이기수는 8명 중에 최약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이 안 됐다. SS급의 무력이 최소 S급 보스와 동급 또는 그 이상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쉽게 잡을 수 있는 건 말이 안 됐다.

‘후, 모르겠다.’

진하는 고개를 저어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내었다.

회귀 전과 다른 게 너무 많았다. 그게 진짜로 바뀐 것인지 아니면 진하가 몰랐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변수가 너무 많았다.

“자, 마지막 안건입니다.”

진하가 딴생각을 하는 사이 안건은 어느새 마지막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마지막 안건은 공략대의 구성입니다.”

레이나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는 대표들, 레이나는 대답에 신경 쓰지 않고 마저 말을 이어갔다.

“알다시피 개체명 시안이라는 보스 몬스터는 잡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본체는 아니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따라서 게이트 8층 그 이하에 존재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시안을 잡기 위한 공략대를 다시 구성할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게이트 폭주를 완전히 끝내기 위해서는 시안을 완벽하게 죽여야 했다. 물론 분신을 잡아서인지 현재 게이트 내에 나오는 몬스터의 양은 극도로 적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게이트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시안을 잡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 공략대는 당연하게도 S급 이상의 헌터를 절반 정도 남겨 둘 생각입니다.”

이미 한 번 당했던 전적이 있었다. 물론 해결한 이후이기에 더 이상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라고 조심해서 나쁠 것도 없었다.

아니, S급 한 명을 제외한 모든 S급 이상의 헌터를 공략대로 밀어 넣는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쯧, 그러게 작작 받아 처먹지.’

진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헛기침만 내뱉는 대표들을 보며 혀를 찼다. 저들은 누가 뭐라 해도 이 사태를 만든 주범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당연하게도 공략대는 모든 국가가 공평하게 헌터를 나눠 참여할 겁니다. 이의 있으십니까?”

‘강하게 안 밀어붙이네?’

진하는 의외로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레이나를 보며 의문을 느꼈다. 그들로 인해 피해 입은 걸 생각하면 당연하게도 유럽 헌터들 중 독일을 제외한 타국 소속의 헌터의 비율을 높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 설마 자기 탓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공략대가 구성되고 진행됨에 있어 레이나는 한 치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협회가 알아서 어련히 잘하겠지 하고 몬스터를 잡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거기다가 진하가 7층에 팀을 나누자고 했을 때도 거절했었으니 어쩌면 저 반응은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흠, 그래도 너무 양심적인데?’

그녀가 어떻게 행동했든 결국 이 사태를 만든 주범은 아니었다. 그저 방관자에 불과할 뿐이지. 그럼에도 저렇게 죄책감을 느끼는 걸 보니 누군가가 떠올랐다.

‘이기수 과네.’

착하다 못해 호구 같은 기질이 있는 게 딱 이기수 과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초기의 이기수보다는 조금 더 단호하다는 거?

‘아무튼 대충 마무리된 건가?’

진하는 마무리되어가는 회의를 보며 몰래 기지개를 켰다. 사실 말이 좋아 회의지 거의 레이나의 원맨쇼나 다름없었다.

일반인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다른 나라의 협회 또는 대표들은 레이나의 의견에 토를 달기 힘들 테니까 말이다.

‘으, 드디어 끝이다.’

진하는 이 자리를 맡기고 도망간 이기수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게이트를 넘어온 몬스터를 처치해야 한다면서 도망간 이기수가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게이트를 넘어온 몬스터가 극단적으로 줄어든 상태라 이기수가 갈 필요도 없는데 굳이 간 것은 아마도 그 역시 이 자리가 매우 지루해질 것이라는 걸 예상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럼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레이나의 말이 끝나자 각 나라의 대표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자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모두들 불만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그들은 알든 모르든 뱀파이어의 매수에 넘어갔거나 일반인들을 버리고 후퇴하라 명령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자, 이제 나도 내 할 일을 할까?’

이 지루한 회의를 들으려고 진하가 굳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 뭐라 해도 일단 한국은 책잡힐 만한 짓을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일반인을 버리지 않은 헌터들이 주였으니까.

그래서 오늘과 같이 거의 질책 겸 공략과는 거의 상관없는 회의를 진하가 굳이 참여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진하가 이기수처럼 도망치지 않고 참여한 이유는 하나, 레이나를 통해서 확인과 부탁할 것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할 말 있으신가요?”

모두가 나가고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를 정리하던 레이나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있는 진하를 보며 물었다.

“예, 뭐 물어볼 것도 있고, 부탁할 것도 있어서요.”

“혹시 얘기가 길어질까요? 그럼 제 사무실로 가서 얘기하는 건 어떠신가요?”

“아뇨, 그리 긴 건 아니에요. 한 10분? 회의도 예정보다 빨리 끝났고, 여길 치우러 오는 사람도 오려면 멀지 않았나요?”

진하의 말에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보안을 위해서 회의가 끝나고 사람이 들어오는 건 30분이나 뒤였다.

“그럼 편하게 질문해 주세요. 극비 사항만 아니라면 어떤 것이든 대답해 드리죠.”

레이나에게 한국은 고마운 나라였다. 그녀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준 것이 진하였고, 그녀가 도착할 때까지 사람들을 위해 싸워준 게 이기수였다.

설사 다른 의도가 깔려있다 해도 그들은 그녀의 조국을 구해준 사람들이었기에 레이나는 되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대답해주고 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러면 편하게 질문할게요. 여러 가지가 있긴 한데 우선 가벼운 것부터. SS급 아니시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