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시작은 이기수로부터 시작됐다. 시안이 준 마지막 5분, 그 5분간 이기수가 모았던 전격은 커다란 그물을 만들며 뱀파이어들에게 떨어졌다.
“이까짓 것.”
“약하군.”
시안의 곁에 있던 고위 뱀파이어들은 이기수가 쏟아낸 전격을 쉽게 찢어발겼다. 하지만 그 외, 약한 뱀파이어들은 이기수의 전격을 피할 수 없었다.
후드득, 후드득.
마치 비처럼 쏟아지는 사체들, 대충 눈대중으로 확인해 보아도 천 마리 이상은 떨어진 듯했다.
“과연 아버지께서 탐내실 만해.”
강하게 한 방 날린 이기수 곁으로 모여드는 뱀파이어들. 하나같이 모두 상위 S급으로 이루어진 뱀파이어들 이었다.
“하하, 이렇게 와주면 나야 고맙지.”
이기수는 죽을 위기에 처했음에도 환하게 웃었다. 뱀파이어 중 상위권에 해당하는 존재들이 대부분 이기수에게 몰렸다. 그렇다는 건 다른 헌터들에게 상위권 뱀파이어들이 더욱 적게 간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이기수는 너무나 기뻤다. 적어도 헌터들이 한 마리라도 더욱 죽이고 덧없이 죽진 않는다는 소리니까.
“어리석어. 어째서 도망치지 않는 거지?”
이기수를 둘러싼 뱀파이어 중 한 명이 물었다. 그는 죽을 위기에 처했음에도 기뻐하는 것과 처음에 심력을 낭비하면서까지 대규모 공격을 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 힘을 이용하여 도망쳤다면 1%라도 성공적으로 도망갈 확률이 높았을 텐데.
“뭐, 몬스터 따위에게 이해를 바라진 않아.”
이기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뱀파이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어쩌면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바로 그의 가치관이었으니까.
‘이제야 이해가 좀 되네.’
SS급이 되었음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게 조금은 이해가 됐다.
같은 신념을 가졌음에도 스킬의 개수와 랭크가 나뉘는 이유,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신념이란 건 결국 주박이었다. 어떤 스킬을 얻던 그 숫자가 더해진다는 것은 처음 깨달았던 신념이 삶 자체가 되어간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정도에 따라 랭크가 나뉘어지는 거고…….
파직, 파지직!
이기수가 전격을 피워 올렸다.
‘몇 명은 꼭 데려간다.’
드드드드!
그 순간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수많은 존재가 달려오는 듯한 소리.
뱀파이어들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모르는 건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기수는 재빠르게 소리가 들리는 근원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두두두!
저 멀리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방향은 게이트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먼지구름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커다란 몬스터 한 마리.
끼악!
커다란 울음소리를 터뜨리는 새 아래로 몬스터들이 빠르게 뱀파이어와 헌터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뭐지?’
이기수는 몸을 긴장시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게이트에서 새로 튀어나온 몬스터인가 싶었지만 그것치곤 너무나 많은 숫자였다.
그렇다고 기존에 있었던 몬스터인가 싶었지만 이기수가 알기론 뱀파이어들이 게이트를 장악한 이후에는 몬스터들 또한 모두 뱀파이어화 시킨 거로 알고 있었다.
촤라라락!
이기수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위 뱀파이어로 보이는 존재 하나가 피로 만들어진 화살을 몬스터들에게 쏘아냈다.
휘익!
아주 가뿐하게 피하는 커다란 새, 하지만 뒤따라오던 몬스터들은 새와는 달리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공격에 적중당했다.
“뭐냐, 이 잡것들은!”
화살을 날린 뱀파이어가 인상을 찌푸리며 사정없이 죽어가는 몬스터를 바라봤다. 게이트에는 일부 뱀파이어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상태였다. 추가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을 뱀파이어화 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많은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는 건 그곳이 뚫렸다는 소리였다.
꺄악!
“꺼져라!”
뱀파이어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하피를 조각내며 이를 갈았다.
‘저 새가 원인이다.’
한눈에 봐도 모든 몬스터들이 저 새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새를 없애면 되는 거였다.
판단을 마친 뱀파이어는 새를 향해 마법을 조준했다.
끼악!
하지만 그 순간 새의 입이 벌어지며 뱀파이어를 향해 화염을 쏟아냈다.
“흥, 그까짓 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염을 보며 뱀파이어가 마법을 변경해 자신 앞에 피로 이루어진 배리어를 만들었다.
화르륵!
가볍게 막히는 화염, 뱀파이어는 멍청한 새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홍염의 날개.
기존의 화염 위로 덧씌워지듯 배리어를 덮쳐오는 푸른 화염, 뱀파이어는 그 모습에 다급히 피를 더 주입하여 배리어를 강화했지만 화염은 배리어를 마치 종이처럼 불태우며 뱀파이어를 휩쓸었다.
“스킬?”
전투를 하던 한 헌터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다행히 아주 늦진 않았군.”
커다란 새 위로 레이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뱀파이어 무리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화염 폭풍.
뱀파이어 무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터져 나오는 화염 폭풍, 그녀의 화염에 의해 저급한 뱀파이어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거, 혼자만 하지 맙시다!”
그녀뿐만 아니었다. 그녀를 시작으로 공략대를 이뤘던 헌터들이 너도나도 뱀파이어 무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헤이! 차가운 거 좋아해?”
―아이스 레인.
“찢어발겨 주지.”
―윈드 커터.
순식간에 헌터들을 중심으로 찢어지며 죽어가는 뱀파이어들, 이기수는 그런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헌터들의 기세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이기수를 잡기 위해 몰려들었던 고위급 뱀파이어들이 그를 둔 채 무리를 향해 돌아갈 정도였다.
“괜찮아?”
새 위에서 진하가 뛰어내리며 이기수에게 물었다.
“이게 다 뭐야?”
“음…… 운이 좋았지.”
진하는 미소를 지으며 커다란 새를 쓰다듬어 주었다.
<주작: 예로부터 성스러운 존재로 인식된 존재. 이런 말이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고, 병아리가 봉황이 되진 못 했지만 주작은 되었다. 특징: 매우 빠르게 날아다닌다. 이름에 불만이 매우 많다.>
진하가 붙인 이름에 따라 성장한 병아리, 사실 진하도 이렇게까지 극적으로 변할 줄은 몰랐다.
‘다른 이름으로 할 걸 그랬나?’
새를 쓰다듬던 진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주작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이곳을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8층에서부터 바깥까지 주작을 타고 왔기에 하루가 걸린 거지 공략대 전체가 아무리 빠르게 뛰어갔어도 족히 3일은 족히 걸렸을 게 분명했다.
“모태빠, 너는 레이나 곁에서 붙어서 레이나를 도와줘.”
같은 화염 속성이라 아마도 쿵짝이 잘 맞을 것이다.
끼엑!
“그래, 알았어. 이름은 내가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볼게.”
진하는 투정 부리는 주작을 대충 달래주었다. 그제서야 삐진 것이 풀린 것인지 주작은 날개를 펴고 뱀파이어를 휘젓고 있는 레이나 쪽으로 날아갔다.
“저거, 네 소환수야?”
“어, 네가 봤던 그 소환수, 병아리야.”
진하의 대답에 이기수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진하의 문방구에 이상한 것들이 많았다지만 설마 병아리가 저런 존재가 될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튼, 이제 상황은 정리될 것 같은데 특이사항 같은 거 있어?”
진하는 순식간에 정리가 되기 시작하는 뱀파이어 무리를 가리키며 이기수에게 물었다. 이기수는 진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없어.”
있을 리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싸웠던 것과 다르게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였다.
수적 우위 따위는 문제없었다. 50여 명의 헌터들이 뱀파이어들을 향해 내뿜는 각종 능력들은 A급 헌터들의 도움을 받아 뱀파이어들을 말 그대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이야.’
흔히 A급 헌터를 물 한 대야라고 말하면 S급은 물탱크로 비유하곤 한다. 말 그대로 그만큼 차이가 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SS급은 꽤 큰 개울 또는 작은 저수지라 불리우고.
그런 사실은 이기수도 익히 알고 있었다. 애초에 스스로가 SS급 턱걸이에 걸치고 있는 상태이기에 S급과 비교해서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알고만 있는 거였다. 이렇게 극적으로 차이를 보여주는 상황은 그조차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A급과 B급으로 이루어진 5만 명의 헌터조차 절대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전투를 단 50명에서 뒤집어 놓았다.
“하, 이거 허탈하네.”
좋은 상황이었지만 방금 전을 생각하면 한편으론 너무나 허탈했다. 그 생각과 함께 이기수는 순간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핵폭탄!”
“뭐? 핵폭탄? 그게 뭔 소리야?”
진하의 물음에 이기수가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이곳으로 조금 있으면 핵폭탄이 투하될 거야. 네 눈에도 배리어가 쳐진 거 보이지?”
이기수가 허공에 커다랗게 쳐진 배리어를 가리켰다. 진하는 이기수가 가리킨 배리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연락은 안 돼? 지금 당장 중지시키라고 말해.”
“불가능해. 연락의 문제가 아냐. 이미 그쪽도 뱀파이어들에게 장악당한 것 같아.”
이기수의 말에 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의 산을 넘었더니 또 하나의 산이 나온 격이었다.
“당연하게도 시안을 잡는다고 멈추진 않겠지?”
“그러겠지.”
“하아, 모태빠!”
끼악!
진하의 외침에 저 멀리서 날아오는 주작, 진하는 이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뭘 할건지 알겠지?”
“설마 요격하려는 거야?”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쏘는 걸 멈출 수 없다면 위에서 요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공에서만 폭발시키면 돼. 적어도 50km 위에서 터뜨리면 안전해.”
어떤 핵이 터지는지는 몰라도 현재 사용되는 핵은 아무리 위력이 강해도 1Mt이었다. 1Mt의 최대 범위는 약 17km. 즉, 50km면 어느 정도 방사능 걱정 없이 안전하게 폭파시킬 수 있었다.
실제로도 과거 핵실험을 고도 30km 위에서 실행했으니 문제는 없었다.
‘EMP가 문제긴 하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고.’
“불가능해.”
이기수가 반대했다. 일단 상공으로 올라간다는 사실이 위험했다. 아무리 헌터의 몸이 초인과 같다고 해도 그렇게 높게 올라가는 것은 무리가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빠른 핵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 모두 죽일 거야?”
진하의 말에 이기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진하의 말도 맞았다. 이대로라면 헌터들은 물론 뱀파이어에게 인질로 잡혔던 사람들까지 모조리 죽을 게 자명했다. 배리어는 어디까지나 안쪽에서 폭발 범위를 줄여주는 역할을 할 뿐이니까.
“네가 필요해. 요격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너뿐이야.”
마침 진하의 곁으로 주작이 도착했다. 진하는 주작 위로 올라타며 말했다.
“가자.”
“젠장.”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은 뒤 주작 위로 탑승하는 이기수. 진하는 주작의 깃털을 붙잡은 채 주작을 조종했다.
후웅―
커다란 날갯짓을 하며 떠오르는 주작. 주작은 곧바로 하늘 위를 향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깨뜨려!”
“알고 있어!”
진하가 말을 하기 전부터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이기수가 배리어를 향해 전격을 내뿜었다.
쩌적―
“한 번 더!”
파지직, 쾅앙!
쨍그랑!
유리 조각처럼 깨지는 배리어. 하지만 배리어는 순식간에 깨진 부분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속도 높여!”
진하의 명령에 주작이 올라가는 속도를 높였다. 빠르게 치솟는 주작.
다행히 배리어가 완벽하게 회복되기 전 한 끗 차이로 빠져나온 진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주작에게 위로 향할 것을 명했다.
* * *
“흐…… 어이없군.”
시안은 밀리고 있는 뱀파이어들을 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방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분신을 만들어 게이트를 빠져나왔고, 종족을 늘렸다. 무엇보다 그를 죽일 수 있는 모든 헌터들을 아래쪽으로 내려보냈다.
분명 잘못된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쯤이면 모든 게 그의 뜻대로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데!
“하늘이 나를 버렸군.”
10만에 달하는 뱀파이어들이 무참히 썰려 나가고 있었다. 하나하나 그보다 약간 낮은 힘을 가진 인간들에 의해 죽어갔다.
특히, 그와 비슷한 수준의 4명의 인간들은 마치 자연재해라도 되듯 뱀파이어들을 말 그대로 삭제하고 있었다.
“네가 보스 몬스터인가?”
뱀파이어를 휩쓸던 4명의 인간 중 한 명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시안은 화염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가진 여자를 보며 몸을 단정히 했다. 이제 곧 죽을지라도 그는 대공이었다. 그렇기에 품격을 지켜야 했다.
“그래, 내가 바로 뱀파이어 대공 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