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하위 헌터부터 후퇴하세요.”
이기수는 그 말을 남기고 곧바로 뱀파이어 무리를 향해 뛰쳐나갔다.
‘너무 많아.’
근 10만 명이었다. 그리고 그중 절반 이상이 A급에 해당하는 몬스터였다.
‘차라리 타국 헌터들처럼 후퇴했어야 했나?’
처음 뱀파이어들의 기습을 받았을 때 후퇴하는 게 정답이 아닐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차라리 뒤로 후퇴해서 폭격 후에 타국의 헌터들과 함께 상대했다면 나쁘지 않은 싸움이 될 수도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기수는 그러지 않았다. 타국의 헌터들이 후퇴할 때도 그는 제일 앞에서 뱀파이어들과 싸웠다. 그 이유는 하나, 사람들이 살아 있으니까.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는 인질로 잡혀있는 일반인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과 같이 떠나지 못한 헌터들과 함께 뱀파이어들과 싸웠다.
까득!
이기수가 전방을 향해 빠르게 커다란 전격을 흩뿌렸다. 마치 그물처럼 퍼진 전격은 수십 마리의 뱀파이어들을 태워 죽였지만 10만이라는 숫자 앞에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터억!
“거, 혼자서 어떻게 싸우려고요?”
누군가 이기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흘낏 바라보니 후퇴 명령을 시켰던 헌터, 르베로토였다.
“너도 얼른 후퇴해라.”
“미안하지만 여기에 후퇴할 헌터는 없습니다.”
르베로토가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헌터들이 너도나도 무기를 쥔 채 뱀파이어 무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가 저희 집인데 어떻게 후퇴합니까. 가족을 버리고 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너희들…….”
“반대로 이기수 씨랑 한국 헌터들은 왜 남으셨습니까? 여기에 아무런 연고도 없으면서.”
르베로토의 물음에 이기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오지랖이 내 특기라서 말이야.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고.”
“다들 안 좋은 성격을 가지셨네요.”
“그래? 난 나름 좋은 성격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때, 뱀파이어 무리에서 한 존재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처음 보는 존재, 하지만 그 존재감만으로도 이기수는 그가 이 무리의 대표이자 보스 몬스터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기수라는 인간이었던가? 꽤 강해. 어쩌면 나와 호각을 다툴지도 모르는 존재군.”
“그럼 나하고 1대1로 싸우는 건 어때?”
이기수의 말에 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지만 이래 봬도 이게 본체는 아니라서 말이야.”
“본체는 12층에 있는 건가?”
“호오? 그 사실을 알아? 어떻게 알지? 나를 아는 인간은 없을 텐데?”
그의 말에 이기수는 지금 말을 나누는 상대가 시안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분신이라…… 몬스터 따위가 이렇게 머리를 쓸 줄은 몰랐어.”
“나도 나름 인간이 부담돼서 말이지. 나와 비슷한 힘을 가진 존재가 밖에 5명이나 있으면 당연히 조심스럽게 나가야 하지 않겠어?”
“듣던 것과 달리 겸손하군.”
“대공의 미덕은 겸손이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지.”
“그래? 하지만 결국 너희가 질 것 같은데 말이야.”
이기수의 말에 시안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설마 핵폭탄인가 뭔가 하는 걸 믿는 건가?”
시안의 말에 이기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했지 않았나. 난 인간을 우습게 보지 않는다고. 설마 내가 가만히만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나? 핵폭탄을 조작하는 인간들도 뱀파이어라네.”
“고작 핵폭탄 하나를 막았다고 끝일 것 같아?”
“큭큭큭,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핵폭탄은 터질 거네. 그리고 뱀파이어들은 모두 죽었다, 그렇게 인간들에게 공표되겠지. 그리고 우리는 암중에서 조금씩 너희들을 지배하게 될 거야.”
시안은 그 말과 함께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피로 만들어진 의자가 생성되었다.
“자, 어차피 죽을 거, 나와 담소라도 잠시 나누지 않겠나? 군주로서 그래도 끝까지 대항한 인간에게 시간을 내주고 싶은데 말이야.”
그의 말에 이기수는 잠시 주저하다가 그가 마련한 의자에 앉았다. 어차피 이미 방법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시간을 끌면서 타국에 이 사실을 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뭐지?”
“아, 잠시만.”
시안이 잠시 손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우웅―
헌터들 뒤쪽으로 커다랗게 펼쳐지는 배리어, 이기수는 그 배리어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조심성이 많아서 말이야. 혹시라도 누가 빠져나가면 안 되잖아?”
“하, 완전히 당했네.”
“아니, 나로서는 정말 잘 싸웠다고 말해 주고 싶군.”
시안이 손뼉을 쳤다. 상대를 놀리는 모습이 없는, 대단하다는 표현을 하는 시안의 모습은 정말 감탄하는 것 같았다.
“설마 인간이 내 계획을 꿰뚫어 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그 덕분에 예정에도 없는 기습을 하게 됐지. 축하해. 확실히 너로 인해 많은 헌터들과 사람들이 살았으니까.”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나 보지?”
“그래, 원래 계획은 그게 아니었지. 너희 헌터들의 주 병력이 공략을 위해 나에게 내려가는 동안 천천히 이 모든 곳을 흡수하려 했지. 그런데 유일하게 한국 쪽 헌터들이 유럽 헌터들을 의심하더군.”
“뱀파이어라는 걸 알았으니까.”
“맞아.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계획을 변경했지. 이곳에 핵폭탄이 터지고 나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어때, 좋은 계획이지 않나?”
“만약 공략대가 너를 먼저 죽였으면 어떻게 하려 했지? 아무리 너라도 본체가 죽으면 끝일 텐데?”
이기수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을 물었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전략이었지만 만약 원래대로 진행됐다면 공략대에 의해 시안은 죽었을 것이다. 전혀 성립되지 않는 전략이었다.
“아, 분신이라는 말에 혼란이 왔나 보군. 그쪽이 본체기는 하지만 우리는 둘 다 죽지 않는 이상 죽지 않아. 물론 본체가 죽으면 나는 큰 타격을 입고 한동안 숨어지내야 하긴 하지.”
“편리한 능력이군.”
진하가 알려준 능력에는 이러한 사실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진하가 보았던 미래에는 이런 능력이 없었다거나 있었음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걸 뜻했다.
“하나만 묻지. 너희 몬스터들은 어째서 인간을 그렇게 죽이려 하지?”
이런 기회는 없었다. 여지껏 몬스터와의 전쟁은 싸우고 싸우는 것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성을 가진 존재와 평화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이기수는 이 기회를 이용해 몬스터들의 목적을 알고 싶었다.
“흠, 그건 나도 몰라.”
이기수의 생각과는 달리 예상치 못한 답변이 들려왔다.
“뭐랄까, 인간을 보면 본능적으로 혐오감이 들거나 먹고 싶다는 감정이 들지. 물론 그런 감정은 어느 정도만 되도 억누를 수 있지만.”
“본능적으로 애초에 적이었다?”
“글쎄, 이걸 뭐라 해야 하지? 인간들 말로 신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만든 게 아닌가 싶어. 물론 누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소리는 기분 나쁘긴 하지만 뭐, 본능을 무시하기에도 좀 그렇지 않나?”
시안이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결국, 이기수가 알고 싶어 했던 의문에 대한 대답은 본능이라는 말뿐 이었다.
“자,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즐거운 대화를 나눈 것도 같고, 내 자네에게 하나 제안을 하지.”
시안은 그 말과 함께 피로 만들어진 작은 컵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상처를 낸 후 그 컵에 자신의 피를 가득 따랐다.
“인간, 너에게 내 옆자리에 앉을 기회를 주지.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 어때?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 없나?”
시안의 말에 이기수는 피식 웃음 지었다. 지금 몬스터라는 새끼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 고작 이런 거라니.
“당연한 걸 묻는군. 거절이다.”
“흐음…… 역시 이상하게 A급 이상의 헌터부터는 고집이 세단 말이야. 어떤 놈들은 쉽게 넘어오는데 어떤 놈들은 죽어도 넘어올 생각을 하지 않고, 인간들의 특성인가?”
“글쎄,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여기에 있는 헌터들 중에는 너의 제안을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단 거야.”
이기수의 말에 시안은 깊게 고민했다. 사실 시안의 입장에선 이기수는 꼭 손에 넣고 싶은 인간이었다. 안 그래도 저 밑에서 올라오고 있을 최정예라는 인간들은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렇기에 시안은 숨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적어도 숨기 전에 이 인간은 가져가고 싶었다. 자신의 측근이 더욱 강하고, 많을수록 그의 권위와 능력이 더욱 강해지니까.
“흐음……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자네가 나에게 넘어오면 저기에 있는 헌터들은 살려주지.”
시안의 말에 이기수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물론 우리의 계획을 아는 저 헌터나 근처 헌터들은 당연히 살려둘 수 없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헌터들은 살려주지. 어때? 이 정도면 구미가 당기지 않아?”
“살려…… 준다고?”
“그래, 살려주지. 아, 원한다면 일반인들도 살려줄 수 있어. 보니까 여기에 방공호라는 곳이 존재하더군. 그곳에 일반인들을 넣어두지. 그럼 핵폭탄이 터져도 살지 않겠어?”
시안의 말에 이기수는 순간 갈등이 이는 걸 느꼈다. 확실히 이 상태로는 완전한 전멸, 그 이상은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이기수가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헌터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잘 생각하라고, 그러고 보니 너는 인간들이 죽는 걸 꽤 싫어하던 것 같던데. 오히려 기회 아닌가?”
“나는…….”
그 순간 이기수의 어깨 위로 한 사람의 손이 올려졌다. 르베로토였다.
“신념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들은 짐이 아닙니다.”
그의 말에 혼란스러웠던 이기수는 머릿속이 맑아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는 시안을 똑바로 마주 본 채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 제안은 거절해야겠군.”
몬스터였다. 애초에 몬스터 따위와의 약속이 지켜지리라고 생각해선 안 됐다. 그런데도 살릴 수 있다는 소리에 현혹되고 말았다.
“흠, 후회되지 않나?”
“후회되지 무척이나.”
후회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가능성이 있다면 사람들을 살리고 지키기 위해서 1%라 할지라도 이기수는 시안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사람들이 아니라 헌터였다. 그것도 각자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가족과 조국을 지키기 위해 남아있는 헌터들.
과연 그들이 이기수의 희생으로 살아남는 걸 좋아할까?
그리고 일반인들을 살릴 수 있다 하여도 뱀파이어가 된 이기수가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일지도 몰랐다. 로베르토가 아니었다면 바로 앞의 이득을 골라버릴 뻔했다.
“그런 선택을 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고마워.”
이기수는 그에게 짧은 감사를 표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분명 이기수는 바보같이 시안의 제안에 넘어갔을 테니까.
“자, 그럼 이야기는 다 나눈 것 같네. 어이 뱀파이어 더 할 말 있어?”
이기수의 말에 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쉽긴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되겠군. 아까워, 너 같은 인간이 내 수족이 됐어야 하는데 말이야.”
둘은 그대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둘이 일어나자마자 피로 이루어졌던 의자와 테이블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시안은 마주 보고 있는 이기수를 향해 말했다.
“적에 대한 예우로 5분의 시간을 주지. 마지막 준비를 하도록.”
“거참, 인정도 넘치는군.”
이기수는 곧바로 헌터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확성 기능이 있는 인챈트 물품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 아 들리나?]
“네!”
곳곳에서 헌터들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기수는 그들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우리들이 남았던 이유인 가족들은 모두 죽었다.]
이기수의 거짓말에 순간 적막이 감돌았다. 하지만 이기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곳에 핵폭탄이 떨어진다. 어차피 우리는 죽는다. 그런데 억울하지 않나? 내 가족들을 죽인 존재들을 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이대로 죽는다는 게, 복수할 기회조차 없다는 게.]
이기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난 싸우다 죽을 거다. 핵폭탄 따위에 죽는 게 아닌 저 몬스터들을 하나라도 죽인 뒤에 죽을 거다. 이상이다.]
파삭!
인챈트 된 물품이 부서졌다. 이기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온몸에 전격을 둘렀다.
“좋은 연설이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와요?”
이기수는 다가오는 하준수에게 물었다.
“뭐, 팀원들 좀 격려하고 왔지. 어차피 내가 할 일은 싸우는 거 외엔 없지 않나?”
“그건 그렇죠. 그럼 잘 부탁합니다.”
이기수는 그 말을 마친 뒤 뱀파이어 무리 쪽을 바라봤다.
“죽을 준비는 다 한 것 같군. 흠, 마침 핵폭탄도 쏘아지려 하나보군 딱 좋은 시간이야.”
게이트가 있는 곳 전체를 뒤덮는 배리어가 생기는 것을 보며 시안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자신의 옆에 도열한 뱀파이어들을 보며 말했다.
“저 이기수라는 인간은 반드시 생포해라. 우리 일족으로 만든다.”
“네!”
“자, 그럼 가거나. 나의 아이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