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그게 무슨 소리지?”
레이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아무래도 지상이 걱정돼요. 그런데 이 아래층부터는 직접적으로 연락이 닿지 않아요.”
“그래서?”
“적어도 6층 끄트머리에 연락이 닿을 사람을 남기고 싶어요. 그래야 우리에게 더 빠르게 소식이 전달될 테니까요.”
진하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레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팀을 나눌 순 없어.”
“왜죠?”
“너의 말은 일견 타당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만약이다. 애초에 바깥에 있는 헌터들도 나름 베테랑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야. 우리가 연락을 남기는 건 결국 그들을 못 믿는다는 소리기도 하다.”
“지금 자존심이나 챙길 때입니까?”
“아니, 그 소리가 아니다. 거기다가 우리가 상대할 몬스터가 몇 층의 어떤 몬스터인지 모르는데 전력을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 또한 있다.”
“전력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고 보는데요?”
현재 공략대는 SS급만 4명이었다. 과거엔 타국의 원조가 이것보다 적었을 때도 시안을 죽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확실히 죽일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고작 S급 한두 명이랑 A급 몇 명 남기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걸까?
“너의 의견은 분명 좋은 의견이었다. 하지만 기각하도록 하지.”
레이나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소리였다.
‘하아…… 어떡하지?’
레이나를 설득시킬 증거가 필요했다. 이대로 내려갔다간 제대로 연락을 받기 힘들 수도 있었다.
‘대비책이 있긴 하지만…….’
완벽하다고 말하기 힘든 대비책이었다. 그러다 보니 불안감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것 또한 마찬가지 진하는 하는 수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제자리로 돌아오자 이기수가 진하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
“잘 안됐어.”
“너무 걱정 마. 그래도 미리 해놓은 게 있잖아.”
이기수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은 다른 사람들을 믿어야 할 때였다.
* * *
3일 후, 8층.
유례없는 속도로 빠르게 층을 내려온 공략대는 더 깊은 층에 내려가기에 앞서 체력 보존을 위해 길게 쉬고 있었다.
‘불안해.’
마찬가지로 쉬고 있던 진하는 불안함에 드러누웠던 몸을 뒤척였다. 너무 소식이 없었다. 아니, 소식이 없는 건 당연했지만 지금쯤 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몰라 맘이 너무 답답했다.
삐약!
그때, 텐트 한구석에 있던 병아리가 삐약 하고 울었다.
“위로해 주는 거냐? 고맙다.”
진하가 작게 웃으며 병아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이름이 있어야 하긴 할 텐데.”
삐약!
병아리의 성장은 다행히 진하의 예상대로 게이트 안에서 끝났다. 정확히는 그저께 예상대로 성장이 마쳤다는 문구가 떴다.
‘빨리 이름을 정하긴 해야 할 텐데.’
<하얀 병아리: 매우 건강한 판매용 병아리. 성장이 끝났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한 듯하다. 하지만 이름이 생기지 않아 아직 본 모습은 모르겠다.>
하지만 이름을 짓지 않아 성장이 막힌 상황, 그것 때문에 진하는 어제부터 병아리의 이름을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라고 했어.’
자신이 원하는 소망에 따라 모습이 변하는 소환수일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이름을 지을 때 특히 신중해야 했다.
‘뭘 해야 좋을까…….’
필요한 게 너무나 많아 문제였다. 뭘 하든 확실히 좋을 것 같긴 했지만 반대로 뭘 해야 가장 좋은 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에휴, 너도 참 고생이다.”
진하는 멍하니 자신을 보는 병아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당장 딱 필요한 능력이 하나 있긴 했다.
“이름, 이름이라……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네가 모두를 태우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무슨 이름이 그렇게 변할려나…….”
띠링!
<‘이름: 모두를 태우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로 등록하시겠습니까?>
“어?”
<등록되었습니다.>
“야, 야! 잠깐만!”
진하가 다급히 소리쳐 보았지만 이미 정해진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변화까지 약 10분.>
“아니, 뭐 이런…….”
진하는 얼척 없는 표정으로 병아리를 바라봤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고민한 일들이 뭐가 된단 말인가?
거기다가 분명 어젯밤 입으로 이름을 소리 내면서 고민할 땐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던 시스템 창이 반응했다.
“이거 장문으로 지어야 하는 거였어?”
삐약!
병아리를 쳐다보자 병아리가 가자미 눈으로 진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진하는 그런 병아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일부로 그런거 아닌거 알지? 대신 애칭을 예쁜걸로 지어줄게.”
삐―익!
하지만 통하지 않는건지 병아리는 이내 토라진채로 자신의 자리로 가서 몸을 웅크렸다.
“아, 미안하다니까. 내가 설마 그게 될 줄 알았나?”
치익―
그 순간 진하의 배낭에서 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전기 소리였다. 그 소리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진하는 다급히 배낭 안쪽에서 자신의 무전기를 찾았다.
치익―칙!
잡음을 내며 배낭 안쪽에서 소리를 내고 있는 플라스틱 무전기 하나. 진하는 그 무전기를 빠르게 잡아들었다.
<무전기: 장난감 무전기. 장난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매우 고가이다. 그리고 짧은 거리만 된다는 게 흠이지만 어떤 곳이든 무조건 연락이 된다.>
“여기는 공략대. 소리 들려?”
치익―칙, 치익!
“뭐야? 안 들려?”
[……들립니다.]
작지만 무전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야? 아니 무슨 일 터졌어?”
[여기는 7층, 지금 당장 위쪽으로 가야 합니다.]
“잠깐만!”
진하가 다급히 일어나 레이나에게 뛰어갔다. 마침 레이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무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뭐지?”
뛰어오는 진하를 보며 의문을 표하는 레이나, 진하는 말 대신 빠르게 무전기를 넘겨주었다.
치익―
[들립니까?]
“……들린다. 자네는 누구지?”
[지상에서 파견된 연락책입니다. 지금 당장 지상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할 수 있겠나?”
[뱀파이어로 추정되는 몬스터들이 바깥에서부터 몰려들었습니다. 전열은 붕괴됐고, 협회의 기능 또한 절반 이상 마비된 상태입니다.]
“팀과 해리스는? S급 헌터인 둘은 뭘 한 거야!”
[그게... 팀 헌터는 습격 당일부터 이미 뱀파이어였던 상태였고, 해리스 헌터는 죽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레이나가 일어나 소리쳤다.
“다들 준비해! 바로 지상으로 올라간다!”
레이나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헌터들. 하지만 레이나 가까이에서 이미 무전 소리를 들었던 헌터들이 빠르게 짐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다른 헌터들도 허겁지겁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레이나가 무전기를 들었다.
“팀이 뱀파이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협회의 절반이 이미 뱀파이어였습니다. 그나마 다행히 이기수 씨가 있어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어서 빠르게 올라가야 합니다.]
“이기수?”
레이나가 물음표를 그리며 진하를 바라봤다. 그리고 저 멀리 움직이고 있는 이기수를 바라봤다.
“이기수는 여기 있는데?”
“그건 나중에 따지고 일단 빨리 가죠!”
진하의 말에 정신을 차린 레이나가 진하에게 무전기를 넘긴 뒤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일단은 너희들도 올라가. 우리도 빠르게 올라갈게.”
[알겠습니다.]
주머니에 대충 무전기를 쑤셔 넣은 진하가 빠르게 자신의 텐트로 달려갔다. 그때 어느새 짐을 다 챙긴 이기수가 진하의 배낭을 넘기며 물었다.
“다 챙겼어. 근데 나 이제 연기 그만해도 돼?”
“어.”
그 말과 함께 이기수가 자신의 얼굴을 잡아 뜯었다.
철퍽.
“후아, 이게 제일 답답했어.”
진하에게 말하는 이기수, 아니, 이기수로 변장했던 엘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이기수를 남기길 잘했어.’
진하는 그날 변경했던 준비가 성공하였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수야, 너는 남아라.
―뭐?
―말 그대로야. 너는 공략에 내려가지 말라고.
―뭔 소리야? 이 경우에는 그냥 능력만 복사시키는 거로 결론 냈잖아.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네가 남는 게 더 나아.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뭔가 불안해. 그냥 엘리사한테 능력 복제시킨 다음에 너는 남고 엘리사가 내려가는 걸로 하자.
―얼굴이랑 신체는? 그리고 복제 능력은 70%가 다인 거 몰라?
―딱 맞는 아티팩트가 있어. 그리고 아래 내려가서는 내가 커버칠 게.
―하아, 알겠어.
―오케이, 그럼 바로 준비하자.
그날 즉석에서 정해진 계획. 능력 복제를 할 수 있었던 시후와 진하의 아티팩트로 인해 다행히도 그날 정한 계획은 모두를 속여넘길 수 있었다.
“쯧, 일회용이라는 게 아깝긴 한데.”
진하는 이제는 흐물흐물해진 찰흙을 보며 혀를 찼다.
<찰흙: 조물조물 만들고 싶은 걸 함께 만들어 보아요. 친구의 얼굴이나 물건 등 모든 걸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제한 시간: 일주일.>
“그래도 제한 시간이 다하기 전에 일이 발생해서 다행이지.”
만약 일이 터지지 않았다면 한국은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찰흙이야 더 사서 얼굴이야 변장시킬 수 있지만, 12층까지 가게 되면 100% 들켰을 게 뻔했다. 출력도 70%고 전투 스타일도 달랐으니까.
분명 타국에서 보기엔 자국의 헌터를 아끼기 위해 이기수를 빼돌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건이 터져서 그럴 가능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잭한테도 미안하고.’
공략하는 동안 진하가 잭이 이기수에게 다가가는 걸 원천 봉쇄한 덕에 그와의 사이도 극도로 나빠져 버렸다.
그래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벌써 들키고도 남았을 테니 어쩔 수 없었다. 그 부분은 아마 나중에 사과하면 되겠지.
“출발한다!”
어느새 준비를 모두 마친 레이나가 천막을 나오며 말했다. 마찬가지로 간단하게 짐을 챙긴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하 역시 배낭을 고쳐매고 앞선 헌터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 * *
콰르릉!
“죽어!”
커다란 번개를 날린 이기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벌써 4일째였다. 전선은 이미 뚫린 지 오래였고 헌터들끼리 모인 방어선 또한 불안정하기 그지없었다.
‘이대로는 안 돼.’
뱀파이어들이 사방으로 퍼지지 않았기에 이 정도지, 그렇지 않았다면 독일은 지금쯤 피바다가 됐을 것이다.
“물러난다!”
한 헌터가 물러나는 뱀파이어들을 보며 외쳤다. 그녀의 말대로 뱀파이어들이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이기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헌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부여 능력자랑 방어 능력자들은 방어선 보수해 주세요! 그리고 각 팀장들은 피해 상황 집계해서 막사로 오세요.”
말을 마친 이기수는 간이로 지어진 막사로 들어갔다. 막사 안에는 독일의 지도가 난잡하게 펼쳐져 있었다.
“하아, 미치겠네.”
이기수는 피곤에 찌든 얼굴로 전선을 바라봤다. 이제 거의 끝까지 밀린 거나 다름없었다.
이것도 그나마 뱀파이어들이 적극적으로 공세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겨우 버틴 거였다.
쾅!
“젠장!”
뱀파이어들이 헌터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지난 3일간 그들은 헌터를 죽이기보다 죄다 생포해 가고 있었다. 자신들의 동족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때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막사를 열고 팀장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략적으로 모두 들어온 걸 확인한 이기수는 팀장들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몇 명입니까?”
그러자 한 팀장이 대표로 말했다.
“A급만 천 명 잡혀갔습니다.”
“우리 쪽에 남은 A급 헌터는 몇 명인가요?”
“이제 만 명 남았습니다. 저기…… 이기수 헌터님.”
“왜 그러죠?”
“저희도 이제 후퇴하죠.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팀장의 말에 이기수가 이를 갈았다. 그도 알았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는 걸.
“얼마 전 연락이 왔습니다. 정부에서 독일을 봉쇄하고 핵폭탄을 터뜨린다고 합니다.”
“미쳤어요? 지금 여기에 일반인들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몰라서 그래요?”
“협회도 이미 기능이 거의 마비되지 않았습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타국들도 핵폭탄을 쏘라고 압박 중이라고 합니다.”
팀장의 말에 이기수는 할 말이 없었다. 적들은 벌써 10만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이기수 쪽의 헌터들은 타국 헌터들이 다 빠져나가고 겨우 5만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기수와 헌터들이 후퇴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한 가지. 일반인들 때문이었다.
뱀파이어들은 영악하게도 일반인들을 모두 죽이지 않고 인질로 잡아두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이기수와 일부 한국 헌터, 그리고 독일의 자국 헌터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곳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략대에게 간 사람들은요?”
“어제 마지막 연락 기준으로 전달했답니다. 다만 공략대 위치가 8층입니다.”
8층이면 아무리 빨라도 지금 7층일 게 뻔했다. 게이트를 나왔을 쯤이면 이미 핵폭탄이 떨어지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답이없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후, 어쩔 수 없네요. 후퇴…….”
왜에앵! 왜에앵!
그 순간 경보음이 울렸다. 후퇴했던 뱀파이어들이 다시 쳐들어왔음을 느낀 이기수가 빠르게 막사를 뛰쳐나갔다.
“이런 젠장…….”
그런 그의 눈에 보이는 건 하늘을 가득 채운 뱀파이어 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