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
대충 이야기를 마친 진하와 이기수는 격납고를 나왔다. 격납고 밖에는 그들을 데려가기 위해서인지 어느새 차 한 대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둘은 곧바로 협회원의 안내에 따라 그 차에 탑승했고, 그들이 타자마자 차는 천천히 회담장을 향해 나아갔다.
“후우....”
“왜, 정리하는 거 자체도 힘드냐?”
진하는 차를 탑승하고 꽤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한숨을 내쉬는 이기수를 보며 물었다. 이기수는 진하의 물음에 고개는 저었다.
“그건 아니야. 애초에 바로 정리될 거라고 생각도 안 해서 일단은 그냥 머리 한쪽에 묻어뒀어.”
“그럼 왜?”
“말한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는데 협회장 위치를 찾았어.”
“어딘데?”
“협회장이 다른 협회에 의탁했어.”
“다른 협회? 유렵 협회?”
“응.”
이기수의 말에 진하는 기가 차는 걸 느꼈다. 조용히 숨어 살아도 모자랄 판에 가장 가까운 유럽 협회라니, 완전히 자기 자신을 잡아먹어달라는 소리였다.
물론 그쪽에도 그에게 뇌물을 받아먹은 사람은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명분은 한국 협회에 있었다. 즉, 그들이 요청하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협회장인 김준태를 넘겨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소리였다.
“송준하 씨에게 말해서 인계받아야겠네.”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할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직접 확인해 봐.”
그 말과 함께 이기수는 어느새 도착해 멈춰 선 차량에서 내렸다. 진하도 그를 따라 내리며 물었다.
“그를 못 구속한다는 거야?”
“그래, 아무리 용을 써도 잡지 못할 것 같아.”
이기수는 그 말과 함께 도착한 회담장의 문을 밀었다. 물이 밀리고 회담장의 풍경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이미 먼저 와 있던 각국의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이 일어나 진하에게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유럽 협회 부협회장, 김준태라고 합니다.”
“당신이 왜 여기에?”
“그야, 유럽 협회 대표중 하나니까요?”
김준태의 말에 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이기수를 쳐다보았다. 이기수는 진하의 시선에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못 데려간다고 한 거였구나.’
유럽 대표 중 하나, 그것도 부협회장이라면 확실히 그를 구속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했냐는 거였다.
협회의 부협회장 자리는 협회 내 권력의 중추 중 하나였다. 그런 곳에 김준태가 앉는 것도 말이 안 됐다. 특히, 그런 자리는 단순히 뇌물과 능력이 좋다고 해서 무조건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사라진 지 며칠조차 되지 않았기에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래에도 이런 일은 없었어.’
분명 회귀 전 진하가 알기로 그는 유럽에서 조용히 살아가게 됐다고 알고 있었다. 협회에서 그를 건들지 않는 대가로, 그도 가만히 있는 그런 상황이었었다. 그런데 여기서 김준태가 나타나다니....
“부협회장은 레이 크리스 씨 아니었나요?”
“아, 그분은 이번 게이트 폭주를 막던 중에 죽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미래가 바뀌었어.’
진하가 알고 있던 미래가 또 바꼈다. 거기다가 연관성 있게 바뀐것도 아니고 너무 어이없고 뜬금없이 바뀌어버렸다.
‘뭐가 문제지?’
분명 뭔가 연관성이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미래가 자신의 행동에 의해 바뀐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뜬금없이 바뀌는건 말이 되지 않았다. 진하는 빠르게 머리를 돌려 김준태와 유렵 협회와의 연관성을 생각했다.
“자리에 앉지 않으실 건가요?”
진하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김준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옆에 서 있던 이기수 또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알아채고 진하를 툭, 툭 건드렸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진하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일단 자리에 앉았다.
“모두들 번역 목걸이는 끼셨나요?”
모든 사람이 앉자 김준태가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아시겠지만 그 번역 목걸이의 효과는 딱 한 달입니다. 한 달마다 협회에서 다시 새로 받아 가셔야 된다는 점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간단한 안내를 마친 김준태가 마저 말을 이어갔다.
“우선 유럽 협회를 지원해 주신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면서 왼쪽에서부터 각 나라의 분들을 소개시켜 드리자면…….”
“저기, 죄송한데, 이미 다들 서로를 대충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냥 본론으로 넘어가죠?”
“아, 죄송합니다. 확실히 모르실 분은 없겠죠. 그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현재 게이트 폭주에 대한 자료입니다.”
삑!
다른 나라의 충고에 빠르게 안건을 넘긴 김준태는 자신의 자리에 놓인 리모컨을 조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앉은 협탁의 중심에 생겨나는 홀로그램 하나.
“보시는 바와 같이 현재 게이트를 중심으로 반경 3km 밖으로는 일절 몬스터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위에서 지도를 내려보는 듯한 홀로그램은 파란색 점과 빨간색 점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게이트 주위를 맴도는 빨간 점과 그 주위를 감싸는 파란 점.
“그리고 게이트 폭주가 잦아들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특히,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많이 잦아들고 있다는 점과 레이나 헌터와 마이크 헌터가 S급 몬스터를 잡은 다음부터는 몬스터들이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잦아들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럼 좋은 거네요. 그런데 어째서 지원을 요청하신 거죠?”
중국 대표의 말에 김준태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원을 요청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선 저희 쪽 헌터들도 지쳤습니다. 지금까지 거의 2교대로 계속해서 전투를 진행했습니다. 몬스터들의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그만큼 헌터들 역시 지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지원을 부탁한 겁니다.”
“겨우 그것 때문에?”
중국 대표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의 말에 기분이 나쁠 만도 한데 김준태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마저 말을 이어갔다.
“물론 그것도 있지만 하나 더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게이트 안으로 진입해야 할 듯싶어서 그렇습니다.”
갑작스런 김준태의 말에 모든 사람들의 눈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가만히 듣고 있던 러시아 대표가 물었다.
“아까 S급 몬스터를 잡은 뒤에 몬스터가 줄었다는 거, 얘기해 드렸지요?”
“네.”
“확실히 이대로 두면 완전히 멈출지 모른다는 예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고 저희 연구원들은 다른 보스급 S랭크 몬스터가 게이트 내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조사단 겸 공략대를 조직하려고 합니다.”
김준태의 말에 다들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말대로라면 자국의 헌터를 사지로 몰아넣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공략대에서 빠지도록 하죠.”
“아프리카 대륙 연합도 빠지죠.”
중국을 시작으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김준태의 말에 반대하고 나섰다. 진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힘을 실어 주는 것 같아 싫긴 하지만…….’
“한국은 찬성하도록 하죠.”
첫 찬성표였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진하에게 쏠렸다. 진하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이번 게이트 폭주가 처음이라는 보장도 없는데, 반대는 왜 합니까? 만약 터진다면 하나라도 미리 매듭짓는 게 낫죠. 그리고 게이트에서 멈추지 않고 몬스터가 계속 나오면? 심지어 더 많아지면? 지금이야 유럽이 잘 막지만 전 세계로 퍼질 가능성도 있어요. 대표적인 예가 우리 한국이겠네요.”
진하의 말에 다들 침묵했다. 그러고는 다시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일본은 찬성하겠소. 어차피 지원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화끈한 게 낫지.”
“나도 찬성하오.”
“저도요.”
진하에 의해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아직 손을 들고 있지 않은 자국 대표들이 하나, 둘씩 찬성 쪽으로 손을 들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진하는 무덤덤하게 김준태를 바라봤다.
‘역시 이상해.’
각국의 대표들이 각기 찬성과 반대를 외치는 상황에서 김준태의 행동은 정말로 정상적이었다. 물론 잘못된 행동을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지만, 김준태가 낸 안건을 진하가 분위기를 반전시켰다는 게 중요했다.
뭐가 어찌됐든 김준태와 진하는 서로 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진하가 김준태에게 힘을 실어주는 행동을 갑작스럽게 했을 때 보통 사람은 아무리 자신에게 이득이 오는 상황이라고 해도 의심을 하거나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김준태는 그런 움직임이나 낌새가 전혀 없었다. 오로지 공략대를 편성하고 게이트를 막아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한듯한 행동을 보였다. 심지어 진하와 이기수가 있는 한국쪽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김준태의 모습이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좋게 말하면 회담장이기에 감정은 배채한 채 잘 말하고 있는 거였고, 나쁘게 말하면 이야기를 함에 있어 아무런 감정조차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말을 입력하면 대답이 나오는 컴퓨터 같았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사실 진하가 이렇게 김준태를 신경 쓰고 디테일하게 관찰하는 이유는 감 때문이었다. 현재 김준태의 직위, 지금까지의 행보, 반응 등 모든 게 의심스러웠으니까. 거기다가 이상하게도 그를 보면 매우 이질적인 감정이 들었다.
‘너무나 친숙해.’
김준태가 너무나 친숙해서 마치 혈육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한 느낌 때문에 진하는 그를 일거수일투족 살펴보기 시작했고, 그의 의심스러운 점들을 하나하나씩 발견해냈다. 다만 문제는 그에게 발견된 거라곤 그저 의심스러운 점들 뿐이고 거의 다 심증이라는 게 문제였다.
‘일단은 더 지켜보자.’
* * *
“왜 그랬어?”
회의가 끝나고 호텔에 들어온 진하에게 따라 들어온 이기수가 물었다. 오면서 회의에 대한 정리된 내용을 들었던 하준수도 그 이유가 궁금했는지 따라 들어온 뒤 문을 닫았다.
“뭐가?”
“왜 적극적으로 김준태의 공략대 창설에 찬성했냐고.”
“필요한 일이었잖아. 정말로 짜증나지만 김준태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어.”
진하의 말에 이기수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런 소리가 아니야. 공략대가 필요한 건 맞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어차피 오늘이 아니더라도 공략대는 결국 만들어질 거고, 우린 그냥 중립을 지키기만 해도 됐었잖아. 애초에 김준태가 이렇게 빠르게 만들려고 한다는 건 뭔가 우리 뒷통수를 치려는 거 아냐?
“사람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없어서 그런 거야. 그리고 그의 직책을 생각해봐.”
공략대 자체에 건들만한 요소는 딱히 없었다. 그가 이상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니었고 꽤나 정상적인 요구들을 했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빠르게 만들어지는 게 나았다. 그편이 빠르게 돌아가야 하는 진하 쪽에게는 이득이었으니까.
“그의 직책은 부협회장이야. 아무리 그의 권한이 크다고 해서 협회장이나 다른 간부들의 의견을 무시할 만한 위치가 아니야. 그러니 이 의견 차체는 문제가 없을 거야.”
“그건 그렇지만...”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
잠자코 듣고 있던 하준수가 입을 열었다. 진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 중에 거슬리는게 있는데 사람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했는데 굳이 사람이란 말을 넣은 이유는 뭐지?”
“그게 무슨 소리죠?”
이기수가 하준수를 보며 물었다.
“말 그대로다. 방금 진하는 사람이라면 뒤통수를 치지 않는다고 했어. 그렇다는 건 사람이 아니라면 뒤통수를 친다는 소리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정답. 뭐 틀린 말은 아니야.”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수는 진하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지금 김준태가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