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
“놓으라고.”
이기수의 서늘한 눈빛에 잭 또한 안색을 굳혔다. 그리곤 그대로 이기수의 팔을 잡아당겼다.
“징징거리는 것 좀 작작 해.”
강제로 일으켜진 이기수가 잭을 바라봤다. 잭은 그런 이기수를 보며 말했다.
“네가 한 짓이 후회돼? 그럴 거면 왜 했어.”
“하아…… 됐다.”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는 이기수, 그는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설마 그 개 같은 파일 보러 가냐?”
잭의 말에 이기수가 움찔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잭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들 내가 모조리 지워버렸어.”
“미쳤어?”
이기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잭 또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도대체 뭐가 문젠데? 쓰레기 새끼들이었잖아. 그들을 고문한 게 그렇게 후회돼? 아니면 그놈들의 가족들한테 원망을 받아서 무서워? 퍽킹! 그럴 거면 아예 하지도 말았어야지!”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몰라, 내가 남의 나라 일 따위 알 게 뭐야. 다만 네 모습이 한심해서 그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거면 도대체 왜 그런 건데?”
잭의 말이 이기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나고 뭐라고 반박하고 싶은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잭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젠장!”
이기수는 그대로 자신의 방문을 쾅 닫으며 들어갔다.
“하아…….”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는 잭 또한 한숨을 내쉬며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 * *
며칠 전, 유럽의 제2 게이트 막사.
잠시 쉬고 있던 잭은 지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놈의 몬스터들은 줄기만 할 뿐 없애도 없애도 끝이 나질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거의 끝나가네. 어? 기수 어디가?”
“나쁜 놈들 잡으러.”
막사에서 나온 이기수는 굳은 얼굴로 전선 밖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태껏 이기수의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잭은 재빠르게 이기수를 따라갔다.
어차피 저녁이어서 몬스터들이 조금씩 물러나는 중이기도 했고, 다른 S급들도 있었기에 이미 가장 중요한 일들을 끝낸 후 쉬고 있던 그들이 벗어난다고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헤이, 브라더 왜 이렇게 심각해?”
“있어. 그런 게.”
“왜들 그리 다운돼 있어? 뭐가 문제야 say something~”
“…….”
“왜? 이거 기수네 나라에서 유명한 곡 아냐? 노래 좋던데.”
“……말을 말자. 그나저나 너는 왜 날 따라오는 거야?”
“그거야 기수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그럼 돌아가.”
“싫어.”
이기수는 장난스럽게 잭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지금 솟구치는 화를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잭까지 이러니 미칠 것 같았다.
“잭, 정말 미안한데 이건 우리나라의 개인적인 일이야. 타국 사람인 네가 오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만 돌아갈래?”
“그래? 하지만 싫어.”
“왜?”
“내 모토가 자유라서? 워, 워 장난이야. 내 맘대로 행동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지금 이대로 널 두고 가면 엄청 후회할 것 같아서 말이야.”
“후회?”
“기수, 너 지금 표정이 어떤지 모르지? 너 지금 진짜 장난 아니야. 완전 악마 같다니까?”
잭의 말에 이기수가 표정을 어루만져보았다. 하지만 본인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이기수는 뭐가 이상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후, 네 맘대로 해. 내가 널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대신, 확실하게 말하지만 이건 한국의 일이야. 타국 사람인 네가 끼어들어서는 안 돼.”
“오케이, 오케이. 그건 걱정 말라고.”
잭이 호언장담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기수는 약간 미심쩍은 눈빛을 날렸지만 잭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하, 진짜…….”
이기수는 한숨을 내쉰 뒤 어느새 코앞까지 도착한 호텔을 바라보았다. 그는 곧바로 호텔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탄 후 13층을 눌렀다.
“기수, 근데 그건 뭐야?”
잭이 이기수가 들고 있는 서류를 가리켰다. 얇은 서류 한 개와 두툼해 보이는 서류였는데 두툼한 서류는 이기수가 움켜쥔 부분을 제외하고는 깨끗한 것으로 보아 이기수도 아직 펼쳐보지 않은 듯했다.
“증거.”
이기수가 짧게 대답했다. 잭은 뭔가를 더 묻고 싶었지만 점차 굳어지는 이기수의 표정을 보며 입을 다물기로 했다.
띵!
마침 13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이기수는 빠르게 내려 복도 끝에 위치한 1310호의 문고리를 잡았다.
덜컥.
“기수, 초인종부터…….”
콰드득!
잭이 말하기도 전에 문고리를 비트는 이기수, 그는 망가진 문을 잡아당겨 억지로 연 뒤 들어갔다.
‘저거 몬스터 재난 대비용 현관인데.’
A급 몬스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소재로 만들어진 문임에도 너무나 쉽게 부서지는 걸 보며 잭은 다시 한번 이기수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어딜 가시려고 하는 겁니까?”
뒤늦게 이기수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와 보니 그는 한국협회의 임원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임원들은 급히 어디로 떠나려는 듯 캐리어를 들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게…….”
“어디 가냐고 물었습니다.”
이기수의 물음에 임원들이 주춤주춤 물러나는 게 보였다.
‘흠, 한국협회 상황이 개판이라더니 도망가려던 중이었나?’
대략적인 한국의 상황을 알고 있는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도망가려는 것 때문에 이기수가 화난 것은 분명한 듯 보였다.
“자리에 앉으시죠.”
이기수가 가볍게 소파를 가리켰다. 그때 3명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둘은 이기수 쪽을 향해 달려들었으며 한 명은 재빠르게 창문을 향해 달렸다.
이기수 쪽으로 달려드는 두 명 중 한 명은 이기수를 피해 문 쪽으로 향했으며 한 명은 이기수에게 달려들었다.
파직, 파지직!
이기수의 손에서 전격이 뻗어져 나갔다. 3줄기로 나뉜 전격은 순식간에 각각 임원들을 향해 날아갔다.
“으헉!”
“큭!”
팅!
창문과 문 쪽으로 향하던 둘은 이기수의 전격을 맞고 경직되었지만 나머지 한 명은 손으로 이기수의 전격을 막아내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됐다!’
이기수에게 파고들었던 임원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스킬은 살짝만 닿아도 발동되는 스킬이었기 때문이었다.
<석화: 자신의 피부를 돌과 같이 만든다. 물건이나 다른 존재도 돌로 만들 수 있으나 그러기 위해선 직접 닿아야 한다.>
그를 A급 상위로 만들어 준 스킬이었다. 물론 상대가 이기수인 이상 이기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딱 한 번만 닿으면 되었다. 그럼 이기수의 몸은 석화될 것이고, 그사이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눈앞에 있는 이기수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손길을 따라 움직이는 이기수의 눈, 그 순간 그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상관없어!’
피할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그가 자신의 공격을 쳐내든 아니면 자신을 공격하든 닿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콰릉!
그 순간 그의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그대로 털썩 쓰러지는 남자.
“어이,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거 아냐?”
“안 죽었어. 그리고 내가 끼어들지 말라고 했잖아.”
이기수는 온몸이 벌겋게 익어버린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이기수의 말처럼 임원들이 도망가려 했던 창문과 문 쪽에는 어느새 얼음벽이 두껍게 솟아있었다.
“뭐 어때? 이 정도는 괜찮잖아? 그런데 확실히 전격 능력이 좋긴 좋네. 3명 모두 A급은 되어 보이는데 빠르게 제압한 거 보니까.”
“아직 약해.”
이기수의 말에 잭이 혀를 내둘렀다. 본인은 약하다고 말하지만 전혀 약하지 않았다. 같은 SS급 능력자인 그로서는 저렇게 빠르게 순간적 화력을 낼 수 없으니까.
물론 화력 특화인 사람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애매하긴 했지만 그의 경우는 범위 공격 특화여서 저 정도만 돼도 부러웠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직접 하나하나 대조해야지. 그리고 결정해야지. 죽일 건지 아니면 교화시킬 건지.”
이기수는 그 말과 함께 쓰러져있는 3명을 한곳에 모았다. 그리곤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커억!”
“헉!”
“흐읍!”
제각기 숨을 들이켜며 일어나는 임원들, 이기수는 깨어나는 그들을 보며 근처에 있는 의자 하나를 가져와 앉았다.
“자, 이제 이야기 좀 해 보죠. 우선 도망치려 한다는 건 당연하게도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거겠죠?”
“……”
셋 다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이기수는 그들의 대답을 원한 게 아니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다음 스탭으로 넘어갔다.
툭.
“이건 협회에서 보내준 자료입니다. 몇 번이고 읽었는데 정말 쓰레기더군요. 뇌물은 물론이고 부정 선발에 공금 횡령까지. 솔직히 말하면 이 정도만 해도 당신들 교도소에서 썩어야 한다는 거 알고 있죠?”
이기수가 던진 서류에는 온갖 비리들이 쓰여 있었다. 자세하게 쓰여있지는 않았지만 간단하게 정리된 것만 보아도 절로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왜 협회에서 당신들을 죽이려고 했는지 알겠더라고요. 사실 저도 죽이는 게 낫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일단 기다렸어요. 당신들에게 수배령이 떨어지길, 아니 솔직히 말하면 수배령이 떨어져도 저는 백번 양보해서 당신들을 감옥에 넣으려고만 했어요. 적어도 어제까지는요.”
이기수가 자신이 들고 있는 두꺼운 서류를 흔들었다. 그 서류는 좀 전에 이기수가 그들에게 던졌던 서류와 비교해 배 이상 두꺼웠다.
“그런데 죄가 더 있더군요. 솔직히 저는 이거 아직 안 읽었습니다. 받고 얼마 안 돼서 당신들이 도망가려 한다는 소식을 전달해 듣기도 했고, 준 사람이 당신들 앞에서 하나하나 읽으면서 처벌하라더군요.”
이기수는 그 말과 함께 송하나의 부하에게 이 서류를 전달받았을 당시에 송하나가 전화로 했던 말을 되새겼다.
―이게 뭡니까?
―이건 협회에서 전달해주지 않은 그들의 범행행적이에요.
―이걸 굳이 먼 타국까지 부하를 보내 저한테 주시는 이유는 뭔가요?
―그거야 당신은 물렁하니까. 진하는 당신에게 맡기고 신경 끄고 있는 것 같지만 당신 4명 모두 살릴 생각이지?
―…….
―그거 보고 정신 좀 차리라고, 그리고 똑바로 처벌해. 어설픈 이상향 집어넣지 말고. 아, 그리고 임원들 지금 짐 싸고 있다는 정보가 있으니까. 바로 출발해야 할걸? 이건 그 사람들 잡아들이고 나서 읽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정말 송하나의 말대로 서둘러 호텔에 도착하니 그들이 도망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면 수배령이 떨어져도 잡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정말로 귀신 같은 타이밍이었다.
“협회장은 어딨습니까?”
이기수의 물음에 3명은 서로를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기수는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전격을 피워올렸다. 그러자 3명은 앞다투어 빠르게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저희는 모릅니다!”
“이틀 전부터 안 보였습니다.”
“연락도 전혀 안 되고요.”
그들의 말에 이기수가 혀를 찼다. 말하는 표정으로 보아 거짓은 아닌 듯했다. 아니 애초에 그들에게는 의리라는 것 자체가 없으니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
“뭐, 협회장도 결국에는 잡힐 테니까 상관없습니다. 자, 그럼 당신들의 추가적인 죄를 한번 보죠.”
“사, 살려주시는 건가요?”
“살려만 주시면 제가 몰래 숨겨둔 비자금 모두를 드리겠습니다.”
“제게는 처자식이 있습니다.”
이기수는 비굴하게 무릎을 꿇는 그들을 보며 혀를 찼다. 이런 사람들이 협회의 중추였다니 토악질이 나올 정도였다.
“어차피 당신들은 평생 교도소에서 썩을 겁니다. 다만 죽을만한 정도인지 그래도 교도소인지를 정하는 겁니다.”
이기수는 3명을 닥치게 만든 후 두꺼운 서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바로 서류를 넘겼다.
“…….”
“기수? 뭔데 그래?”
잭은 첫 장부터 계속 아무 말 없이 서류를 넘기는 이기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첫 장을 넘기더니 그다음부터 점차 빠르게 장수를 넘기는 그의 모습은 뭔가 무서웠다.
‘뭐지?’
내용이 궁금해진 잭이 뒤에서 그의 뒤에서 몰래 그가 펼쳐보는 서류의 내용을 훔쳐봤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안색도 빠르게 굳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