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회귀 전 진하가 사랑했던 사람을 꼽으라면 총 3명을 꼽을 수 있었다. 하예진과 송하나, 그리고 이신혜.
하예진과의 사랑은 가족 같은 사랑이었다. 당연히 곁에 있어야 했고,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사랑이었다.
송하나와의 사랑은 공허한 사랑이었다. 무언가를 잃은 사람끼리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서로 열렬히 채우려는 사랑.
그리고 이신혜. 진하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짧게 사랑했고, 가장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오늘도 오셨네요?”
“아, 예.”
진하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아아?”
“아뇨, 오늘은 그냥 아메리카노로 주세요.”
진하는 그녀에게 커피를 받아 평소에 앉던 구석진 자리로 갔다. 사람이 많이 오지 않는 카페라서 그런가, 항상 구석진 자리는 비워져 있었다.
후릅!
조심스럽게 커피를 마시는 진하. 가끔씩 이곳에 오긴 하지만 진하가 딱히 그녀에게 무언가를 하진 않았다. 그랬다간 어떤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냥 그저 찾아와서 커피를 마실 뿐이었다. 그녀가 만든 이 카페 자체가 진하에게 잠깐의 휴식을 줬으니까.
띠리리리! 달칵.
“여보세요.”
―어디야?
“커피 마시고 있어.”
―요즘 들어 자주 가네?
“커피가 취향이라. 어차피 지금 당장은 내가 할 일은 없지 않아?”
진하가 할 일은 모두 끝내 뒀다. 각 분야의 사람이 협회를 공격하는 중이고, 그곳에서 진하가 낄 틈은 없었다. 그저 가끔씩 서로가 템포를 맞추게 조율만 할 뿐이지.
―협회에서 감찰과가 움직였어.
“몇 팀?”
―팀 단위가 아니라 감찰과 2, 3, 4과가 모조리 움직였어.
“이기수한테는 말했어?”
―혹시 몰라 전달했어.
“너도 조심해. 그 정도로 대량으로 움직였으면 너나 이기수, 아니면 다른 기업들을 노리는 걸 거니까.”
안 그래도 소리 소문 없이 전쟁 중인 상황이었다. 마치 땅따먹기를 하듯 협회의 영향력을 줄이고 있는 와중에 감찰과가 움직였다는 거는 3곳 중 하나를 치겠다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상한데.’
무력적인 방법은 그리 좋지 않은 방법이었다. 아무리 진하의 머리가 뛰어난 편이 아니라 해도 그 정도는 알았다. 실패 확률도 높을뿐더러, 지금 협회를 공격하고 있는 명분에 더욱 힘을 실어 주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역공이라도 안 당하면 다행이지.
“조심하고, 혹시 뭐 특이사항 있어?”
―너에 대한 감시가 조금 늘었다는 정도?
“그거야 뭐, 내가 아티팩트 전달자니까.”
지금 정보 길드가 무력적인 면에서 강한 이유가 진하의 아티팩트 때문이었다. 그가 제공한 장난감 총은 어떤 면에서는 사기적이었으니까. 협회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게 진하에게서 나왔다면 감시를 늘리는 건 당연했다.
―너도 조심해. 내 생각엔 너를 노리는 걸 수도 있어.
“그건 아닐걸, 나를 노렸다면 이렇게 대량으로 눈에 띄게 움직였을 리 없잖아.”
헌터 등록증 상 진하의 랭크는 아직 B등급이었다. 감찰과 전체가 움직인 거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고작 진하 한 명을 잡기 위해 움직였다기보단 세력 중 하나를 치겠다는 소리였다.
“혹시 모르니까 나도 조심하기는 할게.”
―그래. 그리고 우리 쪽도 너에 대한 정보 교란을 좀 더 시킬게.
전화가 끊기고 진하는 약간 식은 커피를 후르륵 마셨다. 이제 곧이었다. 협회가 완전히 영향력을 잃고 내부에서 송준하가 쿠데타에 성공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누구예요? 여자친구분?”
이신혜가 빙긋 웃으며 다가왔다.
“아뇨, 그냥 일 적인 사이예요.”
“헤에, 그렇구나.”
진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쓰게 웃었다. 보면 볼수록 회귀 전의 이신혜가 너무 생각났으니까.
“여자 친구는 없어요?”
이신혜가 진하에게 물었다.
“여자 친구라…… 여자 친구는 없어요. 대신 좋아하는 사람은 있죠.”
“왜 고백 안 하세요?”
“지금은 고백할 상황이 아니거든요.”
진하의 머릿속에 하예진이 떠올랐다. 가족 같은 사람인 하예진, 어느 순간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녀가 진하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건 그녀가 죽고 나서였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아니었다. 당장 할 일도 많고, 해결해야 할 일은 더욱 많았다. 지금은 그런 감정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오히려 약점이 될 가능성도 높았고.
“아쉽네요.”
“네?”
“아뇨, 아무 말도 아니에요. 커피 맛있게 드세요.”
이신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하는 그런 이신혜를 보며 문득 너무 여기를 많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휴식도 이제 끝이네.’
짧은 휴식이었다. 그래도 회귀 전의 인연을 만나 다들 잘 살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또 어려운 사람은 몰래 도와주기도 했고.
‘나도 제자리로 찾아가야지.’
진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주 오고 싶지만 아마도 한동안은 여기에 올 일은 없을 듯했다. 해야할 일들이 있으니까.
딸랑―
“다음에 또 오세요!”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진하는 거리로 걸어 나갔다.
* * *
“보스, 항암 그룹 쪽이 습격당했다고 합니다.”
“대피는?”
“잘 시켰습니다.”
부하의 말에 송하나가 혀를 찼다. 3곳 중 하나를 습격할 것 같았는데 항암 그룹이었다.
‘하긴 나 같아도 거기가 제일 쉽긴 하지.’
가장 본보기를 보여 주기 쉬운 상대였다. 신후 그룹이야 목줄만 제대로 조이면 되는 거고 이기수나 그녀는 무력적으로 상대하기가 약간 벅찰 수 있으니 당연한 거였다.
콰앙!
“보스! 경찰에서 압수수색이 들어왔습니다!”
“뭔 소리야?”
그들이 정보를 팔긴 해도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압수수색을 할 리 없었다.
“보스를 살인과 탈세 혐의로 구속한답니다.”
“쯧.”
보나 마나 이것도 협회의 짓이었다.
“끝까지 추잡하게 진행하네.”
고작 작은 방해였다. 이렇게 방해를 한다고 해서 그녀가 타격을 입는 것도 아니고, 협회의 분위기가 반전되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는 블랙 길드에 속했으니까.
“잠깐 자리를 피하자.”
구속당해도 바로 나올 수는 있었지만 느낌상 구속당하면 더 바짓가랑이를 잡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리해.”
송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하나, 둘씩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뭔가 불안한데…….”
* * *
“안 가.”
이기수가 자신을 찾아온 협회 직원에게 못을 박았다.
“아니, 이건 나라에서 온 공식적인 공문입니다. 안 가시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럼 네가 가든가.”
“이기수 헌터님, 지금 유럽 게이트 아직 마무리 안 된 상황이잖습니까. 거기서 우리나라만 아무도 파견하지 않으면 비난받는다고요.”
“우리도 뱀파이어들 막느라 피해 봤잖아. 그렇게 전달해.”
이기수의 말에 직원이 애원했다.
“그래서 그쪽도 이기수 헌터님만 부탁했어요. 뱀파이어 대공을 잡을 건데 경험이 있는 헌터가 필요하답니다.”
이기수가 질척거리는 직원을 밀어냈다.
“아무튼 난 못 가. 아니, 내가 왜 가야 해? 그냥 A급 헌터들 추려서 팀으로 보내.”
지금 이기수가 움직이면 협회를 공격하는 다른 3곳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이렇게 공격이 가능한 건 이기수라는 헌터 자체의 무게감이 무력적인 것을 억제하고 있어서였다. 그가 협회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띠리리리!
그때 협회 직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기수가 괜찮다는 눈짓을 보내자 그가 묵례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아뇨, 이기수 헌터를요?”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지 심각하게 대답하는 협회 직원. 뭔 일인가 싶어 청력을 높여 소리를 엿들으려고 하는 순간 협회 직원이 이기수에게 전화를 넘겼다.
“뭔데?”
“전화입니다.”
“협회면 안 받아.”
“세계 협회 연맹이에요.”
직원의 말에 이기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국내 협회면 몰라도 세계 협회 연맹은 이기수도 함부로 무시하기 어려웠다.
“여보세요.”
직원의 휴대폰을 받아 든 이기수가 말했다.
―@#%@#$
“안 가, 아니 못 가요! 거기도 SS급 헌터들 있잖아요!”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하아, 진짜 지금 그 소리가 아니잖아요. 그걸 그 뜻으로 받아들이면…….”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하아, 일단 알겠으니까 끊어 봐요.”
전화가 끊기고 이기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파지직! 퍼엉!
그의 손에서 방전되는 전격에 폭발하는 전화기. 이기수는 폭발한 전화기를 잠시 바라보다 협회 직원을 바라봤다.
“딸꾹!”
놀란 협회 직원이 차렷 자세로 이기수를 바라봤다.
“좋아, 갈게. 가는데, 혼자서는 못 가. 협회장이랑 이사들도 같이 가야 간다고 전해. 그것도 지금 당장.”
“넵!”
“그리고 핸드폰은 내 앞으로 청구하고.”
이기수가 핸드폰이었던 잔해를 바닥에 버리고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이 사실을 빠르게 진하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 * *
늦은 저녁. 밖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돌아가는 진하에게 전화가 왔다.
“어, 말해.”
―이기수 씨 한테 얘기 들었어?
“들었어.”
확실히 그냥 당해 줄 생각은 없는 건지 꽤나 거친 반항이 들어왔다.
“그래도 이 정도는 상정 내잖아. 안 그래?”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어설프다는 거?”
―맞아.
지금껏 신나게 얻어터졌으니 적한테도 카운터나 스트레이트가 날아오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고작 한 거라곤 잽 수준밖에 안 됐다. 심지어 감찰과를 모아 친 항암 그룹도 제대로 잡지도 못했고. 이쯤 되면 진하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너희들은 다 잘 해결했고?”
―해결하는 건 어렵지 않아. 시간이 걸릴 뿐이지.
“그래, 내가 너희들한테 앞으로의 계획이랑 정보 적어 놓은 일지는 당연히 가지고 있지?”
―그게 가장 중요한 거라면서.
“그거면 됐다.”
―네? 무슨…….
뚝!
진하가 전화를 끊었다.
“이야, 1차 게이트 폭주 때 도망이나 가고 권력에만 미친놈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예 그런 건 아닌가 보네.”
진하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리를 보며 말했다. 1차 게이트 폭주 이후로 온갖 병신 짓은 다 하고 송준하에게 쉽게 무너져서 그냥 덩치만 비대한 상대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아예 그런 건 아닌 듯싶었다.
“거, 불편하게 숨어 있지 말고 나오면 안 돼?”
진하의 말에 하나, 둘 거리를 나오는 감찰과 직원들. 진하는 그들을 보면 혀로 메마른 입술을 적셨다.
“편하게 같이 갈 거냐. 아니면 죽을 테냐.”
너무나도 뻔한 대사를 내뱉는 직원들.
“거, 너무하네. 평범한 헌터를 이렇게나 압박하고.”
진하가 주변을 둘러싼 직원들을 바라봤다. 언뜻 봐도 3자리 숫자는 넘어갔다.
“거절한 걸로 알지. 적 등급을 S등급이라고 상정하고 상대한다.”
감찰과를 이끄는 남자의 말에 진하가 쓰게 웃었다. 정말 작정하고 찾아왔다.
‘쯧, 어렵겠는데.’
그가 죽어도 계획은 변함없이 돌아가긴 할 거다. 그렇게 계획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진하가 혀를 차며 파우치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주머니에서 솟아오르는 삼각자들. 시작은 어디선가 들린 개 소리였다.
컹!
피비빅!
어두운 밤을 뚫고 진하가 날린 삼각자들이 적을 향해 날아갔다.
채쟁!
하지만 아무 소득 없이 튕겨져 나오는 삼각자들. 진하가 그 틈을 이용해 과거의 후회를 사용했다. 그러자 진하에게 깃드는 환영.
파바박!
그 순간 진하가 있던 자리로 수많은 암기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미 자리를 피한 진하가 파우치에서 새알탄을 꺼내 들었다.
퍼버벙!
새알탄이 터지며 순간 멈칫하는 적들. 진하가 그 틈을 이용해 포위망을 뚫었다.
“쫓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