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진하의 말에 신지하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아, 나 좀 봐. 다름이 아니라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어서요. 보내 주신 선물 덕에 아주 많은 이득을 봤답니다.”
“아, 그 선물이 그쪽으로 갔나요? 설마 신후 그룹으로 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네요.”
대한민국 재계 5위 신후 그룹, 유일하게 거대 길드라 칭할 수 있을 만큼의 자체적인 길드를 운영하는 대기업이었다. 단순히 순위만 놓고 보면 5위였지만 길드까지 합하면 종합적으로는 세 손가락 안으로 들어가는 그룹이었다.
“그래서, 단순히 감사의 인사가 다인가요?”
진하가 신지하를 살짝 떠보았다.
“물론 감사의 인사가 다죠. 감사를 표하는 데 다른 의도가 끼어 있겠습니까?”
하하, 웃으며 말하는 신지하. 진하도 그를 따라 웃으며 말했다.
“그쵸, 다른 의도는 굳이 끼워 넣을 필요가 없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얘기나 조금 할까요? 제가 커피를 대접해 드리죠.”
“아, 아뇨. 저는 커피는 괜찮습니다. 대신 맥주도 괜찮나요?”
진하가 손에 들고 있던 맥주를 보여 주었다.
“물론이죠. 저도 맥주를 마시는 게 좋겠군요.”
짝짝!
그가 손뼉을 치자 은발의 헌터가 나와 맥주를 내려놓고 커피를 치웠다.
“저분의 이름은 뭔가요?”
“아 비서요? 저는 그저 이 비서라고 부릅니다.”
‘이 비서라…….’
진하가 머리 한쪽에 그녀의 이름을 담아 두었다.
“자, 마실까요?”
“그러죠.”
팅!
둘의 맥주 캔이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그 시점부터 진하와 신지하는 신변잡기 등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간단한 취미서부터 이상형 등 별의별 것을 얘기하며 대화를 진행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겉으로만이지만 그들은 점차 친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 완전히 늦은 저녁이 되고.
“아, 이야기 재밌었네요. 그쵸?”
“그러게요. 재밌었어요.”
진하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반대였다.
‘하아, 머리 터지겠네.’
간단한 신변잡기 속에서 날카로운 질문이 가득했다.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가는 자칫 정보를 줄 수 있는. 거기다가 아직 본론은 얘기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쯧, 어지간하게 주도권을 주기 싫나 보군.’
진하는 그가 필요했고, 그도 진하가 필요했다. 다만 둘 다 주도권을 내주기 싫어서 말을 빙빙 돌리고 있을 뿐.
‘귀찮아.’
점차 지치는 게 느껴졌다. 이런 식의 대화는 기업가나 아니면 머리를 잘 쓰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였다. 그의 성격상 이렇게까지 머리를 쓰는 건 맞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야 잘했지만 분명 상대가 신지하인 이상 끝은 질 게 뻔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면 돌파가 편했다.
“우리 이제 본론을 좀 얘기할까요?”
마음을 먹은 진하가 먼저 판을 깔았다.
“흠, 그럴까요? 하긴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대화를 마무리하긴 해야겠죠.”
신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물어볼게요. 그쪽은 뭘 원하시죠?”
진하가 단도직입적으로 신지하에게 물었다. 그 모습에 잠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던 신지하가 빠르게 안색을 회복한 뒤 말했다.
“글쎄요. 뭐, 뜯어먹을 게 많아서 원하는 게 많긴 하죠.”
“그럼 그중에서 제일 원하는 거는요?”
“흠, 자유?”
‘목줄이 풀린 게 아니었나?’
신지하의 말에 진하가 생각했다. 분명 그 책자를 가져간 것은 신지하였다. 그 안의 내용을 생각하면 충분히 목줄을 풀 수 있었을 테고. 진하가 추가로 묻기도 전에 신지하가 대답했다.
“주셨던 선물이 좋긴 했는데 약간 모자라더라고요.”
“하하, 아, 그래요?”
‘얼마나 센 약점을 잡힌 거야?’
이도현 일파의 일부를 통으로 날릴 수 있는 장부였는데 그것으로 고작 목줄 하나 풀지 못했다는 걸 보면 약점이란 게 장난 아닌 수준인 것 같았다.
“그럼 반대로 이번엔 제가 편하게 묻죠. 원하시는 게 있으신가요?”
신지하가 물었다.
“협회를 옹호하는 대기업들과 거대 길드들 막아 주실 수 있나요?”
진하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신지하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 아무리 우리 그룹이라 해도 그건 불가능해요. 지금 항암 그룹 꼴을 보면 모르시나요?”
“항암 그룹처럼 아예 싸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움직이지만 못하게 하세요.”
“그래도 불가. 막을 명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기업의 목줄을 풀어 준다는 명분이라면 어떠신가요?”
진하의 말에 신지하의 이마가 꿈틀했다.
“그게 가능할 리 없잖아요.”
“돼요. 압도적인 무력과 명분이라면.”
“이기수 씨를 믿고 있나요? 그래요, 이기수 씨는 압도적인 무력이긴 하죠. 하지만 아무리 그라고 해도 대기업들이 피해를 입기 전에 협회를 처리할 수 있나요? 협회에서 본격적으로 목줄을 당기는 순간 다들 이끌려 나갈 거예요.”
신지하의 말에 진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기수가 아니에요. 제가 그러겠다는 거죠.”
“겨우 당신이?”
“뱀파이어 전쟁에서 보스 몬스터를 누가 죽였을까요?”
“당신이 죽였다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고작 A급에 올라서려는 당신이?”
“저 혼자라면 불가능하죠. 하지만 아티팩트를 썼다면?”
진하의 말에 신지하가 잠시 말을 멈췄다. 아티팩트, 확실히 진하가 쓰는 아티팩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아티팩트들이었다. 심지어 꽤 위력적인 것도 있다고 들었고, 그렇다면 그런 게 없다는 보장도 없었다.
“S급 보스 몬스터를 죽일 수 있는 아티팩트라…….”
“주인이 목줄을 당기면 개는 당연히 끌려오겠죠. 이해해요.”
진하가 맥주 캔에 담긴 맥주를 모조리 마셨다.
“하지만 모든 개들이 버틴다면 목줄이 과연 쉽게 당겨질까요? 그리고 그 상태에서 공격당하면.”
와그작!
맥주캔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단단한 곳이라 해도 무너질 수밖에 없죠.”
“하, 말을 참 재밌게 하시네요. 하지만 너무 위험부담이 커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어차피 이미 협회에게 어느 정도 찍힌 상태 아니셨나요?”
신지하가 진하의 말에 빙긋 웃었다.
“당신 말대로라면 대기업과 거대 길드를 설득하는 일들을 모두 제가 해야 하는 걸로 들리는데 그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랍니다.”
“당신에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요. 이런 일은 당신이 제격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럼 그동안 당신은 뭘 하고요?”
“글쎄요. 아마도 뒤통수칠 준비를 하지 않을까요?”
진하가 탁자 위로 손을 뻗었다.
“어떻게 하실래요. 받아들이시겠어요?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고요.”
아쉽지 않은 듯 말하는 진하를 잠시 바라보던 신지하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거 설득이 아니라 거의 강매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빠르게 얘기하는 게 나았을 수도 있었겠네요. 잘 부탁드려요.”
맞잡은 두 손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럼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조금 바빠서요.”
용건을 마친 진하가 몸을 일으켰다.
“당신도 다음에 또 봐요.”
은발의 헌터에게 미소를 지어 준 진하는 카페 문을 열고 나갔다.
딸랑―
진하가 나가고 혼자 남은 신지하가 약간 남아 있는 맥주를 바라봤다.
“하…… 정말,”
와장창!
“개떡 같네.”
신지하의 손길에 맥주잔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선물을 물어오는 제비인 줄 알았더니 독사였네.”
고작해야 신기한 아티팩트를 다루는 헌터 정도라고 인식했는데 몇 달도 되지 않아 그와 협상을 하는 자리까지 올라와 버렸다. 거기다가 자신 앞에서 당당하게 구는 것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건드리자니 앞에는 이기수, 암중으로는 정보 길드까지, 건드리기 너무 어려웠다. 더 이상 크게 만들면 안 됐다.
“이 비서.”
“비서라고 말하지 마라.”
“남은 부탁이 7개던가?”
“6개.”
“아, 그래 6개. 6개 모두 탕감하고 싶지 않아? 동생 치료비도 즉시 넣어 줄게.”
신지하의 말에 은발의 헌터가 움찔했다.
“이번 일이 모두 끝날 때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진하를 암살해. 그럼 나머지 부탁을 모두 없애 버리는 거로 해 주지.”
“그거면 되는 건가?”
“아니, 나랑의 연관점은 없어야지. 본 얼굴로 가. 아예 미리 조용히 접근해서 죽여. 그게 조건이야.”
신지하의 말에 은발의 헌터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뢰를 받아들이지.”
* * *
문방구로 돌아온 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신지하와의 말싸움은 정말 숨 막혔었다. 애초에 진하는 그런 답답한 공간에서의 말싸움은 딱 싫어하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하아, 그래도 대충 그림의 틀은 완성되겠네.”
무려 4곳에서 몰아치는 작전이었다. 절대로 통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여론까지 생각하면 5곳.
“물론 그런다고 완벽하게 이길 것 같진 않지만.”
아마 몰아내는 정도까지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한지에 먹이 스며들 듯 다시 돌아올 거고. 진하가 해야 할 일은 그 먹이 한지 밖으로 나왔을 때를 인지하고 모조리 처리하는 거였다. 진하가 협회를 공격하는 중앙이지만 동시에 가장 관심을 받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암살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
“그리고…….”
“그리고?”
진하의 뒤쪽에서 송하나가 나타났다.
“넌 왜 여깄냐?”
진하가 뚱한 눈으로 송하나를 바라봤다.
“내가 여기 온 게 한두 번은 아니잖아?”
“내가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참, 이상해 보통 여자가 이렇게까지 들이대면 한 번쯤은 안을 생각 안 하나?”
송하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미안하지만 난 나를 죽일 검을 껴안는 취미는 없어.”
“어째서 죽일 거라고 생각하지?”
“감이야.”
진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의 단호한 모습에 김이 샜다는 듯 송하나가 물었다.
“뭐, 그건 넘어가도록 하고, 아까 하던 혼잣말은 뭐야?”
“아, 잘됐다. 지금 항암 그룹에 작업 치고 있지?”
“어.”
“그거 모두 취소해. 그리고 진짜로 전폭적으로 지지해.”
“갑자기?”
“그리고 일이 끝날 때쯤 있는 힘껏 신후 그룹의 뒤통수를 후려갈겨.”
진하의 말에 송하나가 미소를 지었다.
“둘 다 먹게?”
“아니, 하나는 갈가리 찢어 다른 맹수들 먹이로 줘야지. 그래야 나를 건들지 않지.”
“그럼 신후 그룹에 대해서 조사해야겠네.”
“어, 모조리 조사해. 그리고 내가 말했던 은발의 헌터에 대한 것도.”
진하의 말에 송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조사할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안 해도 돼. 대놓고 조사해.”
진하의 말에 송하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놓고 조사한다는 건 말 그대로 언제든지 배신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인데 그걸 보여 줘서 좋을 건 없었다.
“어차피 일이 끝날 때까진 못 건드려. 그리고 이미 저쪽도 배신할 건 알고 있을 텐데 괜히 조심히 조사하면서 시간 축내지 마. 그냥 빠르게 조사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는 게 더 나아.”
미래에서 대기업들이 얼마나 썩었는지 진하가 제일 잘 알았다. 송준하가 집권을 잡은 협회가 완전히 썩은 부분을 도려냈을 때 가장 많이 움직인 게 이기수와 진하 같은 송준하와 가까운 성향을 띤 헌터들이었으니까.
“아마 그쪽도 당연히 이쪽이 뒤통수를 칠 거라고 생각하고 준비할 테니까 그냥 당당하게 조사해.”
“뭐, 그렇게 얘기한다면야.”
“명심해 반드시 신후 그룹보다 한 타이밍만 빨라야 돼. 너무 빠르면 일이 어려워지고 너무 느리면 오히려 우리가 물려.”
“그건 걱정 마.”
송하나가 진하의 어깨를 잡았다.
“그나저나 대충 일이 끝났으면 이제 좀 잘 생각 없어?”
“자야지.”
고개를 끄덕인 진하가 몸을 일으켰다.
“저쪽에 야상 침대랑 이불 있으니까 잘 자라. 들어올 생각 말고.”
드르륵, 탁!
말을 마친 진하가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으으…… 진짜 저 고자 새끼.”
송하나가 이를 갈았다.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이 대놓고 유혹하면 넘어가야 하는 게 정상인데 손끝 하나 넘어올 생각을 안 했다. 처음에는 분파를 위해 한다는 생각으로 했는데 지금은 반드시 넘어뜨려야겠다는 오기가 들었다. 반드시 넘어뜨리고 싶었다.
“어디 언제까지 안 넘어가나 보자.”
송하나가 투덜거리며 문방구의 불을 껐다. 그리고 불이 꺼진 문방구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빛.
치이익.
“목표 이상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