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깜빡깜빡.
“정신이 좀 들어?”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얼굴은 하예진이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진하를 바라보는 그녀.
진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어, 나쁘지 않아.”
“다행이네요. 검은 연기가 끝없이 나왔을 땐 뭔 일이라도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하예진의 뒤에서 송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쪽을 쳐다보니 그녀가 팔짱을 낀 채로 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워, 제때 전달해 줘서.”
그녀가 아티팩트를 제대로 전달해 줬기에 그가 멀쩡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아, 그건 아닌가?’
뱀파이어 로드가 치료해 줄려고 했었으니 전달받지 않아도 무사히 일어나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야 정말 운이 좋았던 거고, 결국 그녀가 전달해 줬기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동맹 상대가 죽으면 안 돼서 준 것뿐이에요. 애초에 우리 둘은 운명 공동체니까요.”
뻔뻔하게 말하는 그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진하는 속으로 키득거렸다.
그녀가 부끄러워할 때는 왼쪽 귀가 묘하게 까딱거리는데 지금 딱 왼쪽 귀가 까딱거렸다.
‘송하나도 조금 바뀌었네.’
회귀 전의 송하나는 뭔가 항상 영혼이 일부가 빠져 있는 느낌이 강했는데 지금의 송하나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뭔가 신기했다.
‘어쩌면 정말로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어.’
그가 알던 약간은 미쳐 있던 송하나가 아니라 정상인 송하나를 볼지도 몰랐다.
물론 아직까지 그녀를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이성적인 면이나 약속을 지키는 면을 믿기는 하지만 사람으로서의 인성은 믿지 않았다.
사락.
“일어났어?”
천막이 걷히며 이기수가 들어왔다.
“어, 왔다. 그러고 보니 얼마나 지났지?”
진하의 물음에 하예진이 입을 열었다.
“하루, 전투가 끝난 지 하루가 지났어.”
“피해 통계는 났어?”
진하의 물음에 이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A급 생존자 2312명, B급 1만 5명, C급 2만 8421명이 살았어.”
“사망자는?”
“모두 합해서 6만2천914명.”
“많이 죽었네.”
“그래, 많이 죽었지.”
이기수가 이를 가는 게 보였다.
왜 이를 가는지 이유를 아는 진하가 이기수를 다독였다.
“적당히 화내라, 그렇게 화낸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나도 알아.”
“그리고 그 화는 다른 곳에 풀어야지.”
“다른 곳?”
“그래, 뒤집어야지.”
진하의 말에 이기수가 물었다.
“벌써? 원래대로라면 몇 달 뒤의 일 아냐?”
“협회에서 바보짓을 했는데 굳이 몇 달 뒤를 기다릴 필요는 없지.”
진하가 몇 달에 걸쳐 계획을 세웠던 이유는 협회가 견고하기 때문이다.
무력적으로도 견고했지만 명분 적으로도 매우 견고했다.
일반인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게 협회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다면 얘기는 달라졌다.
‘스스로 무덤을 팠는데 묻어 주지 않는다면 예의가 아니지.’
협회는 반대 세력을 줄이겠다고 소극적으로 움직여선 안 됐다.
그렇게 한 행동이 결국 그들을 목을 조르게 된 밧줄이 될 테니까.
“송하나, 지금 어느 정도 정리했어?”
진하의 말에 송하나가 그를 째려보았다. 갑작스런 시선에 진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름.]
“좀 적응하지? 언제까지 숨기고 살려고.”
진하의 말에 송하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아까 물었던 질문에 대해 대답을 했다.
“겨우 통합이 끝난 정도야. 아직 다른 쪽으로는 손도 못 댔어.”
“통합이 끝났으면 됐어. 정보 길드를 이용해서 밑밥 좀 뿌려.”
“밑밥?”
“어. 그리고 한진석한테 연락해, 시작하자고.”
“알았어.”
“근데 너 말투가 바뀐 거 알지?”
진하의 지적에 송하나가 혀를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들리는 텔레파시.
[꼬우면 너도 이름 부르지 말던가.]
송하나의 텔레파시에 진하가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녀는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는지 곧바로 막사를 나갔다.
“하.”
‘역시 저번부터 말 놓은 건 고의였나?’
사실 반말해서 나쁠 건 없지만, 그녀와 아주 가까워지는 게 아직은 어색한 그의 입장에서는 영 좋은 편은 아니었다.
‘에휴, 뭐 쌤쌤으로 치자.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대충 생각을 털어낸 진하가 이기수를 바라봤다.
“기수야, 너 혹시 다친 곳 있어?”
“아니, 없어.”
“그럼 나랑 같이 어디 좀 다녀오자.”
“어디?”
“협회 약점 만들러.”
진하는 그 말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직 일어나면 안 돼!”
“아냐, 괜찮아.”
몸을 일으킨 진하가 말했다.
생각보다 몸이 가뿐했다.
확실히 정신 속에서 로드가 말한 대로 신체 능력치 또한 올라간 것 같았다.
당분간 적응하려면 힘들긴 하겠지만 나쁘지 않았다.
“후, 젠장 쉬기는커녕 일만 넘치네.”
“그럼 좀 쉴래?”
진하의 혼잣말에 이기수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니,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럴 순 없지.”
진하가 겉옷을 입으며 말했다.
“예진아, 다녀올게.”
“진하야.”
“어?”
하예진의 부름에 진하가 그녀를 보았다.
“아냐, 몸조심하라고. 아직 회복된 지 얼마 안 됐잖아.”
“걱정 마. 약속했잖아. 몸 함부로 안 굴린다고.”
“그러고 굴리니까 걱정돼서 하는 말이지.”
하예진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이번에는 위험한 거 안 해.”
장난스럽게 알통을 보인 뒤 진하가 막사를 나갔다.
진하가 나간 곳을 가만히 바라보던 하예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있는 게 없네.’
그녀는 송하나처럼 한 단체의 장도 아니었고, 이기수처럼 무력이나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뭔가를 돕고 싶은데 도울 수가 없었다.
아직은 그저 그가 다치고 돌아오면 치료하는 게 그나마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아, 짜증 나…….”
마음 같아선 진하를 붙잡고 나도 뭐 할 게 없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건 진하를 방해하는 거니까.
사락.
“음? 진하는 일어난 건가?”
막사로 들어온 하준수가 비어 있는 침상을 보며 물었다.
“네, 일어나자마자 할 일이 있다고 나갔어요.”
“뭐, 그럴 만하지. 계획한 게 워낙 방대하니까.”
“길드장님. 길드장님도 진하가 부탁한 게 있어요?”
하예진의 물음에 하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고.”
그의 말에 하예진은 기분이 더욱 처지는 걸 느꼈다.
“무슨 일 있나?”
하예진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걸 느낀 하준수가 그녀에게 물었다.
홱!
“길드장님 지금 바빠요? 앞으로 할 일 있어요?”
“아니, 당장은 없다. 내부 정리도 해야 하니까. 그리고 나서는 할 일이 생기겠지만 당장은 없다.”
“그럼 저 좀 단련시켜 줘요.”
하예진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진하가 가는 곳이 그녀가 몰랐던 세계면 따라 들어갈 것이고, 도움이 안 된다면 도움이 되게 만들면 됐다.
‘절대 포기 안 해.’
* * *
야심한 밤. 어느 부둣가의 창고 위.
진하는 바닷바람을 쐬며 부둣가를 바라봤다. 파도가 일렁이는 부둣가는 아무도 없는 곳이라서 그런지 조용했다. 하지만 잠시 후 아무도 없는 부둣가로 밝은 라이트와 함께 차량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드디어 왔네.”
“저놈들이야?”
“어, 블랙 스네이크, 아까 설명했던 대로 협회랑 연결된 블랙 길드들 중 하나야.”
이기수의 물음에 진하가 답했다.
“내 힘이 필요하다고 해서 어디에 쓰나 했더니 이런 데 쓸 줄이야…….”
“그래서 싫어?”
“싫다고는 안 했다. 뭐 블랙 길드면 없애야 하는 게 당연한 곳이고 협회랑 관련까지 있다면 족쳐야지.”
이기수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족쳐야 되는 놈들이지. 그리고 얘들이 시작인 건 알고 있지? 아직 엄청 많이 남았다.”
“그렇게 많아? 얼마나?”
이기수의 물음에 진하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세 개?”
“아니, 서른 개.”
크고 작은 블랙 길드를 다 합치면 무려 30여 개나 되는 블랙 길드가 협회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양아치나 다름없는 작은 블랙 길드도 있었고, 어느 중견 길드는 간단히 씹어먹을 정도의 커다란 블랙 길드도 있었다.
‘내가 이걸 기억해 내겠다고 또 그 짓을 할 줄은 몰랐지만.’
과거에 뉴스에 떴던 협회와 연관됐던 블랙 길드의 목록을 기억해 내기 위해서 지능을 올리려고 아폴로를 30개나 뜯어 먹었다. 물론 그래봐야 3,000포인트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진하의 입장에서 그런 자세를 취한 건 정말 고역이었다. 무엇보다…….
‘하아, 그러니까 오지 말라니까.’
가게로 들어온 송하나와 마주쳤을 때의 부끄러움을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아찔했다.
‘그나저나 여태껏 포인트를 너무 막 썼나? 조금 아슬아슬한데.’
이제 B급 마석도 슬슬 판매 시 포인트가 극심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포인트야 아직 널널한 편이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앞으로 포인트를 벌기 위해선 A급 마석이 필요했다. 하지만 A급 마석부터는 구하기 힘든 편에 속했고 미래까지를 생각하면 조금 아슬아슬하다고 판단됐다.
‘그래도 이번 일만 끝나면 된다.’
협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아낌없이 포인트를 쓰고 있긴 했지만 일단 협회만 무너뜨리면 그다음부터는 포인트가 나갈 곳이 거의 없었다. 그냥 몬스터만 때려잡으면 되니까.
“가자.”
들고 있던 다 마신 우유갑을 뒤로 던진 진하가 복면을 뒤집어쓰며 말했다.
“근데 능력 쓰면 어차피 들키는데 꼭 써야 돼?”
복면을 쓰면서 이기수가 물었다.
“어, 능력으로 티 나는 거랑 얼굴을 보이는 거랑은 다르니까.”
휘익!
그 말을 한 진하가 차량을 향해 발을 박찼다. 그 모습을 보며 급하게 복면을 쓴 이기수도 진하를 따라 발을 박찼다.
타닥.
가장 먼저 차량 위로 가볍게 내려선 진하.
“누구냐!”
그런 진하를 보며 주변을 경계하던 조직원 중 한 명이 외쳤다.
“몰라도 돼.”
퍼억!
진하가 한 명을 때려눕히며 말했다.
삐익!
그 모습에 경계를 하던 다른 조직원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모여드는 조직원들.
“너무 많은 거 아냐?”
뒤늦게 진하를 따라 차량 위로 내려선 이기수가 진하를 보며 물었다.
“이 정도가 많은 건 아니지. 이 새끼들 기껏해야 중소 블랙 길드야.”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조용히 몇몇만 때려눕히고 장부만 가져오는 거 아니었어?”
이기수의 물음에 진하가 답했다.
“그런 방법도 있긴 한데 여기선 안 사용할거야.”
“왜? 그런 거 사용하는 아티팩트도 있었잖아.”
“내가 말하지 않았어? 아티팩트의 가장 큰 단점.”
확실히, 아티팩트를 이용하면 편하긴 했다. 과거 사용했던 탐정 돋보기를 사용하면 순식간에 찾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가장 큰 단점이 하나 있었다. 기본적으로 내구도와 수명이 약하다는 것. 안 그래도 탐정 돋보기 같은 경우는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아티팩트였다. 언제 수명이 다할지도 모르는데 커다란 블랙 길드면 모를까 이런 중소길드에까지 쓰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러니 대체재인 이기수를 사용하는 게 나았다.
“이렇게 작은 곳은 네가 해주는 게 더 나아. 무엇보다 경고용으로도 좋고.”
협회 수뇌부들이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적으로 돌렸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그 속에서 분열이 일어날 테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에휴, 나도 모르겠다.”
파지직!
손에서 전격을 피우는 이기수.
“덮쳐!”
한 조직원의 말을 시작으로 모든 조직원들이 진하와 이기수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