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오해를 푼 이기수는 송준하가 안내해 준 막사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진하가 편안하게 누워 있었고.
‘하, 편하다.’
송준하가 가지고 온 수면제로 진하를 깊이 재운 덕에 더 이상 진하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뚝, 뚝.
지금도 링거를 통해 계속해서 옅은 수면제가 들어가고 있었기에 웬만해서는 깰 일도 없었다.
사락.
그때 막사의 천막이 걷히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하예진과 하준수였다.
하예진이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준수까지 들어올 거라는 건 예상하지 못한 이기수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당신 살아 있었어요?”
그를 놓고 갔을 때 내심 그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S급과 A급의 차이였으니까.
그런데 하준수가 매우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
“내가 안 죽는다고 말했을 텐데?”
하준수의 말에 이기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설마 그게 그저 안심시키려는 말이 아니라 진짜였다니…….
‘몇 십분간 버티다 지원이 왔거나 도망간 건가?’
하준수의 스킬을 생각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제한적인 불사였으니까.
“어떻게 살아남으셨어요?”
“죽였다.”
“예?”
순간 이해를 하지 못한 이기수가 되물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정신을 차리니 뱀파이어의 목을 물어뜯고 있더군.”
하준수의 말에 이기수는 할말이 없었다. 본인이 기억 안 난다는데 뭐 어쩌란 말인가.
“아무튼, 다들 자리에 앉으세요.”
이기수의 권유에 둘 다 자리에 앉았다.
“근데 하예진 씨는 지금 여기 와도 돼요?”
전투 후에 가장 바빠야 할 게 치료사였다. 원래대로라면 그녀도 여기에 있으면 안 됐다.
‘송준하 씨가 힘써 준 건가?’
“급한 환자는 더 이상 없어요.”
이기수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반박하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애초에 가벼운 부상자를 제외하고 중한 부상자는 그리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치료사가 남아돌아요.”
그런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이 씁쓸해 보였다.
‘하긴…….’
송준하에게 들은 바로는 치료 구역의 피해가 극심했다고 했다.
뱀파이어의 습격에 제대로 대응할 사람이 적었다고…….
당연히 전방을 제외하고 뒤에는 부상당한 A, B등급 외에는 그 아래 등급의 헌터들밖에 없었을 테니 당연한 결과였다.
부상자들이야 당연히 막는 과정에서 대부분 전사했을 것이고.
‘피해가 대략 6만 명이었나.’
그중 A급까지는 통계 처리가 된 상황이었다.
A급은 살아남은 헌터가 대략 2천여 명.
그럼 5만 4천 명이 약간 안 되는 사망자가 그 아래 등급에서 발생했다는 소리였다.
B급 지원 온 게 3만여 명이었으니까 C, D급에서 죽은 사람이 무조건 3만은 넘는다는 소리였다.
“그나저나 진하는 왜 이러는 거예요?”
하예진이 주제를 바꾸며 물었다.
“아, 그게…….”
뭐라고 설명해 줘야 하긴 했지만 그도 사실 원인을 몰랐다.
그저 도착하니 저런 상태였던 거지.
‘그 이상한 존재 때문인 건가.’
진하의 몸에 깃들어 있던 이상한 존재 때문인가 싶기도 했지만 송준하를 통해서 확인한 결과 몸에도 이상이 없고, 관측한 영혼도 깨끗했다.
“저도 원인을 모르겠어요.”
이기수의 말에 하예진이 진하에게 다가갔다.
―리저렉션.
잠시 환하게 빛났다가 사라지는 불빛.
이미 정상인 몸이기에 스킬이 반응하지 않았다.
“일단은 좀 더 대형 병원으로 가서 한번 확인해 보는 걸로 하죠.”
이기수의 말에 하예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펄럭.
그때 천막이 걷히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을 보며 하준수와 하예진이 물음표를 띄웠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니까.
“여긴 어쩐 일이죠? 송하나 씨?”
이기수가 천막 안으로 들어온 송하나를 보며 물었다.
진하에게 들은바 그녀는 지금 한참 세력 싸움을 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이곳에 올 필요가 없는 존재였다.
“진하 씨 부탁으로 왔어요.”
송하나의 말에 셋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하씨? 무슨 부탁을 받았다는 거죠?”
하예진이 경계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요. 그저 만약에 쓰러지면 이걸 먹이라는 부탁을 미리 받았을 뿐이라서.”
송하나가 손에 들린 생수병 두 개를 흔들었다.
“한번 확인 좀 하죠.”
이기수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같은 길을 가는 동료인 건 맞았지만 그 이전에 블랙 길드 한 분파의 보스이기도 했다.
아무리 정보 길드가 중립에 가까운 길드라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자, 여기요.”
아무렇지 않게 물병을 넘기는 송하나. 이기수는 그녀에게 받은 물병을 아주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물병을 건든 흔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정보 확인.”
<생수: 맑고 투명하다. 마시면 모든 게 정화될 것 같다. 모든 고민 또한 사라질지도?>
생수의 정보에서도 무엇인가 문제 될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없네요. 그럼 진하는 이렇게 될 걸 미리 알았던 건가요?”
“그것까진 모르겠네요. 그저 이번 전쟁이 끝나면 찾아와서 달라고만 했어요. 필요할 수도 있다고.”
그녀의 말에 이기수는 마음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이런 것까지 준비했다는 건 진하가 애초에 보스 몬스터를 잡을 준비를 했다는 거였다.
이제 고작 B급 헌터인 그가.
물론 실제 능력은 A급 수준이지만 그렇다해도 자존심이 상했다. 그만큼 아직까지는 이기수가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내가 그렇게 못 미덥냐.’
누워 있는 진하를 보며 이기수가 속으로 물었다. 분명 못 믿어서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애초에 그에게 전장을 맡긴다는 말 자체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약간은 분했다. 진하의 기준에서 그가 아직 약간 미달이라는 소리니까.
‘하, 그러고 보니 아직 몇 달도 되지 않았네.’
진하를 구할 때도 생각했지만 정말 진하를 안 지 몇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많이 의지하고 믿어 버리게 되었다.
“먹여야겠군요.”
이기수가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버리며 말했다.
진하가 자신을 믿는다는 거나 자신이 그를 의지한다는 둥 이런 쓸데없는 생각은 나중에 혼자 있을 때 해도 되었다.
지금은 진하의 회복이 중요했다.
“주세요, 제가 먹일게요.”
하예진이 굳은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기수는 괜찮다고 말하려다 이내 조용히 생수병을 건네고 뒤로 물러났다.
하예진의 표정이 너무나 단호했으니까.
‘이거 다른 의미로 큰일 났네.’
그의 눈에 미묘하게 기 싸움하는 두 여자가 보였다.
생수병을 받아 든 채 송하나를 노려보는 하예진과 뻔뻔한 표정으로 하예진을 바라보는 송하나.
‘깨어나도 문제겠는데?’
“뭐 하나, 안 먹일 건가?”
그때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하준수가 물었다.
둘의 시선이 하준수에게 향했다.
“뭘 그리 쳐다보는 거지?”
‘허허.’
이기수가 속으로 한탄을 했다.
나름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연애 쪽으로 눈치가 아예 꽝이었다.
“우린 나가죠.”
이기수가 하준수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 둘이 기 싸움하는 거에는 말려들기 싫었다.
진하의 치료야 직접 마련한 만큼 아마도 먹으면 일어날 게 분명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사락.
이기수와 하준수가 나가고 조용히 서로를 보던 두 여자 중 송하나가 말했다.
“안 먹일 건가요?”
“먹일 거예요.”
하예진이 진하의 머리 쪽에 베개를 집어넣어 상체를 약간 세웠다.
그리고 입술을 열고 물을 쪼르륵 부었다.
“그렇게는 못 먹을 텐데요? 키스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키득거리며 묻는 송하나.
“하,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예진이 콧방귀를 뀌며 진하의 목의 특정 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이렇게 기도를 닫고 식도를 여는 게 더 빠르죠.”
둘이 서로를 의식하며 기 싸움을 하는 사이 생수 한 병이 모조리 들어간 진하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무언가 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올라오는 진하.
“일단은 한 병 더 먹이죠.”
그 모습을 본 송하나가 기 싸움을 중단하며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요.”
따다닥!
하예진이 생수 한 병을 더 까서 진하의 입에 흘려 넣었다.
치이익!
그러자 더 강하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계속해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하예진이 진하의 손을 붙잡았다.
‘얼른 좀 깨어나.’
* * *
‘여긴 어디지?’
갑작스럽게 의식이 부상한 진하가 주위를 돌아봤다.
분명 그의 기억은 도깨비 가면을 쓰는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의 기억은 전혀 나지 않았다.
띠링!
<몸의 정화가 시작됩니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시스템 창 하나가 떠올랐다.
“성공한 건가?”
몸의 정화가 시작됐다는 것은 송하나가 그에게 생수를 먹였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전쟁이 끝났다는 것이었다.
비앙카가 죽었다는 뜻이기도 했고.
“내가 죽인 거…… 겠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진하 스스로가 죽이고 부작용으로 기억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그가 실패하고 이기수가 비앙카를 잡았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그가 죽지 않았다는 정도?
“후, 여기가 대충 어딘지도 알 것 같고.”
아마도 저번에 들어와서 자신의 분신을 만났던 곳과 같은 공간인 것 같았다.
‘아, 잠깐.’
순간 진하의 머릿속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과거에 트라우마 하나 때문에 개고생을 했던 게 생각났다.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지이잉!
진하가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진하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 문 하나가 생겨났다.
“그럼 그렇지.”
진하가 전투 자세를 취했다.
뭐가 나올지 모르지만 아마도 한바탕할 게 뻔했다.
‘뭐가 나오려나.’
저번과 같이 자신이 나올 수도 있고 아니면 뱀파이어화를 막기 위해 먹은 거니 뱀파이어가 나올 수도 있었다.
철컥!
끼이익.
문이 열리며 문 뒤쪽 공간이 드러났다.
저벅, 저벅.
그리고 진하의 정신 공간으로 들어오는 한 사람.
“아, 젠장.”
뱀파이어였다.
차라리 진하의 복제였다면 그나마 쉬웠을 텐데 뱀파이어였다.
‘근데 누구지?’
처음 보는 뱀파이어였다.
그의 목을 물었던 이슬라도 아니었고 나머지 3대 대공과도 닮은 얼굴이 아니었다.
완전히 처음 보는 얼굴.
그나마 뱀파이어의 특징인 적색 눈과 송곳니 그리고 새하얀 피부만이 그가 흡혈귀라는 것을 알릴 뿐이었다.
“자네 뭐 하나?”
문을 열고 들어온 존재가 진하를 보며 물었다.
‘뭐지? 페이크인가?’
어쩌면 말을 걸고 기습을 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가 경험한 특성상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허, 뭐 하는 인간인가 했는데 자네도 참 특이하군.”
뱀파이어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생겨나는 테이블.
‘저게 뭐지?’
그의 정신 공간인데 그가 원하지 않는 물건이 생겼다.
‘없어져라. 없어져라.’
진하가 테이블을 보며 깊게 상상했다. 테이블이 없어지는 모습을.
“그렇게 뚫어져라 본다고 뭐 안 바뀌네. 어서 와서 앉게.”
태연한 표정으로 자리를 권하는 뱀파이어.
그쯤 되자 진하도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싸우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보면 시스템창도 이미 정화를 시작하고 있다는 소리를 했다.
정신 때와는 뭔가 다른 듯했다.
저벅, 저벅.
진하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여전히 아무런 생각 없이 진하를 쳐다보는 뱀파이어.
그 모습에 진하는 완전히 긴장을 풀고 뱀파이어가 마련한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마주 보고 얘기하니 얼마나 좋아.”
“죄송한데 누구시죠?”
“아, 생각해 보니 너는 나를 모르겠군. 간단하게 로드라고 부르면 되네.”
그의 말을 진하가 곱씹었다.
‘로드, 로드라…….’
“뱀파이어 로드?!”
“그치, 뱀파이어 로드라네.”
“하지만 그건…….”
“상상 속의 몬스터라고?”
로드가 진하의 말을 가로챘다.
“쯧, 뱀파이어 일족이 몬스터라니 아주 갈 데까지 갔군. 에잉! 요즘 애들이 문제라니까.”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구시렁거리는 로드.
그런 그를 보며 진하는 뭔가 익숙함을 느꼈다.
‘할아버지 같아.’
아주 어릴 때이지만 예전에 봤던 그의 할아버지가 로드와 비슷했다.
뭐랄까…….
‘꼰대?’
“꼰대라니, 내가 얼마나 젊게 사는데! 그 말 취소하게.”
로드의 말에 진하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설마 내 생각을…….’
“안 읽히네. 그냥 자네의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네.”
진하가 자신의 얼굴을 만져 봤다.
그럴 리 없었다. 그는 베테랑 헌터로서 포커페이스를 나름 잘 유지하는 편이었다.
“밖에선 모르겠는데 여기는 정신세계라네. 아주 생각하는 그대로 표정을 짓는구먼.”
로드가 혀를 찼다.
“아…….”
진하가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 자세를 바로 했다.
‘아니, 근데 뱀파이어면 적 아닌가?’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게. 내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그런데 제대로 얘기할 생각은 없는가?”
“아, 죄송합니다.”
진하의 사과에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면 됐네. 그래, 뭐부터 얘기하는 게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로드가 입을 열었다.
“그래, 아무래도 그게 제일 궁금하겠지? 우선 그 대공이라 말하던 아이는 죽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