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54화 (54/202)

#054

촤아악!

이기수가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진하가 눈을 뜨는 순간 찐득한 살기를 느낀 그는 침을 삼켰다.

“진하야?”

그가 아직 쓰러져 있는 진하를 불렀다. 하지만 미동도 없이 쓰러져있는 진하.

“김진하.”

이기수가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그를 불러보았다.

까득, 까득, 까드득!

갑작스럽게 들리는 이 가는 소리. 이기수는 한층 긴장감을 높이며 진하를 바라봤다.

파악!

순간 고개가 들리며 보이는 진하의 얼굴. 검은색 눈동자에 살기 어린 기운까지.

이기수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파바바박!

쓰러져 있던 진하가 이기수에게 달려들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

“야!”

이기수가 그런 진하를 피하며 그를 불렀다.

하지만 진하는 아예 인식을 못 하는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니, 이기수를 향해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빨라.’

그가 아는 진하의 속도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였다. 눈대중으로 비교해 봐도 A급 끄트머리에 있는 수준이었다.

대신 그만큼 단순했다.

휘익! 휙!

“크아악!”

단순한 페이크에도 속을 정도로 단순하게 움직이는 진하.

그냥 속도만 빠른 동물 같았다.

“정신 차려!”

이기수가 다시 한번 외쳐 봤지만 진하는 계속해서 그에게 달려들 뿐이었다.

“젠장!”

파지직!

이기수가 진하를 향해 전격을 쏘았다.

“크악!”

전격을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진하. 그런 그를 보며 이기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 그냥 기절해 있어라.’

꽤 강하게 전격을 쏘았다. 웬만한 헌터라면 기절할 정도로. 이 정도에서 기절하길 이기수는 바랬다.

하지만 이기수의 바람과는 달리 몸을 뒹굴며 고통스러워하던 진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다시 이기수에게 달려들었다.

“젠장할.”

이를 악문 이기수가 진하를 피하며 다시 전격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격을 피하는 진하.

그 모습에 이기수가 다시 전격을 여러 번 날렸지만 진하는 대부분의 전격을 손쉽게 피해 냈다.

‘적응하고 있어.’

마치 야생동물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물이 순식간에 배우듯 그의 전격을 한 번 맞더니 이제는 곧잘 피한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아까 시험 삼아 넣었던 페이크에도 잘 걸리지 않고, 반대로 스스로 페이크를 걸기 시작하는 진하.

“후우, 용서해라.”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 이기수는 속으로 진하에게 용서를 빌었다.

콰앙!

순식간에 사라진 이기수가 진하의 앞에 나타나 머리를 짓눌렀다.

“크륵! 캬악!”

비명을 내지르는 진하.

쾅!

이기수가 진하의 머리를 땅바닥에 충돌시켰다.

“크륵!”

쾅!

소리가 들리자마자 다시 머리를 땅에 내리꽂는 이기수.

“ㅋ…….”

쾅! 쾅! 쾅!

연속해서 머리를 내리찍으며 이기수는 기도했다. 어서 빨리 진하가 기절하기를.

그렇게 몇 번이나 더 진하의 머리를 땅에 내리꽂은 이기수는 더 이상 그의 입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머리에서 손을 떼 봤다.

꿈틀.

콰앙!

또 한 번 진하의 머리가 땅에 틀어박혔다.

이번에는 완벽하게 기절했는지 진하의 몸에서 아무런 미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완벽하게 기절한 걸 확인한 이기수가 올라탄 몸에서 내려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어떡하지?”

이대로 진하를 둘 순 없고, 그렇다고 계속 감시할 수도 없었다. 아직 도시에서 일어나는 전투는 현재 진행형이었으니까.

* * *

“죽일 거다! 인간 놈들 따위 죽일 거야!”

“그만 좀 뒈져!”

푸북, 푹!

마지막으로 날뛰는 뱀파이어의 몸에 수많은 검이 내리꽂혔다. 그리고 허우적거리다가 이내 동작을 멈추는 뱀파이어.

“끝, 끝났다.”

털썩.

뱀파이어의 몸에 검을 꽂아 넣었던 헌터들 중 한 명이 주저앉으며 말했다.

이제 정말 끝났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런 몬스터도 없었다. 오직 헌터와 뱀파이어의 시체.

두 가지밖에 없었다.

땡그랑. 땡그랑.

모든 전투가 끝났다는 걸 인식하자 마지막 싸움에 언제라도 끼어들기 위해 긴장하던 헌터들이 너도나도 무기를 손에서 놓았다.

“살았네.”

“하아…….”

아무런 환호성도 슬픔에 젖은 소리도 없었다.

그저 끝났다는 사실만이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스르르륵, 째앵―

하늘을 덮었던 구름이 사라지고 한낮의 태양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태양은 마치 고생이라도 했다는 듯 따뜻한 햇살로 그들을 쓰다듬었다.

파스슥, 파스슥.

햇살이 비추자 하나둘 재로 흩어지는 뱀파이어들의 시체.

그들의 살점과 피, 모든 게 재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 개 같은 태양. 뜰 거면 빨리 뜨던가.”

한 헌터가 푸념했다.

하지만 그저 푸념일 뿐이었다. 그도 알았다. 태양을 가렸던 구름을 만들었던 존재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모든 뱀파이어가 죽었기에 가려졌던 태양이 드러났을 뿐이라는 걸 말이다.

다다다닥!

“환자! 환자 없나요!”

“치료제 필요한 사람!”

모든 전투가 끝났을 쯤 결과를 전달받았던 건지 치료사들이 그들에게로 몰려왔다.

그들은 온몸이 피에 젖은 헌터들을 한 명, 한 명 살펴보며 부상 여부를 확인했다.

“이거 내 피 아냐.”

한 헌터가 자신을 살펴보는 치료사에게 말했다. 그가 뒤집어쓴 대량의 피는 자신 대신 죽었던 동료의 피였다.

그의 말에 몸을 옮기는 치료사.

“하아…….”

그 헌터가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도시의 곳곳이 무너지고 피가 가득했다. 저 피들 중에 뱀파이어의 피는 없었다.

모두 햇빛에 재가 되었을 테니. 그러니 저 피는 모두 그들 동료의 피였다.

“좆같네.”

살아남았음에도 기분이 개 같았다. 동료의 피 위에서 살아남은 자신이 오히려 죄인 같았다.

차라리 크게 다쳤다면 그나마 죄책감이라도 덜할 텐데.

저벅, 저벅.

그때, 그의 눈에 저 멀리서 다가오는 한 명의 헌터가 보였다.

한 명을 업은 채로 본부 쪽을 향해서 걸어오는 헌터.

이기수였다.

짝!

누군가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상황에서 들리는 박수 소리. 이윽고 박수 소리는 밑도 끝도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짝짝짝짝!

“살려 줘서 고마워!”

“멋있었다! 이기수!”

살아남은 헌터들 중 멀쩡한 헌터들이 그를 보며 환호했다.

그들 모두 오늘의 영웅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많은 수의 뱀파이어를 죽이고 S급 뱀파이어들을 담당한 이기수였다. 그 누구보다 많이 뛰어다니고 많은 헌터를 살린 영웅.

끄덕.

이기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이기수의 눈에도 익숙한 얼굴들이 몇몇 보였다. 싸우면서 몇 번이고 같이 등을 맞댔던 동료들이었다.

‘박수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닌데.’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이기수가 쓰게 웃었다. 분명 그는 많은 사람을 살리고 많은 뱀파이어를 잡았다. S급에 달하는 뱀파이어의 대부분을 그가 잡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보스를 잡은 것은 그가 아니었다.

새액, 새액.

기절해 있는 진하가 잡았다. 그렇기에 이 박수는 진하가 받아야 했다.

적어도 이기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오그라들어.’

다시 도시로 복귀해서 기절한 진하를 묶어서 구석에다 둔 후에 전투에 참여했다.

후방으로 데려가 봤자 당장 진하를 치료할 수도 없고 맛이 간 상태라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전투가 끝나고 기절한 채 묶인 진하를 데리러 갔다 오는 바람에 구도가 영 이상해졌다.

모든 전투가 끝나고 헌터들 사이를 지나가는 헌터라니.

‘무슨 소설도 아니고.’

실제로는 소설처럼 그렇게 멋있게 끝나는 게 아니었다. 길이 그렇게 짧은 것도 아니고 후방까지 미친 듯이 멀었으니까.

박수를 치던 헌터들도 그걸 깨달았는지 점차 박수 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멋쩍은 듯한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할 듯싶었다.

“뭐,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이기수의 말에 살아남은 헌터들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이제 그들의 역할은 끝났다.

남은 건 후방에 있던 다른 헌터들이 할 것이다.

“그럼 저 먼저 이만.”

이기수는 아예 뻗어 버린 헌터들을 보며 속도를 높였다. 천천히 걸어가기엔 계속 시선이 쏠리는 게 불편했으니까.

쉬익, 쉭!

땅을 박차며 한참을 달리자 저 멀리 치료소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쪽에 위치한 임시 지휘 막사까지.

‘협회네.’

전투가 끝나는 건 얼마나 귀신같이 파악한 건지 벌써 지휘 막사가 세워져 있었다.

타닥!

치료소 근처에 도착한 이기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환자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대부분이 죽어 있었다.

그리고 옅게나마 느껴지는 탄내까지.

‘역시 그때 아무도 안 갔던 건가.’

주변에 찢겨진 시체들이 그걸 말하고 있었다. 치울 시간도 없었기에 널브러진 시체들.

지금이야 조금씩 치워서인지 그나마 시체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지만 아마 그전까지는 널브러져서 사람들에게 밟혔을 게 눈에 뻔히 보였다.

“크…….”

뒤쪽에서 진하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깨려는 것 같았다.

파지지직!

이기수가 강한 전격을 진하에게 흘리자 하얀 연기와 함께 다시 기절하는 진하.

이기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휘 막사로 다가갔다.

이기수가 다가가자 앞부분이 열려있는 지휘 막사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기수 헌터님.”

비굴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헌터 한 명. 팔을 보니 협회 직원을 뜻하는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당신 누구죠?”

“저는 협회에서 긴급 대책 1과장인 하연수라고 합니다.”

그의 말에 이기수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긴급 대책 1과장이라면 꽤 높은 위치에 있는 헌터였다.

낮은 위치에 있는 헌터라면 모를까 그 정도 위치면 이번에 협회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뻔히 아는 놈들이었다.

즉, 수뇌부 중 말단에 속했다.

‘이것들이 어디라고…….’

반대 세력을 줄이기 위해 헌터들을 빼돌린 게 협회였다. 만약 협회에서 제대로 지원했다면 지금처럼 큰 피해를 입진 않았을 것이다.

전방을 A급으로만 채울 수 있었을 테니까.

“꺼져.”

“네?”

“꺼지라고.”

파지직!

이기수의 몸에서 작은 전류가 튀었다. 그제야 심각함을 느낀 하연수가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그와 함께 빠르게 사라지는 하연수.

그런 그를 보면 이기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뒤처리로 보낸 직원조차 저런 이상한 놈이라니.

먼저 협회를 향해 이를 드러낸 건 이기수이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푸대접을 할 줄은 몰랐다.

“괜찮으십니까.”

누군가가 다가왔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기수의 눈에 협회의 팔찌가 보였다. 그 모습에 이기수가 짜증을 담아 말했다.

“꺼지라는 말 안 들려?”

“죄송합니다, 지금은 약간 날카로우신 모양이군요.”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송준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송준하 씨네요.”

이기수가 몸에 힘을 풀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도움이 못 돼서.”

“됐어요. 말단인 당신이 뭔 힘이 있겠어요. 오히려 미사일을 쏘게 만든 게 더 신기할 지경이었습니다.”

고작 헌터 강사가 협회의 일부를 움직여 지원을 만들어 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의 능력 밖의 일을 해낸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한 친구들이 몇 있었을 뿐입니다.”

옅게 웃으며 대답하는 송준하.

그런 그를 보며 이기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사람이 협회 강사였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소심하거나 능력을 떠나서 본인만 원하면 분명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는 인맥을 가지고 있는데도 아무런 욕심이 없어 보였다.

좋게 말하면 그만큼 욕심 없이 순수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그냥 호구 같았다.

“근데 뒤에 업히신 분 진하 씨 아닌가요? 어디 다치신 건가요?”

송준하가 묻자 이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하는 맞고, 이 상태인 건 좀 특이한…….”

움찔!

파지직!

“아…….”

진하가 움찔하는 바람에 놀란 이기수가 저도 모르게 전격을 내뿜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며 놀라는 송준하.

“음…… 오해입니다.”

이기수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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