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남자의 말에 하예진은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리고 결국 풀리는 스킬.
스르륵, 툭.
하예진의 손을 붙잡았던 헌터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의 눈은 동공이 풀린 채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네가 위험할까 봐.]
순간 하예진은 예전에 진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녀는 그런 말을 했던 진하가 답답했다.
그리고 같이 행동하기로 약속한 뒤에도 그녀를 항상 소외시키는 그가 싫었다.
같이라는 말을 하면서 항상 그녀를 뺐으니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말과 함께 혼자서 떠났으니까. 그런 진하를 두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수련과 돌아온 진하를 치료하는 것뿐이었다.
‘괜찮아.’
그렇게 속였다.
진하를 보며 괜찮은 척 이해하는 척했다. 답답하고 자신을 빼는 그가 싫었지만 언젠가는 그에게 자신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난 뭘 생각하고 있던 거지?’
단순히 그녀가 쓸모가 없어 아무 일도 맡기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저 아무 이유 없이 모든 걸 알려 주지 않는 게 아니었다.
진하가 그녀를 깊숙이 끌고 들어가지 않은 건 아직 능력이 안 돼서이기도 했지만 배려이기도 했다.
‘달라. 너무 달라. 그리고 무서워…….’
그녀가 아는 헌터의 세계와 지금 눈앞에 펼쳐진 헌터의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교본에서 배웠던 대로 승산 있는 싸움을 하고 도망가는 헌터는 아무도 없었다. 게이트나 던전에서처럼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헌터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악귀처럼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헌터들만이 존재했다.
덜덜덜.
하예진이 무서움에 덜덜 떨리는 몸을 움켜잡았다. 무서웠다. 너무 무서워 일어날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죽어 감에도 무서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 나는, 못…….’
[우리 같이 힘내서 헌터 되고, 힘들 땐 항상 돕자. 그리고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기다?]
꽈악!
하예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진하가 자신에게 했던 말, 그리고 다시 그녀가 진하에게 돌려줬던 말.
“흑, 으흑…….”
눈물이 났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주저앉을 수 없었다. 진하가 있는 곳은 이곳보다 더한 곳이었다.
그리고 진하는 그런 곳에서 저런 괴물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포기할 수 없었다.
진하에게 배려만 받는 그런 사람이 될 순 없었다.
덜덜덜.
하예진이 덜덜 떨리는 몸에 힘을 줘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저 멀리 싸우고 있는 헌터들을 바라봤다.
‘나도, 나도 싸워야 해.’
떨리는 손을 반대 손으로 부여잡은 채 뱀파이어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패럴라이즈!
우뚝.
순간 아주 잠시 몸이 멈추는 뱀파이어.
촤작!
그 틈을 타고 헌터들의 검이 뱀파이어를 베고 지나갔다!
“감히!”
처음으로 생채기가 난 뱀파이어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는 이내 자신을 향해 손을 뻗은 하예진을 노려봤다.
저 여자였다. 그의 몸을 멈춘 헌터가 저 여자라는 걸 확신한 뱀파이어가 손을 뻗었다.
“블러드 캐논.”
그녀를 향해 쏘아지는 거대한 에너지. 순간 하예진이 두려움에 눈을 꽉 감았다.
콰앙!
“그 스킬 좋은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충격에 하예진이 슬며시 눈을 떠봤다.
한 남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잘린 다리를 치료해 줬던 헌터였다.
풀썩.
그리고 넘어가는 헌터. 그의 앞으로 3명의 헌터가 마찬가지로 죽어 있었다.
“저 여자 지켜!”
누군가의 외침이 퍼졌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녀를 에워싸는 헌터들.
“공격당하는 건 걱정하지 말고 스킬만 맞춰. 할 수 있지?”
베테랑으로 보이는 중년의 헌터가 그녀에게 말했다.
끄덕.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패럴라이즈!
우뚝.
다시 멈춰 서는 뱀파이어와 그사이 상처를 내는 헌터들.
“감히 인간 따위가!”
뱀파이어가 분노하며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잡아!”
“절대 못 가게 해!”
그러자 수많은 헌터들이 뱀파이어를 가로막았다.
“꺼져라! 벌레들아!”
온 힘을 다해 막아서는 헌터들을 뿌리치는 뱀파이어.
“지금부터 계속 되는 대로 써!”
중년의 헌터가 그 말을 남기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그녀를 중심으로 수백 겹의 보호막이 씌워졌다.
―패럴라이즈! 패럴라이즈! 패럴라이즈!
하예진이 눈물을 닦으며 계속해서 스킬을 썼다.
그리고 그녀가 스킬을 쓸 때마다 뱀파이어의 상처는 갈수록 늘어났고 그녀와의 거리 또한 점차 가까워졌다.
―패럴라이즈!
촤악!
처음으로 뱀파이어에게 큰 상처가 났다.
콰직!
뱀파이어의 손에 그녀를 둘러싼 보호막 수십겹이 부서졌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뱀파이어.
채쟁! 챙!
뱀파이어의 공격 한 번에 수십 겹씩 보호막이 부서졌다.
―보호막.
―바람의 수호.
……
……
……
그 즉시 다시 씌워지는 수십 개의 보호막.
까드득!
뱀파이어의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패럴라이즈!
촥!
멈춤과 동시에 또 한 번 그어지는 상처.
쾅! 쾅! 쾅!
뱀파이어가 미친 듯이 보호막을 두들겼다.
그리고 그럴수록 뱀파이어의 상처 또한 늘어났다.
그렇게 약 5분의 시간이 지나고.
“젠장! 이 수모는 잊지 않겠다!”
너무 많은 상처를 입은 뱀파이어가 결국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도망가기 위해 날아오르려는 그 순간.
―패럴라이즈!
쿵!
그녀의 스킬에 적중당한 뱀파이어의 몸이 굳어지며 땅으로 떨어졌다.
“어딜 가시나?”
“피 값은 갚고 가야지.”
땅으로 떨어진 뱀파이어를 향해 이를 드러내는 헌터들.
“이런 미친 벌레들이!”
새하얗게 질린 뱀파이어를 향해 수많은 헌터들이 달려들었다.
그렇게 또 한 번 10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콰직!
“이겼다!”
뱀파이어의 머리를 꿰뚫은 헌터가 소리쳤다.
“이겼다!”
“하, 살았네.”
저마다 환호하는 헌터들.
“아직 전투 중이야! 살아남은 사람들 한곳으로 모아!”
“여기 숨 아직 붙어 있어! 치료사!”
그리고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 헌터들.
그런 헌터들을 보며 하예진은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잘했어, 동생.”
겨우 남아있던 백여 개의 보호막이 풀리고 한 여성 헌터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팔 역시 한쪽이 날아가 있었다.
“힘든 거 아는데 정신 차리고 수습하는 것 좀 도와줄래?”
여성 헌터의 말에 하예진이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켰다.
주변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눈대중으로 봐도 치료소로 만들어진 구역의 80%가 날아간 게 보였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시체들이 사방에 쌓여 있었다. 이게 고작 10명의 뱀파이어에 의해 이루어진 풍경이었다.
“우엑!”
하예진이 속을 게워 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피뿐이었다.
피, 피, 피, 눈알, 피, 육편.
“우에엑!”
몇 번이고 속을 게워 낸 그녀가 정면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계속해서 폭음이 울리는 전방이 보였다.
* * *
움찔.
비앙카가 순간 움찔했다.
“왜, 수족이 당했어?”
비앙카를 보며 진하가 히죽 웃었다. 무려 30분, 30분이라는 시간을 벌었다.
대공을 상대로 30분이라는 시간을 벌었다는 사실에 진하는 기분이 좋았다.
“너…… 이슬라와 관계가 없군.”
“큭, 이제야 그걸 깨달은 거야?”
진하는 허술한 이야기를 30분이나 경청했던 비앙카를 비웃었다.
쾅!
“확실히 인간을 너무 얕봤나 봐.”
진하를 발로 차버린 비앙카가 혀를 찼다. 고작 한 명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
이슬라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생각에 그녀도 모르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 버리고 말았다.
아니, 심지어 거의 속아 넘어갈 뻔했다.
인간이 알 리 없는 대공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현재 대략 어떤 상황인지도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점차 뱅뱅 말을 끄는 그의 모습에 의심이 점차 커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일단은 참았다.
혹시 모르니까.
“그러게 왜 인간을 과소평가해.”
발차기에 날아가 땅을 뒹굴던 진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사기 쳐서 가만히 대화로만 무려 30분이 넘는 시간을 빼앗았다.
“쯧, 괜한 시간을 낭비했어.”
이슬라의 피로 인해 너무 많은 오해를 해 버렸다.
평소였으면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시안 때문에 예민해진 상황이 그녀를 더욱 속게 만들었다.
“뭐, 좀 오래 걸리겠지만 수족이야 더 만들면 돼.”
그녀의 오른팔이 죽었다는 건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가 가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고, 수족은 늘리면 되는 거였다.
“흠, 그전에 그래도 대가는 있어야지?”
그녀의 눈이 진하를 향했다.
다쳐서인지 모르겠지만 벌써 절반 이상 뱀파이어화가 된 김진하. 이슬라의 피가 어느 정도 주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별미였다.
“글쎄, 네 맘대로 될까?”
비틀거리며 일어난 진하가 몸을 똑바로 세웠다.
비앙카의 반응을 보아하니 충분히 많은 시간을 끈 것 같았다.
발을 묶는다는 면에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제 다른 걸 시도할 차례였다.
애초에 그는 비앙카를 상대로 목숨을 걸긴 했지만 목숨을 버릴 생각으로 그녀를 끌어들인 게 아니었으니까.
“구매.”
시스템 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미리 봐둔 물건들을 구매하는 진하.
“내가 예전부터 궁금했던 게 하나가 있어.”
뱀파이어화가 되고 있던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생수를 통해 신체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봤을 때부터 인식했고, 정보 길드를 습격하면서 확신했다.
그럼에도 그냥 뒀던 건 시간을 끌기 위함도 있지만 도박 수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뱀파이어가 되면 더욱 강해지지?”
“흥, 왜 뱀파이어가 되면 나를 이길 수라도 있을 것 같으냐? 어디 한번 해 봐라. 잘해야 남작급이겠구나.”
비앙카의 코웃음에 진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설마 그러겠어?”
그가 뱀파이어가 되어도 기껏해야 A급이었다.
이길 수도 없었고, 애초에 뱀파이어는 자신들의 원류에 해당하는 뱀파이어일수록 저항 자체를 못 한다.
“근데 그 원류가 틀리면 어떻게 되면 어떻게 될까?”
“뭐?”
비앙카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진하를 바라봤다.
진하는 웃으며 구매한 물건을 꺼냈다.
<흡혈귀의 이빨: 흡혈귀를 모방한 이빨. 이걸 끼고 있으면 흡혈귀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진하가 문방구를 뒤지면서 몇 개 깨달은 게 있었다.
숫자가 적은 물건일수록 포인트가 비쌌고, 더욱 강력했다.
스르륵.
바닥의 피가 진하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다쳤던 몸이 회복되며 새하얗게 변하는 피부. 순식간에 완벽하게 흡혈귀가 된 진하가 비앙카를 바라봤다.
‘역시…….’
그녀에 대한 충성심 따위는 하나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원류가 달라도 충성심이 들었다면 4명의 대공 아래에 존재하는 뱀파이어들 끼리 싸우는 것도 불가능했겠지.
진하는 지금 뱀파이어였지만 4명의 대공과 완벽하게 관련이 없는 뱀파이어다.
아티팩트로 만들어진 일종의 제5의 뱀파이어.
“호오, 신기하구나. 물건의 힘인가? 그래도 고작 백작급 뱀파이어일 뿐.”
“아직 끝난 게 아닌데?”
<흡혈귀의 망토: 흡혈귀가 쓰는 망토, 어두운 재질이 그 기풍을 올려준다. 입으면 마치 흡혈귀 귀족 같지 않을까?>
<흡혈귀의 피: 가짜 피, 이빨과 함께 쓰면 할로윈에서 가장 무서운 흡혈귀로 보이지 않을까?>
진하가 빠르게 흡혈귀의 망토를 둘렀다. 그리고 흡혈귀의 피를 입술에 발랐다.
다시 한번 변하는 진하. 그런 진하를 보며 비앙카가 감탄했다.
“한순간에 공작급 뱀파이어라…… 네가 가진 물건이 탐이 나는구나.”
비앙카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역시 저 인간이 무얼 하는지 지켜보길 잘했다.
반쪽짜리 뱀파이어를 한순간에 완전한 뱀파이어로 만들고 등급을 순식간에 높였다.
만약 저 물건을 그녀가 착용할 수 있다면 어쩌면 시안과 이슬라를 누르고 완벽한 대공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음, 역시 이걸로도 안 되네.”
같은 뱀파이어이기에 더욱 잘 느껴졌다. 순식간에 강력해졌지만 이 정도로는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자, 어서 와서 그 힘을 내게 바치거라.”
완전히 욕망에 물든 눈으로 진하를 바라보는 비앙카.
“쯧, 이쯤에서 됐으면 했는데.”
진하가 시스템 창을 향해 손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