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50화 (50/202)

#050

“잘 생각했어.”

채찍을 내려놓는 비앙카를 보며 진하가 말했다.

“아직 너를 믿는 건 아니다.”

지금 저 인간의 상태가 이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믿는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아는 이슬라는 인간과 파트너 따위를 맺지 않으니까.

오만함의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 그가 저딴 반푼이와 계약을 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경이 거슬렸다.

저 목의 상처, 이슬라가 일부러 놓아준 게 분명했다.

‘만약 진짜 파트너라면…….’

그러면 일이 틀어질지도 몰랐다. 이슬라와도 틀어진다면 그녀로서는 좋을 게 없었다.

거기다 만약 진짜 이 인간이 이곳에서 매우 높은 존재라면 기회이기도 했다.

인간 세상에도 쓸만한 존재는 많았으니까.

까드득!

순간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마주쳤던 여인이 생각났다.

고열의 화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여자. 시안을 피해 도망치던 상태였고 방심했다고는 했지만 자신의 한쪽 팔을 태워 버린 존재였다.

‘그년도 죽여야 하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멀쩡하게 회복됐음에도 팔이 욱신거렸다.

그런데 만약 이놈이 진짜 인간의 상위 존재라면…….

“네가 인간의 상위 존재라고? 그럼 저쪽에 있는 전기를 쓰는 인간보다도 위인가?”

그녀의 말에 진하는 그녀가 이기수를 말한다는 걸 알았다.

“그럼, 내가 더 위야.”

진하의 말에 비앙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럽의 인간 여자보다는 못하지만 꽤 강한 놈이었다.

그런 놈이 아래라면 진짜 인간 세상은 힘과 혈통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란 소리였다.

“네가 파트너라는 증거를 대 봐.”

그녀는 진하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만약 진짜 파트너라면 이건 기회였다.

이놈을 잘만 꼬드긴다면 인간 세상을 그녀가 먼저 먹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강한 인간들을 발아래 둔다면 세력에서만 밀렸던 시안, 이슬라를 잡아먹을 수 있게 된다.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말이 좀 길어질 텐데 상관없어?”

“수작 부리지 말아라.”

“수작이라니, 설마 말 좀 길게 한다고 무슨 문제가 생기나? 아까 인간 따위한테 부하들이 무너질 정도로 약하다곤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진하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내 군단은 약하지 않아!”

“그럼 편하게 얘기 좀 하자고.”

털썩!

진하가 근처 바위에 앉았다.

그러고는 비앙카를 향해서도 눈짓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근처 바위에 앉았다.

‘좋았어.’

역시 뱀파이어답게 오만함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존재였다. 전투 중에도 여유를 잃지 않겠다는 듯 다리를 꼬고 오만하게 진하를 바라보는 비앙카.

쫓겨 나온 주제에 자존심을 챙기는 머저리 같은 뱀파이어였다. 그리고 그 멍청함이 진하는 너무나 고마웠다.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 * *

파지직!

“캬아악!”

달려드는 뱀파이어를 지져 버린 이기수가 주변을 돌아봤다. 전열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그저 다 같이 뒤섞여 적을 죽여 나가는 헌터와 뱀파이어들.

‘전황이 나쁘지 않아.’

생각보다 적은 피해를 입었다. 적어도 이기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난전임에도 훨씬 약한 헌터들이 잘 버텨 주고 있었다.

둘 또는 셋이 짝지어 서로를 도와 몬스터를 상대하는 덕에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

‘편해.’

그의 운신이 너무나 자유로웠다.

애초에 그의 역할을 뱀파이어 무리를 이끄는 존재를 상대하는 거였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존재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존재가 전투 현장에서 벗어났다.

‘진하야.’

진하를 따라갔던 뱀파이어 한 마리, 이기수의 공격을 쉽게 무마시켰던 존재였다.

아마도 보스 몬스터일 가능성이 컸다.

‘고맙다.’

이제야 진하가 뭘 말하고 떠난 건지 이해했다.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 보스 몬스터를 끌고 전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 덕에 그가 편하게 움직일 수 있고, 전황은 더욱 밝아진 상태였다.

‘살아라.’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이기수는 진하 쪽으로 가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게 그의 역할이었으니까. 그리고 진하라면 어떻게든 생존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나저나…….

파지직!

“나와.”

이기수가 전격을 피우며 말했다.

그러자 땅속에서 핏물 한 줄기가 떠올라 한 형태를 이루었다.

“반갑습니다. 당신이 이곳의 대장인가요?”

이기수가 묵묵히 손에 모인 전격을 키워 나갔다.

“저는 비앙카 님의 수족이자 서열 2위 리안카 블레이드 공작입니다.”

우아하게 인사를 하는 뱀파이어.

“그래? 너를 죽이면 어느 정도 와해되겠군.”

“후후, 저랑 같은 생각이시군요.”

뱀파이어와 이기수가 서로를 쳐다봤다.

‘S급이야.’

이기수를 내리누르는 이 기운이 겨우 A급일 리 없었다. 이 정도면 S급이었다.

“자, 그럼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일단 날파리부터 없애죠.”

따악!

리안카가 손을 튕기자 피의 화살이 멀리서 리안카를 저격하고 있던 헌터에게 날아갔다.

파직!

“그것보다는 나를 보는 게 어때?”

날아가는 화살을 요격한 이기수가 리안카를 노려봤다.

“이런, 저는 성급한 사람은 싫은데 말이죠.”

“그거 아쉽네!”

이기수가 모았던 전격을 힘껏 내던졌다.

“너무 뻔한 수법 아닌가요?”

전격을 피한 리안카가 이기수를 비웃었다.

“네가 멍청한 건 아니고?”

이기수의 말에 리안카가 전격이 지나갔던 곳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한 무리의 뱀파이어들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 있었다.

“감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간 리안카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건 전격으로 이루어진 창을 찌르는 이기수였다.

“싸움 중에 어딜 봐!”

리안카가 다급하게 피로 칼을 만들어 창을 쳐냈다.

“정말 천박하군.”

“고상하면 목숨을 살려 주냐?”

이기수가 연신 창을 휘두르며 리안카를 압박했다.

“그래서, 인간은 안 된다는 겁니다!”

카앙!

리안카가 있는 힘껏 창을 쳐냈다. 그러자 잠시 모양이 흐트러지는 창.

그 모습에 리안카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전격의 양이 막대할지는 몰라도 결집도가 약했다.

“죽으세요. 블러드 스피어!”

마법을 날리며 리안카가 검을 휘둘렀다.

캉! 카강!

이기수가 날아오는 창을 쳐내며 뒤로 물러났다.

“중2냐? 왜 이리 혓바닥이 길어?”

지지직, 퍼엉!

순간 리안카가 밟은 바닥에 전기가 올라오더니 폭발했다.

“잔재주!”

쉽게 폭발을 뚫고 나오는 리안카. 그런 리안카를 향해 이기수가 달려들었다.

‘어리석긴!’

창을 내지르는 이기수를 보며 리안카가 속으로 비웃었다.

결집도가 약한 창 따위 그의 피의 검 앞에 쉽게 갈라질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결집.

리안카의 뜻에 따라 그의 검이 붉다 못해 검게 물들었다.

“죽으세요.”

리안카가 검을 내리그었다.

강도를 2배 이상이나 더 올렸다. 이것으로 이기수가 검을 막을 확률은 없었다.

둘의 검과 창이 마주치기 직전.

따다다다다다닥!

파치직!

쨍그랑!

“쿨럭.”

리안카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보았다.

깔끔하게 부러진 검.

“힘을 숨겼어?”

“방심하면 안 되지.”

파지직!

리안카를 뚫은 창이 사라지며 리안카를 재로 만들었다.

“음, 얼마 못 쓰겠네.”

이기수가 금이 간 딱딱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힘을 숨기기는 했지만 사실 뱀파이어의 검을 부술 정도는 아니었다. 아티팩트를 이용해 순간적으로 전압을 올렸기에 가능했던 꼼수였다.

“뭐, 대신 적 간부 하나를 쉽게 잡았으니 된 건가?”

만약 정석으로 싸웠다면 꽤 오래 싸워야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상대의 방심과 아티팩트를 이용해 쉽게 잡았으니 이득이나 다름없었다.

치직!

-서쪽에 특수 개체 출현! 얼음 계열 능력자 지원 바람!

-동쪽 구역! S급 뱀파이어 다수 출현! 지원 바란다!

-후방에 A급 이상 뱀파이어 10기 출현!

쉴 틈 없이 울리는 무전 소리.

주변의 뱀파이어를 잡으며 무전기를 듣던 이기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후방이랑 동쪽 구역이 문제야.’

후방은 C, D 헌터들 위주로 모여 있었다. 환자 수송과 치료가 주된 일이니까.

그나마 B랭크가 있지만 그리 많지도 않았다. A랭크는 잘해야 몇 명일 테고, 그나마도 다친 상태일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어.’

모두를 살릴 순 없었다. 지금 당장 급한 건 동쪽 구역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이기수가 몸을 동쪽으로 틀었다.

그 순간.

콰앙!

이기수가 있던 자리로 낙뢰 하나가 떨어졌다.

치직, 치직!

붉은 스파크가 튀어 오르는 바닥.

“호오…… 피해?”

낙뢰를 날린 뱀파이어 하나가 한 끗 차이로 공격을 피한 이기수를 보며 감탄했다.

“나는 뱀파이어 공…….”

“닥쳐!”

이기수가 빠르게 뱀파이어를 향해 튀어 나갔다. 한시가 바쁜 와중에 저딴 소개를 들을 여유 따윈 없었다.

파직!

“흐음, 성미가 성급하군.”

전방으로 전격을 뿌리며 물러난 뱀파이어가 이기수에게 말했다.

‘상성이 나빠.’

“상성이 좋군.”

서로 반대되는 생각과 말을 한 둘. 이기수는 뱀파이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능력자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능력에 대한 내성이 있다.

물리 능력자라면 물리가, 마법이라면 마법이, 그리고 전격 능력자라면 전격에 대한 내성이 있다.

그럼 같은 능력자와의 싸움은 어떻게 될까?

‘젠장, 이러면 귀찮아지는데.’

S급에 해당하는 뱀파이어, 그것도 같은 전격 관련 능력을 사용한다면 이기수가 불리했다.

신체적 능력과 회복은 뱀파이어가 당연히 더 뛰어났으니까.

그렇다고 이기수가 진다는 건 아니었다.

‘이길 수 있어. 하지만…….’

치익―

-동쪽 구역! 지원! 지원이 더 필요하다!

“동료들이 걱정되나?”

“닥쳐!”

이기수가 다시 한번 전격을 흩뿌렸지만, 전격은 손쉽게 막혔다.

“걱정 마라. 어차피 네가 가려는 곳엔 서열 1위가 가 있다. 네가 간다고 뭔가 변하지 않아. 그냥 맘 편히 동료들의 죽음을 맞이해라.”

“하, 전황이 안 보이나 보네?”

이기수가 코웃음을 쳤다.

많은 사상자가 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수적 우위에 있는 헌터들이었다.

진다는 가정은 없었다.

“설마 고작 저급한 하수인들을 잡았다고 기뻐하는 건가? 다 죽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쓰레기들을 늘리는 건 쉬워.”

자신들의 부하를 쓰레기로 취급하는 뱀파이어. 이기수는 더욱 말을 나눌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깝긴 하지만…….’

이기수가 금이 간 딱딱이를 꽉 쥔 채 뱀파이어를 노려봤다. 아티팩트가 부서진다 하더라도 빠르게 이곳을 정리해야 했다.

그런 이기수를 보며 뱀파이어가 몸을 단정히 했다.

“다시 한번 내 소개…….”

쾅!

“이것들이…….”

자신에게 날아온 공격을 막은 뱀파이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벌써 두 번이나 소개를 방해받은 뱀파이어는 짜증이 이는 걸 느꼈다.

“가라.”

뱀파이어를 공격했던 헌터, 하준수가 뒤로 물러나며 이기수에게 말했다.

“하준수 씨, 여기 있었어요?”

갑작스런 하준수의 등장에 이기수가 황당한 듯 물었다.

여기 왔는데 어째서 한마디 일언반구도 없었던 건지 이해가 안 됐다.

“그게 중요한가? 동쪽 구역으로 안 가나?”

하준수의 말에 이기수가 정신을 차렸다.

“둘이 같이 공격하죠. 그럼 좀 더 빠르게…….”

“난 지금 가라고 했다.”

하준수가 짧게 대답했다.

“하준수 씨 지금 그런 소리 할 때가 아니에요.”

저 존재는 하준수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A급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죽일 장담을 할 수 없는 몬스터인데 그걸 하준수 혼자 감당하는 건 말이 안 됐다.

심지어 주변 헌터들 중 A급들은 모두 지원을 나가 여기엔 거의 없기까지 했다.

“무전 들었지? 네가 동쪽으로 가는 게 피해를 줄이는 거다.”

하준수의 말에도 이기수의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씨익.

“걱정 마라. 죽지 않는다.”

“그럼…… 부탁해요!”

이기수는 고민 끝에 동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야기는 끝났나?”

“기다려 주니 고맙군.”

“아무리 상대가 짐승 같은 짓을 했더라도 똑같이 하는 건 귀족의 예의가 아니지.”

뱀파이어가 입고 있는 정장을 매만지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 나는 데카르트, 뱀파이어…….”

쾅!

“예의라는 건 어디 쓰레기통에라도 처박았나?”

벌써 3번이나 말이 끊긴 데카르트가 공격하다 튕겨 나간 하준수를 보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너는 왜 남은 거지? 이게 인간이 말하는 희생애란 건가? 아니면 너 따위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데카르트가 하준수를 비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준수는 조금 전 떠난 이기수보다 약했기 때문이다. 당장 이기수와 맞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는 그에게 하준수의 행동은 만용 그 자체로 보였다.

“미안하지만 난 죽을 생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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