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49화 (49/202)

#049

촤악!

카드 한 장이 더 뽑혔다.

그리고 손에 들린 카드를 보며 진하는 혀를 찼다.

<거대 물벼룩: 1미터 크기의 물벼룩, 약간의 독을 품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곤 쓸모가 없다.>

‘개패야.’

마지막 카드조차 진하를 배신했다. 하지만 여기서 뭐라도 해야 했다.

<턴 제한: 4초.>

시스템 창을 확인한 진하가 곧바로 들고 있던 카드를 소환했다.

“거대 물벼룩 소환.”

그러자 진하의 앞에 생성되는 거대한 물벼룩 하나. 소환된 물벼룩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팔, 다리는 짧고, 이빨은 없는 말 그대로 그냥 물벼룩이었다.

찌릿.

손으로 쓰다듬어 보자 손끝이 살짝 둔해지는 게, 약하긴 했지만 확실히 독은 있었다.

‘턴 초기화된 거에 만족해야 하나? 그나저나 뭘 쓰지?’

진하가 머리를 굴려 가며 카드를 훑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박쥐 무리에, 제한 시간까지 촉박했다.

하지만 무언가는 반드시 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 선택은 손해가 막심할 테니까.

결국 고민을 마친 진하가 카드 한 장을 뽑았다.

<증식: 무엇인가를 증식시킨다. 단, 고등 생물은 불가능하다. 증식량은 약 1000배.>

“마법 카드에 사용.”

삑!

<증식은 마법 카드에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쯧.”

혹시나 했는데 역시 안 됐다.

TV에서는 이것저것 상상해서 그럴듯하게 만들면 됐는데 이건 아니었다.

‘그럼 일단…….’

“거대 물벼룩 증식.”

<거대 물벼룩에 증식 카드가 사용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진하의 앞을 가득 메우는 물벼룩들. 진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법 카드 낙뢰 사용.”

뒤집혀 있던 마법 카드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쿠르릉 쾅!

-캬약! 죽여 버리겠어!

시스템 창 화면 너머로 화난 보스 몬스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타격은 거의 없음. 하지만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았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나?’

공격하지 못하게 막는 시스템과 갑자기 보인 인간, 그리고 공격까지. 자존심 강한 종족임을 생각하면 화가 날 만했다.

‘본전은 찾겠네.’

화가 난 보스를 보며 진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아티팩트를 써서 이득은 봤다.

“공격.”

진하가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박쥐 무리를 향해 내달리는 물벼룩 1000마리와 소환수들.

“일단 난 여기까지니까, 뒤를 부탁한다.”

<강제로 전투를 중단하셨습니다.>

<페널티가 발동합니다.>

촤자자작!

시스템의 안내가 끝나자마자 진하의 온몸이 베였다.

“후, 그래도 나쁘진 않네.”

몸에 치유액을 뿌린 진하가 짧게 평했다.

“뭐가 나쁘지 않아!”

옆에서 힘을 모으고 있던 이기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안 그래도 창백했던 진하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으니까.

“아니, 저거.”

진하가 바닷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박쥐 무리와 맞붙고 있는 소환수들이 보였다.

전황은 당연하게도 진하의 소환수들이 순식간에 찢겨 나갔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벌레들의 체액을 뒤집어쓴 뱀파이어들의 기분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거면 된 거야.’

이성을 잃을수록 몬스터의 공격은 더욱 단순해지니까.

“아무튼, 나머지는 네가 해결해라.”

여기서 진하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마쳤다. 최선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만족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목표가 이뤄졌으니까. 더 이상 남아 있어 봐야 A급 헌터로서 진하가 할 일은 크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시선을 끌 테니까 잘 소탕하고.”

“뭐? 그게…….”

이기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하가 빠르게 해안가를 뛰쳐나갔다.

스킬까지 쓰며 빠르게 멀어지는 진하. 몇몇 헌터들은 멀어져 가는 진하를 발견하곤 이기수를 쳐다보았다.

“다 작전이니까 준비하세요.”

무슨 의도를 가지고 진하가 뛰쳐나갔는지는 지금 당장은 모르겠지만 여기서 말을 함부로 내뱉었다가는 자칫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일단은 모르쇠가 답이었다.

딱딱!

이기수가 딱딱이를 눌렀다.

콰르릉!

모아 두었던 전류에 전압이 더해지자 극도로 커지는 전격.

“다들 공격해요!”

이기수의 외침과 함께 날아가는 전격을 필두로 뱀파이어들을 향한 공격이 시작됐다.

* * *

‘역시 따라오네.’

멀어지던 진하는 박쥐 무리에서 한 명이 빠져나오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수의 전격을 쉽게 무력화시킨 뱀파이어 하나가 진하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비앙카.’

다가오는 뱀파이어는 S급 몬스터이자 뱀파이어 대공인 비앙카였다.

-거기 서!

진하의 귓가로 그녀의 음파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진하는 그 소리는 무시한 채 더욱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더욱 가속하는 진하. 진하는 머릿속에서 빠르게 비앙카의 특징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았다.

<비앙카: 자신을 뱀파이어 대공이라고 칭하는 S급 몬스터. 12층 보스인 이슬라나 시안과는 다르게 약한 편이다. 4체의 대공 중 가장 약하다고 판단된다. 의심은 많지만 쉽게 흥분하고 단순하다.>

헌터 자료에 나와 있던 비앙카의 설명과 지금 보이는 비앙카의 모습이 딱 알맞았다.

‘운이 좋았어.’

진하가 이번 전투에서 기획했던 것은 총 세 가지였다.

첫째, 쉘터를 이용한 부상자 보호. 이는 하예진을 통해 완료했다.

둘째, 아티팩트를 이용한 판 뒤집기. 이는 실패했다.

총 6장이나 되는 카드와 폭죽을 사용했지만 일부 몬스터들을 줄이기만 했을 뿐. 대세에 크게 영향을 줄 만큼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리고 세 번째.

‘도발.’

보스 몬스터의 발을 묶는 거였다.

이 전쟁에서 가장 큰 무기는 현재 이기수였다. 그리고 상대편은 당연히 비앙카였고. 전쟁에서 가장 적은 피해를 보는 법은 상대의 무기를 묶는 동시에 우리의 무기가 날뛰게 만드는 것.

그렇기에 진하는 비앙카를 도발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도발할 준비를 했지만, 딱히 쓰기도 전에 도발이 되었다.

‘정말 이렇게 흥분을 잘할 줄이야…….’

그저 얼굴을 마주 보고, 그녀를 특정해 공격하고 기분 나쁘게 했다는 이유로 그녀가 자신을 따라왔다.

도발을 위해 준비했던 모든 수단이 필요 없게 됐다는 점에서 좀 허무하긴 했지만 오히려 좋았다. 그만큼 진하가 하려는 일에서는 잘 넘어갈 거라는 반증이기도 하니까.

‘비앙카인 게 다행이네.’

만약 비앙카가 아니라 리비카였으면 더 까다로웠을지도 몰랐다. 자료상 리비카는 비앙카와 반대에 해당하는 스타일에 가까웠으니까.

치이익!

어느 정도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온 진하가 걸음을 멈췄다. 맘 같아선 더 가고 싶긴 했지만 이 정도만 돼도 충분했다. 그리고 저 바보가 어디까지 따라올지도 미지수였으니까.

“후후…… 드디어 멈추는구나. 도망치기를 포기한 것이냐?”

뒤따라 진하를 따라오던 비앙카가 진하를 보며 말했다.

“뭐래.”

아무리 점차 가까워지는 상황이었고, 급수 차이가 났다고 해도 진하가 맘만 먹었으면 더 멀리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아니, 아예 뿌리칠 수도 있었다. 그저 적절하기에 멈춘 건데 비앙카의 입장에서는 도망치는 것으로 보였나 보다.

“자, 그럼 이제 내 머리카락을 태운 값을 받아 볼까?”

잔인하게 미소 짓는 비앙카. 진하는 그녀를 보며 씨익 웃어 주었다.

“근데 여기에 와도 돼? 부하들 다 죽을 텐데? 아니면 부하를 두고 도망친 거야?”

꿈틀.

그녀의 미간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이 미개한 게!”

콰앙!

진하를 향해 핏빛 구체가 쏟아졌다.

“아냐? 그럼, 여기 왜 왔어?”

“너희 따위는 나 혼자여도 충분하다! 그리고 내 부하들이 인간들 따위에게 진다는 거냐?”

진하는 재빠르게 몸을 놀리며 다급히 말을 이어 나갔다.

“호? 자신감이 넘치네? 근데 도망친 건 맞잖아.”

“닥쳐라!”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라고. 진실을 말한 게 죄야? 아님 시안한테 도망친 게 그렇게 부끄러워?”

멈칫.

“여기 온 게 그거 때문 아냐? 시안에게 도망쳐서 이슬라와 결탁하려고. 아니, 그것도 아닌가? 그냥 무서워서 도망친 것뿐인가?”

“너, 누구냐. 어째서 인간 따위가 그런 걸 아는 거지?”

“알고 싶어? 너한테 중요한 건가?”

진하의 말에 비앙카가 피로 만든 채찍을 소환했다.

“아주 중요하지.”

촤악! 짝! 촤라락!

비앙카가 채찍을 휘둘렀다. 진하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채찍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비앙카의 반응을 살폈다.

‘확실하게 생포하려 하고 있어.’

계속된 도발을 통해 진하에게 집중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완전히 이성을 잃지는 않아 공격이 날카롭지는 않았다.

딱 좋은 상태였다. 완전히 이성을 잃지는 않았지만 살짝 흥분한 상태. 그리고 진하에게 호기심이 많아진 상태, 진하가 제일 원하던 상태였다.

‘진짜 도망자였군.’

거기다가 혹시 시안의 밑으로 들어가 이슬라가 있는 곳에 선봉으로 온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시안을 입에 담았을 때 보였던 표정은 죽상 그 자체였으니까. 이슬라를 공격하려는 것처럼도 보이진 않았다. 그랬다면 이슬라를 입에 담은 시점에서 죽였을 테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전선을 연합하러 왔거나 그냥 도망쳤다는 건데, 도망친 건 제외했다. 그냥 도망쳤으면 여기로 올 리 없을 테니까.

‘이거 좋은 상황이네, 아주 좋아.’

“잠깐! 내 말 좀 들어 봐.”

진하의 외침에 비앙카가 잠시 채찍을 멈췄다.

그 모습에 진하는 더욱 확신했다. 지금 비앙카는 쫓기는 게 맞다. 아마 목적은 이슬라의 밑에 들어가거나 연합.

“우리 얘기 좀 하지?”

“얘기? 내가 미물 따위와 얘기를 할 것 같으냐?”

“그러니까 채찍을 멈춘 거 아니겠어?”

진하의 말에 비앙카가 다시 채찍을 다잡았다. 그 모습에 진하는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너를 도발했던 것도, 이런 걸 묻는 것도 이슬라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거라 물은 거야.”

멈칫

“너…… 확실히 이슬라를 아는 건가?”

“암, 알다마다 너무나 잘 알지.””

진하의 말에 비앙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진하의 말을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 모습을 보며 진하가 쐐기를 박았다.

“자꾸 모르는 척할 거야? 사실 너도 알고 있잖아.”

진하가 고개를 살짝 꺾어 자신의 목을 보여 주었다. 그곳에는 이슬라가 물었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이슬라와 연결됐단 증거지.”

“고작 그 정도로?”

“정말 그렇게 생각해?”

진하가 웃으며 물었다. 그 모습에 비앙카는 잠시 진하를 바라보다 천천히 공중에서 내려왔다.

진하의 말이 사실일 테니까.

그녀가 아는 이슬라는 절대 먹이를 놓치지 않는다. 하물며 저런 약해 빠진 먹이를 놓쳤다는 건 수치 중의 수치, 그렇다면 먹이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거기다 완전한 뱀파이어도 아닌 아주 천천히 뱀파이어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주 소량의 피만 주입됐다는 소리였다.

‘애초에 저런 반푼이를 수하로 만들 리도 없고.’

“말해라. 이슬라와는 무슨 관계지?”

“나는 이슬라의 파트너야.”

진하의 말에 비앙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됐으니까.

“미안하지만 진짜로 맞아. 너희들과 달리 인간은 힘의 척도나 혈통으로 계급이 나뉘지 않아.”

“네가 지금 인간들의 대표라고 말하는 건가?”

“전 인류의 대표는 아니지만 거의 상위층이지? 너네 말로 따지면 공작 정도?”

“흐음……”

비앙카가 진하를 훑어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얼마든지 의심해라.’

의심하고 의심할수록 진하에겐 더욱 좋았다. 확인할 수 없는 정보와 단단한 근거는 의심을 믿음으로 바꿔 주니까. 물론 이게 엄청 오랫동안 되진 않을 테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비앙카가 지금 속고 있다는 거니까.

“자, 봐봐. 아직은 인간이야. 네가 정말로 이슬라와 연합하러 왔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일단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낫지 않겠어?”

“…….”

“싫다면 죽여도 돼. 근데 정말 얘기하지 않아도 되겠어?”

비앙카가 채찍을 내려놓는 게 보였다.

씨익!

지금부터 사기를 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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