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그녀의 말에 후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그녀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하하, 그래, 결혼! 결혼이 있지. 그래도 너한테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그녀가 원하는 건 밑으로는 들어가겠으나 겉으로는 동등한 동맹 관계를 맺자는 거였다.
하지만 역시나 지금까지 잘 버티던 그녀가 이런 말을 갑작스럽게 하는 이유가 여전히 찝찝했다.
“뭘 걱정하는지 알아요. 근데 간단히 생각하세요. 그저 끝에 다다랐을 뿐이에요.”
“끝이라…… 그래, 네 말대로 끝이 다가오긴 했지.”
확실히 그녀의 분파는 분파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축소되긴 했다.
그렇다면 그중 가장 큰 분파인 그에게 붙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리고 그가 송하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던 사실이니 이쪽으로 붙은 거겠지.
“그래도 의외긴 하구나. 날 싫어하지 않았니?”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적어도 저도 한 분파의 보스니까.”
송하나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후안에게 더욱 신뢰를 주었다.
“그래,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다 내보낸 거구나.”
후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어나 그녀의 뒤로 돌아갔다.
“확실한 거래를 위해선 도장이 가장 중요하긴 하지.”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는 후안.
송하나는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을 꾹 참은 채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렇죠, 확실한 거래. 전 그런 걸 원하는데 당신은 아닌가요?”
“아니, 아주 좋아! 나야 아주 좋고말고.”
후안이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
“아주 잘 컸단 말이야. 네가 성인이 된 이후부터 참 어여쁘다고 생각했지.”
“사족이 기네요. 거래는 된 걸로 알고 그냥 갈까요?”
“클클 성급하기는,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고대했는지 너는 모를 거야.”
삑!
후안이 책상 위에 있는 버튼 하나를 눌렀다.
지이잉.
그와 함께 빈 공간이었던 곳에 침대 하나가 덜컥 올라왔다.
“자, 그럼 뭐부터 해 볼까?”
“글쎄요? 이야기부턴 어때요?”
천천히 일어나는 송하나.
그녀가 천천히 겉옷 하나를 벗었다.
“이야기? 고작?”
“그냥 이야기는 아니죠.”
툭.
그녀가 입었던 셔츠 위쪽 단추가 하나 풀렸다.
“고대했다 하지 않았나요? 와인은 마시기 전에 향과 시각으로 감상하는 거랍니다.”
“와인? 크하하! 내가 뭘 몰랐구나. 그래, 어디 한번 이야기를 해 보자꾸나.”
후안은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 말대로 스스로 무너져 가는 그녀를 보는 것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자, 그럼 이야기 전에 목 좀 축이죠.”
탁자 위에 놓여진 홍삼을 송하나가 들었다.
“흠…… 굳이 그걸 마셔야 되나?”
“싫음 말고요. 어차피 거사를 위해서라면 마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송하나가 뚜껑을 따 한입 마셨다.
그리고 빙긋 미소를 짓더니 그에게 다가가 입맞춤을 했다.
꿀꺽.
그녀의 입을 통해서 들어오는 음료.
“어때요, 맛있죠?”
* * *
스르륵.
정보 길드 지하창고의 벽면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틈 사이로 여러 사람들이 아주 조용히 빠져나왔다.
빠져나온 이들은 주변에 있는 물건 사이로 빠르게 숨어들었다.
“다 준비됐나?”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진하가 먼저 빠져나온 이들을 이끄는 조직원에게 물었다.
“네, 밖에서는 항암 그룹의 용병들이 공격할 겁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중앙의 빠른 습격과 장부가 있는 곳 점령.”
“중앙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전원을 끄는 거 잊지 말고.”
“네.”
“음료가 적당히 퍼질 때까지 대기한다. 습격은 앞으로 10분 뒤.”
명령을 내린 진하가 근처 박스에 털썩 앉았다.
“저기…….”
그의 명령이 끝났음에도 제자리에 서 있던 조직원이 그를 천천히 불렀다.
“왜?”
“정말 보스는 괜찮을까요?”
“왜, 못 믿어?”
진하의 말에 조직원은 아무 말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진하는 혀를 찼다.
‘이게 가장 큰 문제지.’
진하가 봤을 때 그녀 분파의 가장 큰 문제는 가족적이라는 거였다.
물론 모두가 그러지는 않겠지만 지금 남아 있는 조직원들은 그녀 또는 그녀의 아버지와 깊은 인연을 맺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문제였다.
가족적인 신뢰와 믿음은 있을지언정 보스로서의 신뢰성은 약했다.
“걱정 마. 그녀는 무조건 성공하니까.”
보스로서의 신뢰성을 높이려면 리더십을 보여야 했다.
아니, 리더십은 아니더라도 보스라는 각인을 해 줄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절대 지배자가 될 수 없었다.
“보스에게 도움이 되고 싶으면 작전을 빈틈없이 진행해라. 가 봐.”
진하의 말에 조직원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조직원을 돌려보낸 진하는 조용히 송하나와 했던 이야기를 곱씹었다.
[내 말 알아듣겠어? 일단은 먹여, 그럼 끝이야.]
[그게 가능해요? 그 능구렁이는 그 음료를 마시지 않을 거예요.]
[그거야 당연하지. 그러니까 네가 먹여, 어떻게든. 그리고 너도 먹어서 무해하다는 걸 증명해.]
[무슨 소리죠?]
[잘 들어. 음료에 들어간 이 아티팩트는 다른 효과가 없어. 그냥 술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응축된 술.]
진하가 그녀에게 가루가 되기 전의 맥주 사탕을 보여 주었다.
[이건 별거 아냐. 그냥 취하게 만드는 거지. 조직원들이 모두 능력자인 건 아닐 거 아냐? 사람은 조금만 취해도 판단 능력이 흐려지게 돼 있어.]
[그 말은…….]
[그래, 후안에게 먹이면 그놈도 정신이 흐려지겠지.]
[하지만 그는 능력자예요, 그리고 저도 먹잖아요.]
[네가 좀 더 능력 등급이 살짝 더 높다며, 너도 잘 알지? 실제 등급이 높을수록 잘 안 취한다는 거. 거기다 애초에 너는 능력 자체가 정신 계열이라 술에 높은 수준의 내성이 있잖아. 일단 먹이면 네가 더 유리해.]
그 말과 함께 그녀에게 삼각자 아티팩트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공격해. 이 아티팩트면 그놈이 혼자가 아니더라도 지진 않겠지?]
[그건…….]
[명심해, 네가 진짜로 보스가 되려면 보여 줘야 된다는 걸.]
“10분 다 됐습니다.”
조직원의 말에 진하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준비됐나?”
“밖에서 신호와 함께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럼 시작해야지.”
진하의 말에 장난감 총을 쥔 채로 일어나는 조직원들.
대량의 마석을 소모해 구매한 진하의 회심의 한 수였다.
“잘 들어. 아무리 아티팩트가 좋아도 결국 그걸 다루는 건 너네다.”
진하가 조직원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너희가 남은 이유는 너희 보스 때문이겠지? 그럼 그걸 증명해라. 너희가 남은 이유를.”
철컥, 철컥!
대답 대신 총의 슬라이드 소리가 여러 번 들렸다.
“가자.”
진하의 짧은 말과 함께 달리는 조직원들.
콰앙!
창고 문을 터뜨리며 조직원들이 창고를 빠져나갔다.
“다들 어서 위로 올라…… 컥!”
“이것들은 뭐야!”
“습격이다! 이쪽도 습…… 켁…….”
순식간에 빠져나간 조직원들이 적들을 부수며 중앙으로 쳐들어갔다.
“적들이 중앙을 노린다!”
“위쪽에 인원이 부족해!”
갑작스런 상황에 적들이 우왕좌왕하며 조직원들을 상대했다.
픽!
다가오는 적 한 명에게 삼각자를 날린 진하가 전장을 바라봤다.
혼전이기는 했지만 다행히 그의 예상대로 조직원들이 행동하고 있었다.
피슉! 피슉!
퍽! 퍼억!
작은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총알들은 순식간에 적들의 몸통과 머리, 그리고 그 뒤쪽의 건물들까지 부수며 날아갔다.
“수뇌부는 저쪽인가?”
아마 지금쯤이면 한이 문을 막은 채로 버티고 있을 것이다. 그가 뚫리기 전에 빠르게 가야 했다.
타닥!
진하가 속도를 높였다.
중간중간 그에게 달려드는 적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삼각자를 이용해 다가오는 적들을 요격했다.
콰앙!
송하나가 알려 준 방 근처에 도착하자 커다란 굉음이 들렸다.
진하가 속도를 높여 도착하자 그곳에는 만신창이의 한이 방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남은 사람은 둘인가?’
피를 흘리는 한의 발에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와 대치하고 있는 두 명.
‘둘 다 A급이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진하가 셋 사이로 난입했다.
피비빅!
한 명을 향해 날아가는 삼각자 세 개.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상대가 급하게 몸을 틀어 삼각자를 피했다.
그리고 그 틈을 한은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어딜!”
나머지 한 명이 공격하려는 한을 향해 장검을 내질렀다.
카앙!
“좁은 공간에서 장검이냐?”
어느새 한의 앞을 막아선 진하가 혀를 차며 장검을 막았다.
“넌 또 뭐야!”
남자가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스킬을 쓴 상태로 진입한 진하에게는 좁은 공간에서 한정적으로 휘둘러지는 검 따위 피하기 쉬웠다.
캉! 카강!
진하가 환도와 삼각자를 이용해 상대를 압박해 갔다.
힐끗 옆을 보니 한 역시 상대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저쪽은 신경 꺼도 되겠고.’
완벽하게 신경을 끈 진하가 상대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진하의 공격을 막으며 물러나던 적은 처음에 당황했던 것과는 달리 점차 그의 움직임에 적응해 나갔다.
‘아직은 적응을 못 했어.’
아직 A급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건지, 진하의 반응 속도가 반의반 박자씩 느린 게 그의 눈에 보였다.
그가 파악하기로 진하의 상태는 A급 중간. 기술이 좋긴 했지만 신체의 부조화 때문인지 계속 엇박이 나고 있었다.
‘빠르게 끝낸다!’
좁은 공간에서 휘두르는 거라 불편하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만큼 진하가 피할 공간이 적다는 걸 뜻하기도 했으니까.
“풍인참!”
그의 말과 동시에 순식간에 진하에게 쏘아지는 수십 줄기의 검풍들.
그는 멈칫거리는 진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과거의 후회.”
진하에게 깃드는 또 하나의 환영.
콰과과광!
검풍이 진하가 있는 곳을 가르며 지나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진하가 존재하지 않았다.
푸욱!
“끄륵…….”
어느새 남자의 뒤로 돌아가 검을 꽂은 진하.
‘나를 속였…….’
남자는 미처 생각을 끝마치지 못한 채 그대로 절명했다.
촤악!
죽어 버린 남자의 목을 베어 버린 진하.
“후우, 후우.”
진하가 숨을 몰아쉬었다.
‘역시, 아직 일러.’
두 개의 환영을 겹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아주 잠깐만 사용했음에도 몸이 비명을 질렀다.
꿀꺽.
능력 때문인 건지 목이 갈라질 듯이 탔다.
당장…….
“후우…….”
한숨을 내쉰 진하가 한을 쳐다봤다.
상대를 몰아붙이는 중이었지만 당장 승부가 날 것 같진 않았다.
덜컥.
진하는 빠르게 입구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보이는 죽기 직전의 송하나.
가까스로 자신을 내리누르는 검을 막고 있는 그녀는 곧 죽을 것 같았다.
피비빙!
진하가 재빨리 삼각자를 날렸다.
그러자 그녀를 짓누르던 상대가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나쁘지 않아.’
전황을 빠르게 살펴본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주었던 아티팩트가 거의 다 부서진 것 같긴 했지만 그만큼 나쁘지 않은 성과를 만들었다. 후안은 이미 전투 불능이었으며 저 공간 안에 있는 것은 검은 남자 한 명뿐이었다.
‘하위 A급.’
검은 남자의 움직임을 보면 그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다만 어째서인지 스킬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세뇌의 영향인가?’
신념을 가져야만 될 수 있는 A급, 아마도 저 남자는 세뇌를 통해 그걸 뛰어넘은 듯했다. 다만 억지로 넘은 부작용인지 스킬을 사용 못 하는 것 같았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사용했을 테니까.
“뭐 하는 거지?”
어느새 상대를 처리하고 다가온 한이 진하에게 물었다.
“보면 몰라? 도와주고 있잖아.”
“그 소리가 아닐 텐데?”
한이 뭐라 더 하려다 이내 고개를 젓고 문 안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진하가 들어가려는 그를 붙잡았다.
“너는 중앙으로 가서 조직원들을 도와.”
꿈틀.
진하의 말에 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지금 그쪽이 더 급해. 네 보스를 못 믿나?”
진하의 말에도 그는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아니면, 네가 영원히 송하나 옆에서 떠먹여 줄 건가? 너의 보스 아니었어? 잘 생각해. 그녀가 진짜 보스가 되면 앞으로 이런 것보다 더 심한 상황이 더 많을 거야.”
그제야 가까스로 뒤로 물러나는 한. 그가 진하에게 속삭였다.
“잘 부탁하지.”
휘익.
“글쎄…….”
멀어지는 한을 보며 진하가 쓰게 웃었다.
이 모든 일을 계획상 사람한테 잘 부탁한다니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챙, 채쟁!
진하는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송하나, 그리고 그녀를 돕는 삼각자는 진하의 것까지 합쳐 모두 네 개.
그럼에도 전세는 바뀌지 않았다.
‘이겨 내라.’
여기서 진하는 손을 쓸 수 없었다.
삼각자까지야 그녀에게 진하가 넘겨준 거여서 문제가 없지만 그 외 모든 전투의 흔적은 그녀만 존재해야 했다.
오롯이 혼자 적의 보스를 죽여야만 그녀는 진짜 보스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앗!”
그 순간 그녀가 기합과 함께 적에게 달려들었다.
그에 맞춰 진하가 그녀를 보조했다.
콰직, 콰지직.
삼각자가 모두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생긴 빈틈으로 단검을 내뻗는 그녀.
카가각!
정중앙에서 서로를 노리는 단검이 마주쳤다.
“으…….”
힘이 부족한 그녀의 손이 점차 밀리는 게 보였다. 진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말했다.
“마인드 쇼크.”
진하의 한마디에 눈을 반짝이는 그녀.
그녀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번쩍.
곧바로 뜨여진 눈과 함께 상대의 손에서 순간적으로 힘이 풀렸다.
서걱!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자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긋는 송하나.
털썩.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에게 다가간 진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녀가 저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며 진하의 바지를 붙잡았다.
진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다리를 굽혀 몸을 낮춘 뒤 주저앉은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를 살짝 안아 줬다.
“괜찮아. 다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