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어, 왔냐.”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이기수를 보며 진하와 하예진이 인사했다.
이기수가 하예진에게 간단히 목례를 했다.
“몸은 괜찮아?”
이기수가 진하를 보며 물었다.
“어, 아직 움직이는 게 이질감이 심하긴 한데 나쁘지 않아. 너는?”
“나는 이제 거의 적응됐어.”
“그래?”
이기수가 하예진 옆에 앉았다.
꿈벅, 꿈벅.
그리고 말없이 서로를 보는 진하와 이기수, 그리고 옆에 가만히 서 있는 하예진.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가만히 있던 하예진이 일어났다.
“나 마실 것 좀 사 올게, 그동안 얘기라도 나누고 있어.”
하예진이 그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드르륵.
문이 닫히고 둘은 가만히 서로를 마주 봤다.
그러다 진하가 말했다.
“왜 그렇게 눈치를 주냐.”
“내가 뭘.”
“나랑 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그렇게 팍팍 티 내면 당연히 나가지 않겠냐?”
“말하진 않았잖아.”
뻔뻔한 이기수의 말에 진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진짜 너랑 단둘이 이야기할 것도 있고.”
이기수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
“뭔데?”
진하도 자세를 바로 고치며 물었다.
“어제 네가 얘기해 줬던 이야기들 말이야, 그리고 그 계획들.”
“응.”
“그거 너 혼자 짠 거야?”
“어, 나 혼자 짰어.”
내 말에 잠시 턱을 쓰다듬는 이기수.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물었다.
“너 혹시 사람을 이끌어 본 경험이 적어?”
“어? 아니?”
리더가 되어서 던전을 공략했던 적은 꽤 많았다.
“왜?”
“아니, 뭐랄까, 계획이 나쁘진 않은데 엉성해.”
이기수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진하의 의문점을 알았는지 이기수가 입을 열었다.
“어제 하준수 씨랑 나랑 너한테 자세하게 설명을 듣고 따로 이야기했었어.”
“그냥 나까지 있을 때 얘기하지, 굳이?”
“너에 대한 평가인데 네가 있어야 하겠냐.”
“뭐, 아무튼 그래서?”
“결론은 ‘평범한 듯 비범한데 어설프다’였어.”
“뭔 평가가 그러냐?”
서로 한 사람을 표현하는 수식어라고 생각하기엔 조합이 잘 맞지 않았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능력은 평범해. 그리고 던전 공략이나 몬스터를 상대하는 거에 있어선 비범해. 마치 수십 번은 잡아 봤던 몬스터나 공략했던 던전을 다시 공략하는 느낌이야.”
이기수의 말에 진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계획을 수립하거나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에 있어선 너무 1차원적이야.”
“1차원적이라고?”
“그래, 예전 계획도 그렇지만 지금 계획, 멘토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까진 좋아. 송준하라는 사람도 끌어들이고, 반기를 가진 사람도 끌어들여서 협회를 뒤집는다, 나쁘지 않아.”
“근데?”
“‘어떻게’와‘만약에’가 없어.”
잠시 이기수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생각을 가다듬는 듯 손가락으로 무릎을 몇 번 두들기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협회를 어떻게 전복시킬 거야? 그리고 만약에 실패한다면?”
“아니, 그것도 말해 주지 않았어?”
이기수의 말에 진하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
분명 협회를 부수는 일에 몇 가지 방법을 설명했던 거로 기억했다.
“설명이야 했지. 근데 그 방법들이 서로 동떨어지거나 가짓수가 적은 게 문제야.”
이기수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쳐 진하에게 보여 주었다.
“첫째, 계획이 엉성해. 마치 당연히 그럴 거라는 전제하에 계획을 세우고, 혹시나 하는 경우의 수가 너무 적어.”
이기수가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둘째, 수단. 협회를 전복시키기 위해 나를 이용한다? 이건 좋아. 근데 그 외적으로 방법이 너무 약해. 블랙 길드는? 그리고 세력을 모은다면 구심점은?”
진하가 이기수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이기수가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이것까지만 말할게. 즉, 결론만 내리자면 노련한 헌터 같은 게 너야. 근데 사람을 이끌거나 머리를 쓰는 쪽으로는 평균 정도밖에 안 돼.”
“어…… 뭐…… 그렇지.”
반박하려던 진하가 입을 다물었다.
뭔 소리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지막으로 이기수가 한 말까지 생각하면 사실 모두 팩트였다.
그는 뭐가 잘난 게 아니라 그저 숙련된 헌터에 미래의 지식을 조금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머리를 쓰는 게 그리 특기도 아니었다.
그저 써야 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쓰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계획 전면 수정하자.”
“뭐?”
진하는 살짝 눈이 커진 채로 그를 바라봤다.
물론 진하 스스로 이 계획이 완벽해서 바꾸자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 건 아니었다.
다만 진하가 알기로 이기수도 그리 머리 쓰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건 하준수 역시 마찬가지였고.
“뭘 생각하는지 알아. 지금 나나 하준수의 머리로 생각해도 네가 말한 거 이상으로 세세히 작전을 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 아냐. 대신 블랙 길드를 이용하자는 거지.”
이기수의 말에 진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블랙 길드를 이용하는 것, 그것만큼 더러운 일은 없었으니까.
“설마 그걸 진심으로 하는 얘기는 아니지?”
진하의 물음에 이기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진담이야.”
“어째서? 그 새끼들은 상종 못 할 놈들이라는 거 몰라?”
“알아, 그래서 필요해.”
진하는 이기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필요하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협회는 협회원과 대형 길드가, 썩은 길드는 길드를 연합해서. 물론 이게 정석이라 생각할 순 있어. 근데 너무 번거롭지 않아?”
“그 방법밖에 없잖아.”
믿을 만한 사람을 찾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반대로 그 세력을 모아 치는 방법을 만드는 것도 매우 어려웠다.
진하가 둘에게 설명해 준 것도 그나마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인 거지.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말한 게 아니었다.
“왜 그걸 세력을 만들고 꺾으려고 해?”
“기존의 세력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면 되잖아.”
“그건 불가능해,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관계인데 끝장을 볼 리 없잖아.”
이기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방법이야말로 악수였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려고 하는 상태에서 썩은 칼을 사용한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길드든 협회든, 어느 쪽이든 분명 블랙 길드와 연결되어 있을 게 분명한 집단이었다.
그런데 그곳을 이용한다는 건 ‘내 목은 여깄습니다.’ 하고 싸우는 것과 같았다.
“딱 한 곳 있잖아, 중립인 곳.”
이기수의 말에 진하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거기도 같은 곳이야.”
“아니, 적어도 거긴 직접적으로 연관되거나 행하진 않잖아.”
“말로는 중립이라 하고 중립이 아닌 곳이기도 하고.”
“반대로 가장 이득에 민감한 곳이기도 하지.”
이기수의 말에 잠시 진하가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득을 주기 싫다는 거야. 내 기준에선 정보 길드도 똑같은 블랙 길드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증거는?”
“그거야…….”
이기수의 말에 진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미래에 도망가는 길드들 중 하나라고. 그리고 게이트 폭주가 끝나면 항상 귀신같이 돌아와 이득을 챙기던 존재들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사건들은 모두 미래에 일어나는 일이라 증거가 될 수 없었다.
“넌 선이 너무 명확해.”
“선?”
“미리 이 사람은 좋고 이 사람은 나쁘다 결론 내놓고 행동하잖아.”
“그거야 원래 그런 사람들이야. 이건 사실이야.”
진하의 말에 이기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난 그 송준하라는 사람도 왜 끌어들이려는 건지 모르겠어.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헌터잖아.”
“내가 말했다시피…….”
“그래 언젠가는 대성하겠지. 그리고 좋은 사람이겠지. 근데 미래에 그게 꼭 일어나라는 법 있어?”
이기수는 진하가 말을 끊지 못하게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그래 네가 그랬지. 너는 미래에 대해 대략적으로 안다고, 예지한다고. 근데 그게 다 정답이었어? 우리가 만났던 죄악의 리치, 그거 맞았어?”
“……아니.”
“네가 그랬지? 죄악의 리치는 원래 12층 이하에서 활동한다고.”
“어.”
“그래서 결론은 어떻게 됐어?”
7층에서 만나 9층으로, 그리고 9층에서 만나 12층으로 이동되었었다.
“그 말은 너의 예지도 정확한 게 아니라는 거야. 미래는 계속 가변해. 근데 네가 말하는 건 그걸 모두 커버할 수 있지 않아. 적어도 내 판단은 그래.”
“그건 나도 알아.”
진하가 미래를 바꿀수록 기존의 미래도 변경된다.
나비효과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바뀌어 미래에는 그런 짓을 안 할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무엇보다.
‘나에겐 미래가 아니야.’
미래라 얘기했지만, 진하에게 있어 그건 미래가 아닌 과거였으니까.
이기수는 단호한 진하의 표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선택해.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미래를 바꾸는 거야? 아니면 네 주변을 살리는 거야?”
“뭐?”
진하는 순간 이기수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변을 살리는 것과 미래를 바꾸는 것 중에 선택하라는 게 무슨 뜻인 건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이기수가 되물었고 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살리기 위해서는 미래를 바꾸는 건 당연한 거야. 근데 그걸 어째서 따로 봐야 하는 거야?”
“그야, 다르니까.”
다르다?
진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다른지 알려 줄 수 있어?”
“네가 주변만 지키려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은 많아. 게이트가 없는 곳으로 사람들을 데려가도 되고, 그게 아니면 그냥 작은 길드를 모으든 대피소를 만들어 그곳으로 피하면 되는 거야.”
“야, 그건 말이…….”
“그래, 말이 안 되지.”
이기수가 진하의 말을 끊었다.
“네 주변 사람들에게도 또 다른 소중한 사람이 있을 거고 그렇게 행하는 건 자기만족일 뿐이야, 근데.”
“그런데?”
“지금 네가 하는 짓이 너무 애매해. 모두를 살리고 싶고, 미래에서 본 나쁜 놈들은 상대하기 싫은데 미래를 바꾸고 싶다. 이게 무슨 게임이야? 아니면 소설이야?”
“둘 다 아니지.”
“우리 솔직하게 목표 제대로 잡자. 다 이루고 싶은 건 알겠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이기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하야.”
“응.”
“너도 알지? 사실 나나 하준수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도 이상한 거.”
“어.”
“너의 멘토를 해 주고 너를 치료하는 것만으로도 빚은 어느 정도 갚은 거야. 다른 것도 마찬가지고.”
“나도 알아.”
진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나 잘 알았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거는 건 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하는 거였다.
“그런데 우리가 널 돕는 건 단 두 가지 이유 때문이야.”
“목적이 같아서.”
“그래, 그것도 있지. 목적이 비슷한 거. 하지만 하나 더, 우린 너를 믿는 거야.”
“믿어?”
“그래, 너라는 사람을 믿고 네가 봤다고 말하는 미래를 믿는 거야. 실제로 증거는 없지만, 지금껏 네가 해온 행동이 그걸 증명하니까 널 믿는 거지.”
이기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정말 네가 미래를 바꾸길 원한다면 미래의 지식에 얽매이지 마.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 그래야 미래를 바꿀 수 있어.”
“고맙다.”
진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물론 지금 당장 이기수가 말하는 걸 받아들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도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이기수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그리고 얼마나 진심이 담겼는지 알기에 고맙다고 한 것이었다.
“알면 됐다. 그리고 하나 더, 정말 미래를 바꿀 거면 명심해. 네가 중심이 되고 네가 살아야 해.”
“나도…….”
드르륵.
“음료 사 왔어요.”
문이 열리며 하예진이 들어왔다.
‘끝내주는 타이밍이네.’
시간을 보니 벌써 10분 이상 지나갔다.
아마 하예진도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서 들어온 것 같았다.
“암튼 네가 말한 건 생각해 볼게.”
진하는 원래 말하려던 말은 속으로 담아 둔 채 간단하게 마무리 지었다.
그러고는 문 앞에서 조심스럽게 서 있던 하예진을 불렀다.
“음료 뭐 사 왔어?”
“음…… 콜라?”
하예진은 다행히 타이밍을 맞췄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콜라를 둘에게 던졌다.
탁!
미끌, 데구르르.
이기수가 콜라를 간단히 잡아챘다.
그와 반대로 진하는 콜라를 놓쳤다.
“저기, 환자에게 콜라 던지기 있음?”
“이제 거의 다 나았다며.”
“아니, 그렇긴 한데.”
진하는 자신이 한 말이 있어 할 말이 없었다.
하예진이 콜라를 던진 건 분명 복수가 분명했다.
‘아, 치사한 놈.’
진하가 하예진을 보자 그녀가 입술을 샐쭉 내민 채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 받아라.”
이기수가 땅에 떨어진 콜라를 집어 들었다.
“고마워, 근데 뭐 하는 짓이니?”
진하는 이기수를 보며 물었다.
“응? 아무 짓도?”
그렇게 말하는 이기수는 연신 진하의 콜라를 흔들고 있었다.
“이 썩을 놈들아! 다 나가!”
진하가 소리치자 둘은 쿡쿡 웃었다.
“장난이야. 아무튼, 다 나은 뒤에 보자. 한 달 정도는 내가 막을 테니까.”
이기수가 그 말을 한 뒤 걸음을 옮겼다.
“벌써 가게?”
“가야지. 너와 달리 곧 SS급 헌터는 할 일이 많답니다.”
간단하게 손을 흔든 뒤 이기수가 나갔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예진이 진하에게 다가갔다.
“이야기는 잘했어?”
“그럭저럭, 고마워.”
“괜찮아, 이 정도는 당연한 걸.”
진하는 하예진의 배려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예전이었다면 꼬치꼬치 캐물었겠지만 이제는 그만큼 자신을 믿어 주는 게 보였다.
물론 그만큼 나중에 얘기해 줄 거라고 믿는 거기도 하겠지만.
“자, 이제 하던 걸 마저 해야지?”
“하던 거?”
하예진이 손을 푸는 게 보였다.
“야, 야! 그건 아니지! 환자인데!”
진하가 오들오들 떨며 이불을 끌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