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가진 SS급 문방구-31화 (31/202)

#031

‘12층 마지막 구간.’

이슬라가 있는 구간이었다.

모든 상황을 파악한 진하가 아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말을 잘해야 돼.’

조금이라도 잘못 말했다간 1분은커녕 10초도 안 돼서 죽어 버릴 게 분명했기에.

“저는 헌터, 김진하라 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호, 그래도 예의를 밥 말아먹은 놈은 아니구나.”

진하의 말에 이슬라가 씨익 웃었다.

‘된 건가?’

“하지만 말이야.”

스윽.

이슬라가 손을 들어 올리자 김진하의 몸이 순식간에 그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콰악!

“크윽…….”

“내 앞에서 감히 질문이라니, 공손한 놈도 아니구나.”

목이 잡힌 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목이 잡혔을 뿐인데 몸의 통제권이 모두 이슬라에게 넘어갔다.

“정체…… 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흐음?”

진하의 말에 이슬라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툭.

“허억, 허억!”

이슬라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진하가 주저앉은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넌 인간이군. 그럼 나를 모를 수 있겠지.”

이슬라가 몸을 일으켜 주저앉은 진하를 내려다봤다.

“특별히 말해 주마. 내 이름은 이슬라, 뱀파이어 대공이다.”

“뱀파이어 대공이라 함은…….”

“너희 인간들 말로는 왕이라고 해야 하나?”

이슬라의 말에 진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정확히는 푹 숙인 척 남은 시간을 몰래 확인했다.

‘남은 시간 1분 30초.’

“뭘 그리 확인하는 거지?”

이슬라의 말에 진하가 몸을 움찔했다.

“설마 모를 거라 생각했느냐? 도망갈 생각이 가득한 쥐새끼들 따위 어차피 거기서 거기지.”

이대로는 안 된다.

순간 진하의 머릿속에 스친 생각이었다.

순수하게 비굴한 척, 모르는 척 대화로 이끌 수 있는 시간은 이게 다였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정반대로 나가야 했다.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하, 역시 연기는 나랑 안 맞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진하.

진하는 일어나 이슬라를 마주 바라봤다.

“꿇어라.”

“미쳤냐? 몬스터에게 무릎을 꿇게?”

퍼억!

순식간에 진하의 양팔이 날아갔다.

“다시 한번 말하지, 꿇어라.”

“너, 왕 아니잖아.”

진하가 느껴지는 통증을 꾹 참으며 말했다.

이슬라는 왕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뱀파이어 대공이었다.

공작보다는 높지만 왕은 아닌 존재.

그는 1차 게이트 폭주 보스였지만 그렇다고 유일한 존재는 아니었다.

실제로 유럽 쪽 게이트에도 대공을 칭하는 놈들이 있었으니까.

‘남은 시간 50초.’

퍼억!

다리 한쪽이 더 날아갔다.

자동으로 진하의 몸이 기우뚱 쓰러졌다.

“이곳에 처음 발을 들이민 인간이라 배려를 해 줬더니 기어오르는군.”

“리비카, 시안, 비앙카.”

진하를 짓밟으려던 이슬라가 진하가 내뱉는 말에 멈칫했다.

“모두 자신이 대공이자 왕이라 칭하는 뱀파이어들이지 않아?”

“어디 그 잡것들과!”

퍼억!

진하가 멀리 날아갔다.

하지만 이번엔 힘 조절을 한 건지 어디 한 곳이 날아가진 않았다.

까딱.

이슬라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진하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한 번 더 까딱이자 이슬라 앞으로 끌려갔다.

‘젠장, 개 같네.’

없어져 버린 팔, 다리에서 피조차 흐르지 않고 있었다.

완벽하게 주변을 통제하고 있는 이슬라.

“너는 누구지? 어떻게 그 이름을 아는 거지?”

이슬라가 진하와 눈을 맞췄다.

“그게 중요해? 중요한 건 네가 왕이 아니라는 거지.”

남은 시간 30초.

“건방지구나.”

진하에게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피는 정확하게 이슬라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한 방울, 한 방울 몸속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진하는 그 느낌이 너무나도 소름 끼쳤다.

“피가 빠져나오는 느낌은 어떻지? 소름 끼치나? 아니면 절망스럽나?”

“글쎄…….”

“아직도 눈빛이 살아 있구나, 살고 싶지 않은 건가?”

“넌 내 정체를 알고 싶지 않아?”

남은 시간 15초.

“크큭, 재밌구나. 아직도 빠져나갈 궁리를 하나? 네가 어떤 궁리를 해도 여기서 나갈 방법은 없다.”

“글쎄…….”

“흐음…… 그냥 죽이는 게 어쩌면 나을지도 모르겠군.”

“있잖아, 그렇게 강하면서 왜 아직도 대공인 거야?”

진하가 이슬라를 도발했다.

대공은 총 네 명, 그중 12층 게이트 보스는 시안과 이슬라밖에 없었다.

즉, 자기가 왕이라 말하지만 결국 그들 중 왕은 없다는 거였다.

실제로 뱀파이어 로드라 칭한 존재는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고.

“시안이 그렇게 강해? 네가 로드가 되지 못할 정도로?”

“그 입 닥쳐라, 지금 당장 죽고 싶은 건가?”

“아니, 그건 아니야.”

남은 시간 10초.

“어차피 나 못 죽이잖아. 설마 아무것도 모른 채로 날 죽이게?”

“상관없다, 내 권속으로 만들어 밝혀내 주지.”

“고작 나 따위를 권속으로?”

남은 시간 5초.

진하의 몸이 천천히 이슬라에게 끌려갔다.

그를 보며 진하가 씨익 웃어 주었다.

“X까라.”

남은 시간 0초.

<문방구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강제 귀환이 이루어집니다.>

푸욱.

이슬라의 이빨이 목덜미에 박힘과 동시에 사라지는 김진하.

따악.

이슬라의 이빨이 허공을 가르며 부딪쳤다.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슬라가 진하가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미 진하는 없는 상황.

그저 그의 입 안에 남은 아주 적은 피만이 그가 있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으…… 으아아!”

상황을 깨달은 이슬라의 고함과 동시에 사방으로 핏빛 바람이 쏟아졌다.

쾅, 콰광!

주변을 사정없이 부수는 핏빛 바람.

까드득!

“다음에 만나면 죽여 버리겠어!”

* * *

“하…….”

뒤바뀐 시야를 느끼며 진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절한 도발과 시간 끌기로 3분이라는 시간을 겨우 끌 수 있었다.

‘공부해 두길 잘했지.’

오만하고 또 지루한 걸 싫어하는 이슬라.

그걸 알았기에 버틸 수 있었다.

아니 사실 그걸 알아도 2분이라는 시간을 버티는 건 진하에게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말주변이 좋지 않았으니까.

“일단 살았다는 게 중요하지.”

<남은 가용 시간/남은 체류 시간: 0/2분.>

‘이번에 리셋되면 짧게 바꿔야겠어.’

그래야 추후에 무슨 일이 생겨도 더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듯했다.

간단하게 모든 걸 확인한 진하가 한 발로 일어났다.

줄줄줄줄.

이슬라가 사라지자 점차 흐르기 시작하는 피.

목에서도 통증이 느껴졌다.

아마 막판에 이빨이 박힌 것 같았다.

‘흠, 뒤지겠는데?’

어느새 조그맣게 고이기 시작하는 피를 보며 진하가 방 안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치료액을 물었다.

콰득.

단단한 플라스틱이 부서지며 입구가 열렸다.

“퉤!”

플라스틱을 뱉은 진하가 치료액을 물고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꿀꺽, 꿀꺽.

티딩.

다 마신 빈 병이 땅바닥을 뒹굴었다.

진하는 다시 옆에 있는 치유액을 입으로 부숴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총 네 번.

치유액을 모조리 마신 진하는 어느 정도 피가 멎는 걸 느꼈다.

“어째 강제 귀환으로 여기에 올 때마다 상처투성이냐.”

진하가 피범벅으로 변한 방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중에 이걸 치울 생각을 하니까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니, 아찔한 건 피 부족 때문인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진하가 옆에 있는 오래된 전화기에 얹어진 수화기를 입으로 민 뒤에 혀로 119를 눌렀다.

―네, 119입니다.

“저기, 음…… 제가 많이 다쳤거든요. 혹시 와 주실 수 있나요?”

―지금 상태가 어떠시죠?

“팔 두 개랑 다리 한 짝이 날아갔어요.”

―네?!

“아, 치유액 먹어서 피는 멈춘 상태인데 이동하기는 어려운 상태라서요.”

―어디시죠? 피가 심장으로 잘 갈 수 있게…….

진하는 당황하는 구급대원의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모든 통화를 끝낸 진하는 그대로 바닥에 누운 채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와, 젠장 이제 고작 일주일 정도 지난 거야?”

통합 게이트 공략의 시작부터 문방구로 돌아오기까지 약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겪은 일만 생각하면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이 넘게 지난 것 같았는데 고작 일주일이었다.

“후, 뒤지겠네.”

문제는 앞으로 남은 일도 산더미라는 거였다.

뭔 일을 하나 할 때마다 이렇게 다치니 이래서야 제대로 계획을 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쾅쾅쾅!

“계십니까!”

그때 누군가가 문방구 문을 두드리며 소리치는 게 들렸다.

구급대원이었다.

“역시 119.”

진하는 한 발로 작은 방의 문을 연 뒤에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밖에서 문을 두들기고 있는 구급대원들이 보였다.

구급대원들은 진하를 보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냥 자물쇠 부수세요.”

진하는 구급대원들에게 말한 뒤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진하의 말에 자물쇠를 부수기 시작하는 구급대원들.

‘흠, 그나저나 치료되는 데 얼마나 걸리려나.’

과거와 달리 지금의 의료기술은 팔, 다리는 물론 없어진 장기 또한 만들고 새로 달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다만 그만큼 돈이 많이 들어가 진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절대 치료받을 수 없을 만큼 비쌌지만.

‘이 당시에 기수 재산이 얼마나 있었더라?’

돈이야 이기수에게서 충당할 생각이었다.

다만 얼마나 빨리 치료될지가 관건이었다.

치료가 빠르면 빠를수록 진하에게 유리하니까.

드르륵.

문을 열고 구급대원들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뭐 어떻게 되든 일단은 잊기로 했다.

휴식을 할 시간이었다.

‘근데 뭘 잊은 거 같은데?’

뭔가 등짝이 욱신거렸다.

* * *

짜악!

등에서 통증을 느끼며 진하는 울상을 지었다.

“야! 그만 좀 때려!”

벌써 10대가 넘게 맞았다.

환자를 이렇게까지 때리다니, 이건 인권 유린이었다.

“어떻게!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등짝을 때리는 주범, 하예진이 잔뜩 화난 얼굴로 진하를 노려봤다.

“흠,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긴 한데.”

그녀의 표정을 보며 진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병원에 입원한 지 약 일주일.

진하는 치료를 받느라 하예진에게 연락을 못 했었다.

“어떻게 내가 네 소식을 남을 통해서 들어야 하는 건데!”

중간에 잠깐 병문안 온 하준수의 말로는 진하의 귀환 소식을 몰랐던 하예진이 협회에 살다시피 하면서 계속해서 수색을 요구했다고 한다.

당연히 협회에선 이기수가 돌아온 이상 굳이 수색할 필요가 없었으니 하지 않았고, 하예진은 진하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을 모르니 깽판을 쳤다고 한다.

그나마 뒤늦게 하준수가 그걸 알고 하예진에게 소식을 전해 준 거고.

“조금만 이해해 줘라, 나도 크게 다쳐서 너무 정신이 없었어.”

진하가 새로 달린 팔, 다리를 들어서 보여 주었다.

그의 말에 하예진이 그를 노려봤다.

‘사실 치료야 이미 거의 다 끝났지만.’

거동이 조금이나마 가능할 정도로 치료는 3일 만에 완료되었다.

이기수의 돈과 협회의 속 보이는 호의 덕에 최고급 치료를 받았으니까.

다만 퇴원하지 않고 병원에 남아 있는 건 새로 달린 팔, 다리의 혹시 모를 부작용 또는 재활치료를 위해 남아 있는 것일 뿐이었다.

“내가, 내가…….”

울먹이려는 하예진.

그런 그녀를 보며 진하가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내가 미안해. 뚝, 울지 말고.”

여기 온 후부터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울먹이고 있었다.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말했잖아, 난 안 죽는다고. 어떤 일이 있어도 다 빠져나올 방법이 있으니까 걱정 마.”

물론 개소리였다.

그런 게 가능했으면 목숨을 걸고 생사를 안 넘었지.

그래도 어느 정도 뻥이 통한 건지 아니면 그냥 넘어가 주는 건지 하예진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살았다.’

근 한 시간에 걸친 달램이 끝났다는 걸 느낀 진하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하예진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너 지금 헌터 랭크 몇이야?”

“C 랭크.”

“실제 치유 능력은?”

“B 이상.”

하예진의 대답에 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거대 길드가 모셔 가려는 헌터답게 미친 듯한 치유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근데 나 스킬 하나 더 각성했어.”

“어?”

“패럴라이즈라는 스킬 각성했어.”

하예진이 상태창을 가시화해 진하에게 보여 주었다.

<패럴라이즈: 원하는 대상을 5분간 마비시킨다. 원하는 강도로 조절 가능.>

“어쩌다 각성한 거야?”

진하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물었다.

“그냥 치료하면서 고통을 느끼는 헌터들이 많길래 제발 안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

하예진의 말을 들으며 진하는 어이없음을 느꼈다

‘신념이 필요하다며, 그것도 강렬한.’

이건 그가 봤던 SS급 능력자가 해 줬던 말이었다.

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그가 만났던 대부분의 헌터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종합한 내용이라고까지 말해 줬었다.

근데 이렇게 빠르고 쉽게 얻는다고?

‘이걸 재능이라고 해야 할지,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그만큼 남을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순수한 거고, 반대로 너무나 쉽게 각성했다는 점에선 재능의 영역이었다.

“왜 그래?”

하예진이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진하를 보며 물었다.

진하는 그런 하예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냐, 그냥 잘했어.”

하긴 누구나 똑같이 출발할 수 없는 게 이쪽 바닥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렇게 쉽게 각성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라 정신이 좀 어질할 뿐.

‘그 이기수조차 스킬 하나 각성하는 데 오래 걸렸는데 말이야.’

드르륵.

그때 문이 열리며 환자복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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