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후아…… 죽겠다.”
겨우 문방구로 돌아온 진하가 드러누웠다.
고작 3일이었지만 병원과 협회에서의 시간은 너무나 불편했다.
견제도 해야 하고 머리도 써야 했으니까.
“그래도 치료받은 거는 좋네.”
협회가 아니었다면 치료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뻔했다.
물론 하예진에게 부탁하면 어느 정도 바짝 당길 수 있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부려 먹는 건 양심에 너무 찔렸다.
“상태 창.”
상태창을 외치자 반투명한 창이 진하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름: 김진하
능력: 신체 강화
칭호: 문방구 알바
상태: 전신 타박상, 자상, 창상, 신체 절단(급진적 치료 완료, 전투 가능까지 약 15일)>
역시 거의 다 완치되었다.
몸에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완벽한 치료를 행하진 않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포인트 현황.”
<포인트: 12,300>
남은 포인트는 12,300, 생각보다 많이 남았다.
빚은 사족오에서 받은 돈으로 갚았으니까 오히려 이득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물론 저급 마석을 다 때려 박은 덕에 더 이상 저급 마석들로는 포인트를 얻기 어렵겠지만 나쁘게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길드, 항암 그룹, 협회, 그 녀석.”
생각나는 대로 단어들을 나열했다.
모두 다 처리해야 하는 일들.
그중 항암 그룹과 길드, 협회는 뒤로 밀어 두었다.
어차피 눈치 싸움하느라 당장은 움직이기 힘들 테니까.
‘한태성을 자극해 두기도 했고.’
이런 점에서 단순한 새끼들이라 좋았다.
상대가 만만하면 남에게 사냥감을 뺏기는 걸 싫어하는 미련한 것들.
그 복수 상대가 먹을 것도 많으니 협회와 더불어 잠시 동안 방패가 되어 줄 게 분명했다.
당분간 대기업과 길드는 신경을 꺼도 될 듯했다.
물론 감시가 붙긴 하겠지만.
“그럼, 남은 건 그 녀석인데…….”
그 녀석을 만날 기회는 대략 4주 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럼 이것도 제외.
“그렇다면 먹이를 더 던져야지.”
현재 힘의 균형은 협회가 너무 압도적으로 우위였다
그렇다면 협회의 힘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좀 더 시간을 벌고, 썩은 부위를 도려내기 쉬울 테니까.
“이제 9개월 정도 남았나?”
게이트 폭주까지 남은 시간 9개월.
실제로는 12층 정복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니까 아주 정확하진 않았다.
자신이 해 놓은 일들이 있으니까.
멀다면 멀고, 짧다면 짧은 시간.
“후우……. 막막하네.”
과거를 바꾸긴 했지만 앞으로의 일이 막막했다.
지금까지 그가 바꾼 것은 아주 일부에 불과했다.
그것도 커다란 사건이 아닌 작은 사건들.
과연 모든 걸 바꿀 수 있을까?
짝! 짝!
“배부른 소리 하지 말자!”
얼굴을 손으로 세게 두들기자 정신이 좀 들었다.
낙담해선 안 됐다.
결국은 어찌 됐든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야 동료를 살리고 미래를 바꿀 수 있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자신 혼자 해야 했다.
“그리고…….”
진하의 시선이 방 밖의 뽑기에 닿았다.
제한을 풀고 뽑기까지 할 수 있게 되면 부모님까지 살린다.
그게 진하가 생각하는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다.
“자, 그럼 다음 일을 해야지.”
쉴 시간도 아까웠다.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이도현의 금고 털기.
“분명 성북구에 안가가 있다 떴었지.”
안가는 이도현의 비리가 담겨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
그곳을 털어 낸다면 최소 이도현을, 최대 그와 연결된 사람들까지 한 번에 엿 먹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거면 어느 정도 힘의 균형도 맞춰질 게 분명했다.
“아마 지금쯤 보고가 들어갔겠지?”
지금쯤 온갖 길드와 협회에 자신의 정보가 들어갔을 거다.
그게 다시 명령으로 내려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겠지.
그 안에 해결해야 했다.
“사실 원래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말이야.”
이 계획은 세웠다가 포기했던 계획이었다……
안가의 위치도 정확히 모를뿐더러, 그럴 능력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가 이걸 발견하고 생각이 바뀌었다.
설마 가판대 구석에 이런 게 있을 줄은 몰랐다.
툭, 툭.
진하가 따로 빼 둔 상자의 먼지를 털어 냈다……
장난감의 뚜껑을 열자 나타나는 작은 돋보기 하나.
<탐정 돋보기의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정보 확인.”
<모 유명 만화를 본떠 만든 탐정 돋보기. 이것만 있으면 어떠한 흔적이든 모조리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용: 내 이름은 탐정, 범인이죠. / 해제: 내 증조 부모님의 명예를 걸지 않겠어.>
아티팩트치고 드물게 친절한 설명이 붙어 있는 제품.
말 그대로 모든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내 이름은 탐정, 범인이죠.”
진하가 시동어를 외우자 돋보기가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검색할 것을 설정해 주십시오.>
진하가 재빠르게 돋보기 위에 머리카락 하나를 올렸다.
취조 때 몰래 가져온 이도현의 머리카락, 이걸 이용해 추적한다면 안가를 찾는 건 쉬웠다.
<검색을 시작합니다.>
돋보기가 더욱 빛을 내기 시작했다.
<검색이 완료되었습니다.>
“흐음…… 그럼 어디 한번 볼까?”
돋보기로 보이는 세상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다만 이도현의 머리카락을 잡았던 손이 묘하게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그 손가락에 잠시 정신을 집중하자…….
<이도현의 머리카락을 만졌던 손가락. 굳은살이 박여 있다.>
“오…… 이런 식인가?”
생각보다 정확한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이걸로 지도를 본다면?
진하가 태블릿을 꺼내 지도 어플을 실행시켰다.
그러자 돋보기 너머로 여러 가지 선과 점들이 지도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각각 초록과 노랑, 그리고 빨강과 검정.
“흐음…… 초록이 지금 움직이는 동선인 건가?”
실시간으로 초록색 선이 그려지는 것을 보아 맞는 듯했다.
그리고 이도현과 만났던 협회는 초록 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아마도 시간에 따라 동선이 선으로 그어지고 장소는 점으로 표시되는 듯했다.
그리고 점차 색이 변해 가다가 없어지는 거겠지.
“일단 성북구를 보자.”
성북구를 살펴본다면 분명 어느 정도 각이 나오겠지.
안방처럼 성북구 전체를 돌아다니진 않았을 테니까.
지도를 확대하자 서울시에 찍혔던 수많은 점이 사라지고 몇 개만 남았다.
각기 초록, 노랑, 빨강, 검정의 점들로 이루어진 10개의 점들.
“흠…… 일단 초록은 제외하자.”
대부분 음식점이나 공연장으로 찍혀 있는 게 그냥 방문한 듯싶었다.
초록을 제외하자 남은 건 총 세 군데, 일반 주택과 점집, 주유소 3곳이었다.
각기 빨강과 검정으로 물들어 있는 공간, 어느 쪽이 더 오래된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밖에 남은 곳이 없었다.
세 군데 모두 이도현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장소들.
이곳들 모두 안가로서의 가능성이 넘쳐 보였다.
“2일이면 되겠어.”
* * *
2일 후.
어느 한 점집에서 나온 진하가 뻐근한 목을 감쌌다.
“어후, 미친 자식. 겁나 꼼꼼히도 숨겼네.”
얼마나 철저하게 숨겼는지 돋보기를 이용했음에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그래도 아주 어렵진 않았지.”
의외로 보안이 허술하다고 해야 할까?
경비가 나름 적어서 침투하는 데 어렵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언제 나올 거야?”
진하가 꺼진 가로등 밑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가로등 밑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숨을 거면 살기라도 숨기시든가, 대놓고 흩뿌리면서 숨는 건 무슨 심보야?”
진하의 말에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
진하는 검은 옷을 입은 존재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꿀꺽.
드러난 기세만 봐도 최소 A급이었다.
즉,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존재였다.
‘성별은 여자, 주 무기는 단검인가?’
짧은 단검을 쥐고 있는 게 자연스러웠다.
적어도 주 무기는 아니더라도 부 무기 정도는 된다는 뜻이었다.
‘도망은?’
주변 퇴로를 살펴봤지만 있을 리 없었다.
“누가 보냈어?”
“…….”
진하는 농담 따먹기라도 하듯 편하게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진하에게 손을 까딱였다.
“뭐? 그 손짓 뭔데?”
서걱.
‘못 봤어.’
본능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목이 달아났다.
볼 끝에서 배어 나오는 핏줄기를 느끼며 진하는 식은땀을 흘렸다.
“뭘 원하는지 말은 해 줘야 알아듣지 않을까?”
“장부.”
쇠 긁는 목소리, 역시 목소리가 변조되었다.
“장부를 넘겨주면 날 살려 줄 건가?”
진하가 물었지만 여자는 묵묵부답이었다.
“날 죽이면 장부도 멀쩡하진 못할 텐데?”
진하가 한쪽 손에 쥔 구슬을 보여 주었다.
멈칫―
순간 여자가 멈칫했다.
‘협회는 아니다.’
협회였다면 멈칫하지 않았겠지.
그리고 진하의 입장에선 협회만 아니면 되었다.
휘리릭!
“자, 가져가!”
진하가 장부를 땅으로 내던지며 몸을 뒤로 날렸다.
스걱!
몸을 숙이자 칼날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장난 아니잖아!’
진하의 목숨까지가 목표인지 그대로 칼을 내리꽂는 여자.
푹!
일어나며 어깨로 단검을 받아 낸 진하가 여자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곧바로 반대쪽에서 날아오는 또 하나의 단검.
콰직.
콰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쿨럭.”
진하가 뒤로 물러나며 인상을 찌푸렸다.
영롱한 구슬을 깨뜨린 오른손에 감각이 없었다.
‘상대는?’
뒤로 크게 물러난 상대가 보였다.
그녀도 완벽하게 폭발을 벗어나진 못했는지 타 버린 옷 사이로 곳곳에 화상을 입은 게 보였다.
“그만하는 건 어때?”
진하가 주위를 가리켰다.
폭음으로 인해 주변 집들이 모두 불을 켠 상황.
아마 곧 신고가 들어갈 게 분명했다.
스르륵.
여자가 진하를 노려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에는 언제 주운 건지 장부가 들려 있었다.
“그럼 난 이만!”
진하가 재빠르게 다시 몸을 날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지만 쫓아오지 않았다.
‘된 건가?’
오싹.
진하가 재빠르게 몸을 굴렸다.
퍽!
허벅지에 꽂히는 단검 하나.
급하게 뒤를 돌아보니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몸을 긴장시킨 채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나타나지 않는 그녀.
완벽하게 사라졌다.
“하하, 봐준 거네.”
진하가 헛웃음을 지었다.
봐준 게 아니라면 이렇게 살아남을 리 없었다.
‘A급 최상위 헌터.’
“그리고 은빛 머리카락.”
그녀를 찾을 유일한 힌트였다.
“그나저나 나도 피해야겠네.”
벌써 신고가 들어간 건지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진하가 몸을 날렸다.
그리고 이동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어 전화를 걸었다.
-와이?
핸드폰 너머로 하예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진아 나 좀 간다.”
-어?
문방구는 감시가 깔렸을 테니 가서는 안 됐다.
“참고로 치료 물품 좀 준비해 주고.”
-뭐?! 야 그게 무슨 소리야!
삑!
진하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하예진의 집 쪽으로 몸을 틀었다.
잔소리는 확정이었다.
‘흠…… 피라도 좀 없애고 갈까?’
* * *
똑똑.
“접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쇠 긁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방 안에 있던 사내가 말하자 문이 열리고 여자가 들어왔다.
“흐음…… 근데 꼭 그런 목소리를 내야 하나?”
여자의 본 목소리를 알고 있는 남자가 물었다.
“…….”
대답하지 않는 여자.
남자는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다음 말을 내뱉었다.
“내가 부탁했던 것은?”
“가져왔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책상 위로 장부 하나를 올렸다.
남자는 여자가 올려놓은 장부를 열어 보았다.
비밀 내용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잠시 내용을 살펴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고전적이네, 암호라니.”
겉으로 봐도 비밀 장부였지만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었다.
대신 내용 중간중간에 이상한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이런 암호 체계는 예전에나 사용하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데 말이야.
“해독 맡겨 놔.”
남자가 다시 여자에게 장부를 내밀었다.
여자는 남자가 내민 장부를 받아 갈무리했다.
“그나저나 좀 고전했나 봐?”
남자가 살짝 그슬린 여자의 머리카락을 보며 말했다.
“별로.”
무감각하게 대답하는 여자.
“죽였어?”
“…….”
“흠…… 의외네?”
남자가 여자를 도발했다.
하지만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쳇, 재미없네. 알았어, 가 봐.”
남자가 손짓했다.
여자가 잠시 남자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앞으로 10번…….”
“알아.”
여자의 말에 남자가 대답했다.
그제야 방을 나서는 여자.
남자는 여자가 나간 방문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거참, 이용하기 힘드네.”
빚을 지워 이용하고는 있지만 역시 A급 헌터라 콧대가 높은 건지 도저히 고개를 숙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편하게 생활하면 될 텐데 굳이 저럴 필요가 있나?
“쯧, 계속해서 안 되면 치워야지.”
A급이라는 게 아깝지만, 마지막까지 숙이고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냥 치워 버리는 게 나았다.
목줄이 풀린 개만큼 위험한 것도 없으니까.
툭, 툭.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이용한다.”
남자가 책상을 두들기며 고민했다.
그냥 감시를 붙여 놨더니 대물이 걸렸다.
설마 협회의 장부를 찾을 줄이야.
“흐음…… 목줄 정도는 풀 수 있으려나?”
이번 기회에 잘하면 협회에게 걸린 목줄을 풀지도 몰랐다.
서로에게 잡힌 약점을 없애고 제대로 활동한다면 그것만큼 좋은 게 어딨겠는가.
물론 협회가 쉽게 놔줄 것 같진 않지만 상관없었다.
“정 안 되면 터뜨리고.”
어차피 협회에 묶여 지내는 것도 질렸다.
풀어 주지 않는다면 공멸하면 될 뿐.
“자, 이 건은 그렇게 하고, 그나저나 김진하라…….”
남자가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를 바라봤다.
김진하에 대한 신상정보가 쓰여 있는 서류들.
“자, 넌 또 나에게 뭘 가져다줄 거니?”
앞으로 있을 일들이 즐거워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