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재정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잠들어있거나 혹은 기절한 모습과도 같았지만 그는 두가지중 무엇도 아니었다.
인간들이 조심스럽게 점점 멀어지려 할 때 느닷 없이 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리고는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자 쉼없이 움직여 이동하고 있던 식귀들이 일순간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물러가고 있는 그들을 발견한 듯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흐음...'
그리고 루프스는 천장에 매달려서는 그 일련의 과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식귀들이 달려든다는 사실을 눈치챈 인간들은 더 이상 조심스럽게 움직이지 못했다. 노인은 빠르게 다가오는 식귀들의 모습을 보면서 빠르게 달리라고 지시했고, 다른 인간들은 그에 호응하듯이 빠르게 달려서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달리는 그들의 모습은 언뜻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그들로서는 빠르게 달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식귀들의 수는 그들의 갑절은 가뿐히 넘어서고 있었으며, 그들 하나하나가 왕국의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그들과 비등하거나 약간 떨어지는 정도일 뿐이다.
실력이 비슷하다면 결국 승패를 가르는 것은 당연히 숫자와 전략의 차이가 된다. 다만 이 좁은 지역에서 전술을 써먹으려 한다고 해도 홈그라운드인 식귀들이 더 잘 써먹으면 잘 써먹지 그들이 더 잘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결국 실력은 비등하고 지형에서는 불리함을 지고 있으며, 거기에 숫적으로는 비교도 하기 어려울정도로 큰 차이가 나고 있으니 패배는 결정사항이라 말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양측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들은 사력을 다해서 도주를 시도하고 드란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기만 할 뿐 그대로 자신의 옥좌에 몸을 파묻을 뿐이다.
마치 왕과도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는 드란이었다. 그런 드란을 보면서 도주하는 인간들에게서 관심을 끈 루프스는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쳇, 그래도 끝끝내 호위병력은 남겨두는 건가'
이 자리에 있던 대다수의 식귀들이 인간들을 쫒으러 가면서 자연스레 생기는 공백으로 드란을 찔러보기라도 하려던 루프스는 그 계획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녀석을 발견한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하겠군. 그리고 어쩌면 쿠알론 그 녀석도...'
드란의 소재지에 대한 정보 뿐이었지만 루프스는 이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게다가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는 드란의 태도를 보자니 아무래도 그가 이곳에 다는 사실을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니 루프스는 무리하지 않고 이대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결국 루프스는 코 앞에서 그들 최대의 적을 놔두고 그대로 요새를 향해 돌아섰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네놈의 목을 따러 돌아올테니까'
드란을 향해 그가 듣지도 못하게 속으로 중얼거린 루프스는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고 왔던길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런 루프스의 모습을 보기라도 하는 듯 가장 높은 단상의 옥좌에 앉아있는 드란이 슬쩍 눈길을 보내고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제라임 성까지 온 만큼의 시간의 절반만에 루프스는 요새에 도착했다. 주변을 확인하면서 이동하던 이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단숨에 최단거리로 요새를 향했기에 가능했다.
루프스는 다급했다. 드란을 본 직후에는 어떻게든 침착함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일차적으로 상당수의 식귀들이 모인 곳에서 날뛰어봐야 좋을 것 없다는 점 때문이었고, 이차적으로는 드란에게서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상당한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루프스가 느끼기에 그가 지니고 있는 힘은 최소한 쿠알론과 비등해보였다. 게다가 그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도 식귀보다는 고블린의 모습에 가까웠다. 본래라면 식귀만큼이나 지성이 없는거나 마찬가지인 놈들이겠지만, 한 때 루프스의 밑에 있었기 때문인지 잠들어 있는 모습에서도 이성적인 혹은 지성적이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를 루프스는 감지했다.
그리고 그만큼 루프스는 그에게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짐작이긴 하지만 이전에 보았던 모습에서도 그리고 종전에 보았던 모습에서도 그는 일말의 지성이 그에게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비슷한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되는, 루프스가 파인피와의 협공으로 간신히 균형을 유지했던 쿠알론에게는 드란에게 있었던 것이 없었다.
이성, 혹은 지성의 존재는 충분히 루프스에게 강한 경각심을 가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제대로된 이성도 지니지 못한 쿠알론은 그나마 단순하게 움직이기에 상대하는게 가능했다. 그렇지만 드란이 그와 같은 힘을 지닌데다가 어느정도의 지성을 지니고 있다면 쿠알론과 비교해서도 수배는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혹은 그가 질 확률이 더더욱 높다고 할수도 있다.
다만 그것도 온전한 몸뚱어리를 지니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다행히 드란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상당한 부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한눈에 보았을 때 거동도 힘들어 보일정도의 중상이었다.
그렇기에 루프스는 다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드란이 중상으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드란을 이길 수 있는 가장 확률이 높은 시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황급히 요새로 돌아온 루프스는 가장 먼저 프리트를 찾아갔다. 출정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은 그였으며, 프리트라면 자신이 돌아오기만하면 곧바로 출정해도 무리가 없도록 정비를 해놓았을 것이라 루프스는 믿고 있었다.
프리트에게 찾아가던 루프스는 그의 기대가 그리 허황되지 않았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를 향하는 길에 볼 때마다 보이는 광경과, 그의 근처를 지나가는 다른 고블린들에게 물으면서 루프스는 조금씩 프리트가 어떻게 대처를 해놓았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출정을 위한 준비를 갖추어 놓은 상태이며, 거기서 끝나지 않고 루프스가 없는 동안 부족 내부에서 각 마을들을 지킬 전력을 제외한 전력의 집중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상황아임을 알아차렸다.
벌써부터 앞서 요새로 도착한 이들 중에는 이미 그에 의해서 부대를 배정받은 이들이 있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루프스의 부족 대부분의 인원들, 특히나 어느정도 전력이 된다 싶은 놈들 대부분이 같은 자리에 모여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으로 루프스의 기대 이상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프리트를 만나기 전부터 부족의 상황을 확인 할 수 있었던 루프스는 잠시 얼이 빠졌던 정신줄을 붙잡고는 일단 황급히 프리트를 찾아나섰다.
프리트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한참 바쁜 와중이었기 때문에 많은 고블린들에게 둘러쌓여있는 상황이었다. 프리트는 각자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있는 듯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면서 그들에게 설명하고 있었고, 그의 설명을 듣는 이들도 경청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딱 보아도 바빠보이는 상황이었지만, 루프스는 그런건 전혀 신경쓰지 않고 일단 다급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어느정도 가까이 다가가자 프리트도 그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이해왔다.
그렇게 프리트에게 다가간 루프스는 그에게 다급히 출정하도록 지시했다. 루프스의 태도에 그는 의아해했지만, 루프스의 지시를 들은 그에게 그 의아함을 푸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루프스는 그에게 자신이 할말만 끝마치고 다시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루프스의 지시를 들은 프리트는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고블린들에게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빠르게 지시하고는 또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다음날. 고블린들은 요새를 떠나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