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재정비
숲에 도착한 루프스는 가장 먼저 숲에서 가장 크게 자라난 나무를 찾는 일이었다. 이 숲은 엘프들에 의해서 가꿔졌다. 그리고 그 중에는 개개인이 특히나 애착이가는 식물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었다.
엘라에게는 그것이 나무였고, 그녀가 공들여 키우는 나무는 이 숲에서 가장 거대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거대하다고해도 주변의 나무를 향한 햇빛을 가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눈에 띄기 때문에 찾기 쉬웠다.
저벅저벅
나무를 향해 다가간 루프스는 뿌리 부근에 다리를 모아 앉아있는 엘라를 발견 할 수 있었다. 프리트의 반응에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괜한 우려였는지 상태가 그리 나빠보이지는 않았다.
"엘라"
나무에 기대고 앉아있던 엘라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가오는 루프스를 바라보면서 음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를 보면서도 엘라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간 루프스도 그녀의 태도에도 아무렇지 않게 그저 그녀의 옆에 앉았다.
멀쩡해 보여도 사실 그리 멀쩡하지 않으리라는 것 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예상 이상으로 피폐한 모습은 아니기에 한시름 덜었을 뿐, 그녀가 힘들어하고 있을 것은 분명했다.
엘라도 그런 루프스의 생각을 알았는지, 그가 옆에 앉는 모습을 묵묵히 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한뼘정도 떨어지는 거리에 앉아있던 둘 중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엘라였다.
"이야기는 들었죠?"
그녀가 하는 말이 필시 이미 죽은 트레이에 대한 이야기일거라 짐작했지만 루프스는 입을 열지 않았다.
"적이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부터 불안하고,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건가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루프스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내심 어느정도 공감했다. 당시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와서 보면 자신의 속내에는 그런게 은연히 깔려있던 듯 최초 드란을 보았을 때 움찔하던것도 그렇거니와 쿠알론에게 결국 마무리를 지어주지 못했던 것도 그 일환으로서 떠올랐다. 게다가 지금도 가슴속이 답답하다고 느끼고 있으니 그 감정을 부정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묵묵부답인 루프스의 모습에 어느정도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는지 그녀는 그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그 우울함을 온전히 떨쳐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녀와 공감해주고 있다 느꼈기 때문인지 약간의 안도감이 느껴졌다.
"당신이 그 아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이야기했을 때는 미쳐버린건 아닌가 싶었죠. 그렇지만 지금 모습을 보니 그런건 또 아닌 모양이네요"
"크흠"
루프스는 자신의 속내가 드러난것이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하면서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루프스의 모습을 보면서 엘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때 회의가 끝나갈 무렵에는 억지로라도 감내해야하는가 하는 생각으로 동조했지만... 사실 여전히 내키지도 않고, 절대 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당시의 그녀를 떠올려본다면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무슨 취지로 이야기하는지도 이해 못했고, 나중에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리고 나서는 다시 그와 부하들을 설득하려던 모습의 그녀를 떠올리니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러던 중에 당신은 발견된 트레이를 죽이러 간다는 이야기를 하더니, 나중에 적의 침공에 피난을 가고 나서는 여기에 트레이가 먼저 처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제가 미친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당시를 떠올리고 있는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트레이가 죽고, 그를 죽인게 스콘드라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그 모든 원망을 그에게 쏟았었죠"
여전히 트레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그녀에게 큰 상처인지 그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표정을 본 루프스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어느정도 괜찮은 듯 싶던 그녀의 표정이 지금까지는 가면이었다는 듯 극심한 우울함에 찡그려지고 그 속에는 은은한 분노마저 담겨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게 그의 잘못은 아니었죠. 오히려 그가 한 행동은 그 아이가 원하는대로 해준것에 불과했어요. 이성은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고 이해도 했지만..."
그렇지만 이해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기실 실질로 이해한 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속으로 꽁꽁 감추고 있던게 표출되듯이 점점 더 분노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도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든지 지치고 울고싶어하는 면모가 엿보였다.
루프스는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그녀의 고통과 자신의 고통은 다르다는걸 자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에 비한다면 무덤덤하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이 정상이 아닐거라는 자각이 문득 떠올랐다.
어쩌면 그건 그저 그의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혹은 그가 고블린이기에 생기는 문제일수도 있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양쪽 모두 그리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사실 루프스로서도 어느정도 자각이 있는 일이었다. 처음 생명을 죽였을 때, 그리고 지금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머리 한구석에는 자신의 과거라고 믿던 기억과는 괴리가 느껴지는 행동들이 그에게 미세하나마 자각을 주었었다.
그렇지만 루프스는 그 이상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아직 엘라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끝난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 감성은 이성을 전혀 쫓아가지 못했어요. 그에게 몇번인지 세기 어려울정도로 화풀이를 했었지만, 그 분기는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어요"
엘라의 입은 담담히 이야기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그 감정과 생각마저 담담한 것은 아니라 호소하고 있었다. 그녀의 호소는 루프스로 하여금 더더욱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거기에 결국 트레이를 그렇게 만든 것이 드란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었을 때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고 호통을 치고 싶다 못해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꺼내버리기까지 했어요"
말을 마친 직후 엘라는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려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당신이 쿠알론도 거의 죽일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로 미치는줄 알았어요. 아니, 그 순간 이야기를 듣던 그 잠깐은 정말 미쳐서 날뛰었었죠"
그녀의 말에 루프스는 스콘드가 그에게 이야기하기 곤란한 태도를 취했던 이유가 이것임을 알아차렸다.
"..."
그렇지만 그는 그녀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해줘야 할지도 알 수 없었으며 그 무엇도 그녀의 감정을 해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 때문이다.
루프스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는것 밖에 없었다.
엘라도 그의 생각을 마음을 알았는지 그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속내와 자식들의 죽음으로 쌓이는 울분을 루프스를 통해서 해소하고자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루프스는 그녀의 이야기를 그저 묵묵히 들었다. 최초 트레이의 죽음으로 인한 울분으로 시작해서 종래에는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주느냐며 그를 원망하기도 했더.
듣기 힘들정도의 비난이 섞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루프스는 그저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더. 그리고 그 덕분인지 아니면 또다른 이유때문인지 그녀가 조금씩 진정되어갔다.
결국 쏟아내는 이야기에 지친 그녀는 나무에 기대서 잠에 들었다. 그런 그녀의 감긴 눈에서는 조금이라도 울분이 지나가라는듯이 방울진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루프스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마찬가지로 나무에 기대어 잠에 들었다. 조금이라도 더 그녀의 마음이 풀리기를 기원하듯이 손을 꼭 맞잡은 상태로 본 한밤중에 떠있는 달이 그가 본 그날의 마지막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