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공세
끔찍한 현장이라는 것은 바뀌지 않으나, 그 끔찍함 만큼 그들에게 여러가지 정보를 건네주고 있었다.
"시체들이 모두... 인간이 아닌데? 게다가 하나같이 여자들이군"
널브러져 있는 시체를 살피던 이들 중 하나가 굳은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대로 대부분의 시체가 인간들이었지만, 그들 중 일부는 식귀들이 취하고 있는 모습인 고블린들의 시체가 섞여있었다.
게다가 이 자리에 있는 시체들 모두 실 한오라기 걸치고 있지 않으니 시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도는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고블린들도 신체적으로 남녀의 차이는 인간들과 별 차이가 없기에 그들도 포함해서 이 자리에 있는 시체 모두가 여자들의 시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던 것이다.
"게다가 바닥에 흐른 피를 보나, 시체의 상태를 보나 죽은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듯 하군요"
"모두 여자라고? 그렇다는건..."
그리고 여자들의 시체가 이렇게 모여있다는 것은 한가지를 의미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노인은 이 시체가 널브러지고, 그 시체들을 잡아먹고 있는 식귀들 뿐인 이 넓은 공간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긴가?"
그리고 한 장소. 유난히 수상한 장소를 발견 할 수 있었다.
노인의 주변에 있던 이들은 그가 무엇을 발견한 것인지는 몰랐지만, 곧 전투가 벌어지리라는 것 쯤은 짐작이 가능했다.
적의 어디를 처야 하는지를 알아낸 그들은 더 이상 이 역겨운 장소에서 숨어있지 않았다. 가장 선두에는 그들을 이끄는 노인이 섰으며,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의 뒤를 따랐다.
푸욱-
끼에에에엑-!
가장 선두에 선 노인이 빠르게 달려 가장 가까이 있는 식귀의 뒤를 잡고는 단검을 찔러넣었다. 단검에 찔린 식귀는 비명을 지르면서 고통을 호소했고, 그의 비명소리는 주변에 퍼져있던 동료라고도 할 수 있는 다른 식귀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시선이 모이는 그 때, 인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푸욱- 콰직-
카가각- 치잉-
전투가 벌어진 초반에는 갑작스러운 기습에 식귀들이 피해를 입었지만, 식귀들 각 개체들마다의 방법으로 피해를 점점 줄여나갔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덤벼든 인간들도 이 자리에 있는 식귀들에 비해서 뒤쳐지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반격하는 식귀들의 기세는 거셌지만, 그들을 맞이하는 인간들의 기세는 더욱 거셌다. 결국에 몸을 바닥에 뉘이는 자는 오로지 식귀들 뿐이었다.
본능으로만 점철되어 아무런 생각도 작전도 기술도 없이 덤벼드는 식귀들이, 국경에서 지내면서 특히나 국지전투를 통해 경험을 쌓아온 인간들을 이기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 식귀들을 파죽지세로 밀어버리고 있었지만, 노인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더더욱 날뛰고, 식귀들은 그에 반항도 제대로 못하는 모양새가 만들어져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정말로 놈들의 번식지라면... 이 정도로 끝날리가 없다'
인간 여자들의 시체와 고블린 암컷들의 시체가 줄줄이 엎어져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부터 그는 이곳이 놈들의 번식지라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로 중요한 장소라면 저런 잔챙이들만 있을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식귀들의 움직임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딴판으로 바뀌었으며, 벽면이 뚫리면서 지금까지 그들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녀석들, 갑자기 움직임이?!"
식귀들의 틈바구니로 들어가서 이리저리 치고 빠지면서 공격하던 한 여성은 식귀들의 움직임이 뒤바뀌면서 은근슬쩍 고립되었다. 고립된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빠져나가려 했지만, 식귀들은 다수라는 이점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틈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설마 저 놈들까지 나타났었단 말인가!"
이미 앞서서 전달받은 정보들 중에는 예전 식귀들이 나타났을 때 어떠했는지에 관한 정보가 있었고, 노인은 갑작스레 등장한 새로운 적의 모습이 그 정보 속의 묘사와 동일해 화들짝 놀랐다. 고블린들의 모습만 가진 놈들이 주구장창 나타나다보니 동물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식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이 좋아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다수라는 이점을 이용하기 시작한 고블린들. 그리고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적들의 등장은 식귀들의 틈에서 날뛰던 이들도, 정면으로 맞부딪치고 있던 이들도 모두 당황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식귀들의 격렬한 반응은 노인에게 짐작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역시 여기가...!"
이곳이 번식지가 아니라면 이토록 강한 지원을 보내줄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앞선 탐색에서 식귀들이 모여있던 공터를 몇 발견했었고, 그들을 물리치기도 했었지만 식귀들은 지금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제자리에 있던 이들이 덤벼들고, 경로가 겹치는 이들이 덮치고는 했었지, 지금처럼 지원이 오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달라진 대응은 번식지가 확실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이곳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노인에게 오히려 힘을 더욱 북돋아주고 있었다.
"흐아아아압!"
나이에 걸맞지 않은 우렁찬 포효를 내지르면서 노인은 강하게 손에 쥐고 있는 둔기를 휘둘렀다.
전형적인 메이스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그의 무기가 휘둘러지자, 그의 주변을 메우고 있던 식귀들이 단번에 튕겨나갔다. 시동을 걸듯이 날뛰기 시작하는 노인을 보면서 한 청년이 그를 향해 말했다.
"어르신, 너무 무리하시는것 아닙니까?"
무수히 연달아 팝콘튀기듯 튕겨나가는 식귀들을 보면서 노인에게 혀를 내둘렀다.
"흥! 이정도가지고 무리라고 하면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돼지! 흐읍!"
코웃음친 노인은 다시 한번 손아귀에 힘을주고 대차게 메이스를 휘둘렀다. 상당한 거력이 실려있는 그의 메이스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두더지형 식귀의 옆구리를 후려쳤고, 크기에 비해 왜소하다지만 충분히 큰 두더쥐 식귀가 힘에 밀려 튕겨나갔다.
쿵-
"후우, 그리고 네놈도 짐작하고 있는거 아니냐? 놈들이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노인은 입술을 짓씹으면서 청년에게 말했고, 그의 이야기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곳에 있는 이들 중 어지간히 싸움만 생각하는 근육뇌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하하하! 확실히 그건 어르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시면...!"
쉬익-! 서걱-
"안됩니다"
청년은 어느새 측면으로 다가온 식귀를 베어내면서 노인에게 대꾸했다.
"하! 걱정은 필요 없다!"
청년의 대꾸에 노인은 코웃음으로 대꾸해주고는 다시 식귀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고립된 동료를 향해 전면에 위치한 식귀들을 빗자루로 쓸듯이 튕겨내면서 달려가는 그를 본 청년은, 살짝 웃고는 그 자신 또한 고립된 다른 동료를 향해 달려갔다.
고블린들의 움직임이 예상과 달리 변하고 새로운 지원군이 등장하면서 몇몇의 희생이 생겼지만, 그래도 결국 다시 합류에 성공하면서 식귀들을 하나씩 물리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식귀들도 그 이상 전력을 투입하기에는 손해가 더 크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건지 더 이상 전력이 지원되는 일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곳에 있던 식귀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고, 공격대는 그 곳에 있던 시체들을 모두 불태워서 더 이상 식귀들의 먹이가 되지 못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어느정도 일단락 되자 노인을 선두로, 가장 수상하다고 생각되는 공혈을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