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공세
스콘드는 눈 앞에 흐트러져 있는 육편 그리고 골편들을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한 때 생명이었던, 그리고 끝내는 스콘드에 의해서 죽어서까지 움직이던 시체들이 그 본래의 형상이 생각이 나지 않을정도로 부스러진 그 중심에는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트레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트레이가 손에 쥐고 있는 검에는 방금전까지의 난투를 보여주듯이 독으로 물들어 검붉거나 보랏빛으로 물든 체액과 하얀 뼛가루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특히나 스콘드가 기억하던 트레이라고는 생각되지도 않을 정도로 거친 방식으로 검을 써서 검은 이가 빠져있기도 했다.
다만 육중한 형태의 검은 그마저도 위압감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이것참..."
트레이에게서 느껴지는 언뜻 루프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기세가 느껴지니 스콘드는 조금도 방심은 커녕, 이길 수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과거 한없이 나약하게만 보았던 트레이를 전혀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게 달라보였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듯 보였지만 스콘드는 서두르지 않았다. 딱 보아도 트레이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며, 지금도 몸을 움찔 떨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움직이지는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시간을 끌어주면 끌어줄수록 스콘드에게는 더 좋은 일이었다. 당장 지하에서 올라오던 식귀들의 기세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멀쩡하고 강한 놈들이 튀어나오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 수가 좀전에 비한다면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끈다면 더 이상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놈들은 없을 듯 싶었다.
'아마 이제 그동안 쌓여있던 놈들의 숫자가 슬슬 떨어지고 있겠고, 그나마도 들어온지 얼마 안돼서 여전히 독에 중독되있던 놈들을 먼저 끌어올려서 여기까지 버텼을 터'
그런 그의 생각을 증명하는건 시간이 갈수록 비교적 멀쩡했던 놈들로 바뀌어갔고, 나중에는 오히려 독을 뿜어내는 놈들까지 튀어나왔다는 점이다.
'흐... 딱히 좋은 상황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만, 최악은 아닌것 같군'
스콘드는 트레이와 대치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생각을 하긴 하는지 의심이가는 멍한 표정의 트레이는 그저 묵묵히 서있을 뿐이었다. 앞서 덤벼들었던 스콘드의 시체들은 그저 덤볐기에 제거했다는 듯 여전히 움직임이 조금도 없었다.
더 이상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식귀들이 없는, 모조리 이 자리에 있는 고블린들의 손에 명을 달리하고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더 이상 구덩이에서 식귀들이 올라오지 않자, 고블린들은 알게모르게 가만히 서있는 트레이를 경계하면서 뚫려있는 각각의 구덩이를 매웠다. 각자가 능력을 이용하며 매우니 제법 빠르게 구덩이를 매울 수 있었다.
구덩이를 매우는데도 트레이가 가만히 있자 고블린들은 스콘드와 함께 그를 포위하려 했지만 스콘드의 만류에 그러지 못했다.
"일단 피난소로 물러가 있어라. 너희들로는 그를 상대하지 못한다"
그 말에 멈칫하고 우물쭈물하던 고블린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한 장소에 트레이와 스콘드 둘 뿐이 남지 않자, 그제서야 트레이에게서 변화가 생겼다.
"스...콘..드"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분명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트레이가 그저 묵묵히 서서 움찔움찔 떨기만 할 때 부터 어쩌면 다른 식귀들과는 무언가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를 직접 부르기까지 하자 스콘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날 기억하고 있는건가?"
그는 놀라면서 그에게 물었다. 여전히 정상적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일말의 이성이 남아있는듯 부들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신...뢰하는 부...하"
트레이는 더듬거리는 말투로 그가 기억하는 스콘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스콘드는 덤벼들지 않고 순순히 대답해주는 트레이의 반응에 이건 기회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너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면서 물었다. 이성이 남아있다면,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일부러 다른 고블린들을 놓아준 것이라면 그가 있던 쿠알론의 부족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려주리라는 생각이다.
"그...건"
무언가에 저항하고 있는 듯 점점 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트레이는 말을 하려했다. 다만 점점 저항하기 힘들어지는지 트레이의 말은 점점 짧아지기만 했다.
"드...란... 놈... 때문...에"
"드란?"
한글자 한글자 말을 내뱉는게 힘겨워 보였지만, 스콘드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아들었다.
앞서 루프스가 식귀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드란을 목격한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부터 어쩌면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직접 그를 겪어왔던 트레이의 입에서 그들의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어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가 배신한 건가!"
스콘드는 트레이의 말에 놀라면서 대답했다.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었다는게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소식이 그에게 충격적이지 못한 소식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니... 배신...이 아...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트레이의 말은 그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의 태도를 보나 무엇을 보나 그에 대한 원한을 지니고 있음은 분명한데 그가 배신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문은 이어지는 트레이의 말에 금세 풀려버렸다.
"놈은,,, 처...음 부...터 적이었...다"
"적? 적이었다고? 그게 무슨?"
스콘드는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형제로서 자라났고, 부족을 떠나 따로 새로운 부족을 차리면서 오랜시간 함께 해왔을 형제에게 적이라고 외치니 그가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아...아아...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나...를... 죽여...줘"
"으음..."
어느새 부들거리는 그의 몸이 점점 들썩거리면서 움직이려하기 시작했다. 반면 조금씩 움직이는 자신의 몸을 보는 그의 표정은 더 더욱 어둡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이유가 슬슬 한계에 도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직접 맞붙었다가는 패배는 확실했기에 스콘드는 굳이 그가 스스로 죽여달라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회생 방법은 없는건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잠깐 그를 죽인다는 결정에 제동을 걸었지만, 그의 모습을 보면 그게 불가능하리라는것쯤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고통에 빠진 와중에도 대답했다.
"불...불가...능 방...법이 없...어. 그...러니 의...식을 잃기 ...전...에 죽...여. 커...컥"
꺽꺽 거리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그의 모습에 스콘드는 더 지체하지 않았다.
푸욱-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는 검으로 스콘드가 트레이의 심장을 꿰뚫었다.
"케흑... 고...고맙..."
트레이는 심장이 꿰뚫려 쓰러지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마치 무언가로부터 해방된듯 홀가분한 미소였다.
쓰러진 트레이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마지막 부탁을 그에게 전달했다.
"혀...형님...에게도 안...식...을..."
그 말을 마지막으로 트레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죽은 트레이의 시체를 보면서 스콘드는 어쩐지 착잡해졌다.
적을 죽인적은 여러번이었고, 따지고보면 현재 나타나는 식귀들도 본래라면 그거 소중히 여겨야하는 부족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다만 적들도 현재 나타나는 식귀들도 확실한 그의 적이었다.그리고 적이라면 그는 백이 죽던지 천이 죽던지 전혀 상관 없었다.
실제로 그렇기에 지금까지 죽인 적들을 시체인체로 일으켜서 이용하기도 했던 그였다.
그러나 이번에 트레이는 완연한 적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적합했다. 그런 그의 목숨을 앗아야하니 어딘가 착잡한 기분을 느낀 것이다.
그렇게 오로지 그와 시체만 남은 요새에서 스콘드는 트레이의 시체만을 안고 요새에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