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전장의 축복 (6)
식귀들이 처들어올 때를 위한 대비는 상당히 빠르게 끝을 맺었다. 대비라고는 해도 요새에서만 진행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작업을 끝내고, 한가해진 루프스는 며칠전 떠올랐던 정보창을 자신의 눈 앞에 띄웠다.
[전장의 축복까지: 100%
전장의 축복을 받으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정말 간만에 나타난 정보창이었다. 일전 지하통로에서 있었던 식귀들의 습격 이후로 퍼센티지가 상당히 차 있었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다만 항상 그렇듯이 생각은 하더라도 그게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유일등급에 올라서고난 이후부터는 죽어라고 오르지 않던 퍼센티지였기에, 1%라도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지는 확신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이번에 인간들과의 전투로 채워졌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호재였다. 무엇보다도 고블린으로서의 힘이 그의 바로 밑단계일 드란이 식귀와 결합했다면 얼마나 강할지 장담 할 수 없었던 만큼 그가 강해지는 일은 더더욱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다만 축복을 받는 일은 적어도 요새에서 안전하게 받고 싶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루고 있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과거 축복을 받는 과정에서 수일에 걸쳐서 변화를 겪은 일도 있었던 만큼 더 조심스럽기도 했다.
이제 식귀들에 대한 대비도 되었으며, 그가 있는 장소는 그의 거점 중 한곳인 요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있는 족장을 위한 천막의 안이었다. 더 이상 안전을 고려하면서 축복을 미뤄둘 이유가 없어졌다.
몇몇 간부들에게만 미리 이야기를 꺼내둔 루프스는 조심스럽게 천막의 안에 자리를 잡았다. 간만에 축복을 받으려니 괜스레 긴장되는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정보창에 쓰여있는 '예'를 꾹 눌렀다.
그리고 그의 온 몸으로 통증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
선명하고 때 한점 묻지 않은 듯 시커멓던 루프스의 육신이 단번에 투명해졌다. 과거 유일급으로 올라서면서 바뀐 신체가 다시 그 모습을 내보인 것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항상 시커멓던 그의 몸이 투명하게 변하는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그의 몸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심한 왜곡덕분에 그 형체를 알아보는게 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지날수록 그의 몸은 점점 더 투명하게 변해만갔다. 변하는 그의 신체는 종래에는 가만히 있으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왜곡이 안정되었다.
그리고 진짜 변화의 시작은 그 때 부터였다.
우드득- 빠드득-
온몸이 쥐어짜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가 있던 자리가 계속해서 일렁거리는 것이 그의 몸이 변화를 맞이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제법 긴 시간동안 뼈가 뒤틀리고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지고 나서야 모든 변화가 끝난 것인지 루프스가 있던 자리에서 일렁거림이 사라졌다.
///
루프스는 문득 눈을 떴다. 평소처럼 '예'를 누르는 순간 의식을 잃었던 그는 의식을 차리자마자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가 어떤지를 살펴보았다.
"흐음..."
이전보다 더욱 투명해진 몸은 따로 그가 능력을 이용하지 않아도 어지간해서는 육안으로 알아차리기 어려워 보였다. 다만 그도 불편하기 때문에 몸의 색을 이전처럼 검은색으로 되돌렸다. 숨쉬듯 자연스럽게 색이 뒤바뀌었고, 그의 바뀐 모습을 선명하게 확인 할 수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머리를 감싸고 돌면서 나있던 거치적거리던 뿔이 사라져 있었다. 게다가 당연히 덩치는 한층 커졌으며, 신체의 선이 전체적으로 굵어졌다.
그 밖에도 이런저런 자잘한 것들이 바뀌기는 했으나, 그 두가지를 제외하고는 그리 눈에띄는 변화는 아니었다.
그렇게 바뀐 몸에 적응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주먹을 휘두르고 발을 차면서 감각을 다스린 그는 이내 잠시 미뤄두었던 정보들을 확인했다.
[전장의 축복이 내려졌습니다.]
[등급이 '재앙'이 되었습니다.]
['권역'이 개방되었습니다.]
['권역'에 특화능력이 적용됩니다.]
바로 이전에 떠올랐던 것들에 비해서는 단출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그 중에 그의 호기심을 이끄는 것이 있었다.
'권역?'
처음보는 단어에 호기심이 생기자, 곧바로 그에 대한 정보가 그의 머릿속으로 쏟아지듯이 들어왔다.
꾹- 꾹-
일시적으로 두통을 느낀 그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런저런 정보가 들어왔고, 그 정보로 루프스는 대략적으로 권역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좀비 드래곤이 펼치던 것과 비슷한 거로군"
생각지도 못한 정보의 홍수에 지끈거렸던 머리가 약간 가라앉고 나서야 루프스는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권역에 대해서 여러 설명이 있었지만,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은 본인의 특화능력이나, 또 다른 재주를 기반으로 개인의 영역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가 떠올린 좀비드래곤의 예시는, 놈이 지나간 자리가 시커멓게 사기에 물들었던 것과 그 주변에서 죽은 이들이 저절로 언데드로 일어났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그럼, 그 놈은 얼마나 강했던 거야?"
지금에 와서는 행방조차도 불투명해진 좀비 드래곤이었지만, 놈이 뿌려댔던 권역이 얼마나 강하고, 현재의 루프스로서는 얼마나 엄두가 안나는 일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만에 하나 놈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무릅쓰고 강변 마을 쪽으로 옮겨갔던 것이 자칫했다가는 그의 부족에 대참사를 일으켰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루프스는 그제서야 자각했다.
"그럼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는..."
그렇게 중얼거린 루프스는 잠시 정신을 집중했다. 갓 얻은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집중해서 능력을 이용 할 필요가 있었다.
권역은 빠르게 펼쳐졌고, 루프스는 금세 다시 깨어났다. 깨어난 그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허허..."
주변을 둘러본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권역은 그가 아는 유일했던 좀비 드래곤의 것과는 달랐다. 놈의 권역처럼 기운 자체가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다만 루프스의 권역은 상대방에게 환각을 심어줘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좀비 드래곤처럼 권역에서 언데드가 일어나지는 않지만 그가 임의로 환각이 심어지는 대상, 심어지지 않는 대상을 선별 할 수 있었다.
"이건 쓸만하겠군"
한번의 시전으로는 대략적으로만 알아낼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유용했다.
무엇보다도 적들을 혼자 사용할때도 좋겠지만, 그의 부하들인 고블린들을 이끌고 있을때 더 유용할듯 싶었다.
루프스는 이번 축복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이번에도 전체적으로 신체능력이 강화된데다가 권역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능력을 얻었으니 더욱 흡족해했다.
게다가 권역이란것 자체가 상당히 까다로운 점이 한번 생성되면 지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나마 같은 권역끼리 충돌하는 경우에나 지워질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그렇다고 시전 전에 그걸 막을 수 있는것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처음 사용하다보니 잠시 시간이 걸렸었다. 그러나 한번 발동해본 그의 감각으로는 다음번에는 그런 절차없이 원하는 순간 풀어낼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이번 축복으로 얻은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마음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여기저기에 사용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루프스였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실험대상으로 쓸만한 적도 찾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군락지 안으로 들어가기에도 어쩐지 불안감이 들었다.
식귀들에 대한 대비는 해놓았지만, 그 대신 요새 주변에 있는 함정들 대부분을 철거해야만 했다.
즉 지금으로서는 그가 떠나기 곤란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다만 성도 버린 지금 그가 있늬 이곳까지 굳이 올 적이 얼마나 될지는 회의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