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괴변
거점으로 되돌아온 루프스는 몇일동안 머물면서 성주가 죽은 성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미 두차례나 숨어든 전적이 있기 때문인지 제법 긴 시간동안 성을 둘러보면서 살펴보아도 들키는 일은 전혀 없었다.
성주가 죽으면서 생기는 혼란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그들에게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루프스가 풀어놓은 독으로 인한 피해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비상상황이 연달아 일어나자, 일단 그들도 성주 대리라도 있어야 된다 생각했던지, 한명을 성주 대리로 내세웠다. 그렇게 내세워진 인물은 루프스의 기억에 있는 자였다. 다름아닌 그가 있던 제라임성을 공격해왔던 지휘관이었다.
그와 함께 이전 성주의 집사라는 이가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애초에 성의 주민들이 쓰러지고 있는 원인은 루프스와 고블린들이 풀어넣어 놓은 독이였다.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이상 그들이 아무리 증상이 먼저 나타난 이들을 격리시킨다고 해도 중독자는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실제로 중독자는 계속해서 나타났고, 사태를 해결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이들은 성에서부터 도주하기도 했었다.
외부에서 온 이들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는 재빠르게 성에서 빠져나가버렸다.
그나마 그들에 의해서 소문이 퍼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을 돕기 위한 인력이 파견되기도 했었지만, 그 땐 이미 확실하게 늦은 뒤였다.
그리고 그들이 오기 직전에 루프스도 본인의 볼일을 마치고 몸을 빼낸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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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서부터 떠나고 얼마 후. 해가 넘어가면서 루프스와 고블린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약간 너른해 보이는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한 곳에 자리잡은 고블린들은 제각각 움직였다. 어떤 고블린은 그대로 잠에 빠져드는가 하면, 어떤 고블린은 훈련하겠답시고 짧은 단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프리트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정보들을 빼먹고 있었다.
각자가 자기만의 일에 빠져든 모습을 보고는 루프스도 이번 작전으로 얻은것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눈 앞에 둥둥 떠있는 글씨였다.
[전장의 축복까지: 100%
전장의 축복을 받으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정말 간만에 나타난 창이었지만, 루프스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런 작업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의 본거지에서 하고 싶다는게 그의 속마음이었다. 다만 이번에야말로 수치가 100%에 도달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다음단계로 나아가는 것은 잠시 미뤄두고자 글을 치워낸 그는 프리트와 마찬가지로 손아귀의 종이를 들어올렸다.
반듯한 글씨로 써져 있는 종이는 다름 아닌 성주의 방에서 발견한 물건이었다. 각종 서류를 낑낑대면서 살펴보고 있는 프리트가 보고있는 것들에 비해서 그가 선택한 것은 얇디 얇은 책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물건 하나였다.
그는 딱히 정보를 뽑아내고 취합하는데 할 수 있는게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골라낸 것이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일종의 일기장이었다. 그것도 그를 향해서 온갖 욕설이며 분노를 폭발시키던 성주의 일기장이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루프스가 이 책을 들고 있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성주에게서 어느정도의 정보를 빼내려고 한 루프스였지만, 상대는 그의 말이 씨알도 안먹히고 끝끝내 입을 열지 않고 그 목숨을 잃어버렸다.
그러니 루프스가 다른 경로를 이용해서라도 뭔가 캐낼것을 찾았고, 그렇게 찾아낸 것이 지금 그가 손아귀에 쥐고 있는 한권의 일기장이었다. 아마 성주도 이것이 그의 손에 들어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끝끝내 마지막까지 입을 다물지도 않았을 거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상당히 어린시절부터 썼던 듯, 상당한 양이었다.
그렇지만 루프스는 이미 이동하면서 틈틈이 읽어두었고, 지금 그가 읽고 있는 부분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흥미를 이끌고 있는 부분이었다.
다름아닌 그들이 루프스가 있던 성을 공격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곳에 적혀 있었던 것이다.
루프스가 그것을 보고 가장 놀랐던 것은 이들이 바로 그 고블린들을 박해하기를 주도했던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그가 엘라에게 들어온 것에 비하면 허무한 끝이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닐 것이다. 이들이 고블린들을 마지막으로 발견했던 것은 이미 백여년은 지난 일이었고, 그 사이 고블린들을 전멸에 가깝게 만들었던 성주의 세력이 점점 약해졌다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고블린들을 상대하는 동안 깎아먹었을 전력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그리 허무한 끝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일기장에는 루프스의 부족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그에 대한 대처로 오크 용병들을 고용해서 처리하려 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이전에 그의 부족으로 처들어왔던 오크들이 그들의 수작이라는걸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는 전멸해서 사라진 성주와 그 가신들이었지만, 이런걸 보면 너무 쉽게 끝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루프스였다.
그 밖에도 성주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었지만 그런건 루프스의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그나마 그가 일기에서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이미 먼저 그와 그의 부족을 건드렸다는 사실과, 과거 그의 가문과 고블린들 사이에서 좋지 못한 일이 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성주가 고블린들을 향해서 그렇게 아우성을 친 것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들 가문 자체에 고블린을 멸족시키라는 저주에 가까운 맹세가 대대로 내려오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그런 맹세를 맺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나와있지 않았을 뿐이다.
일기장을 덮어둔 루프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와 동족들을 가장 강하게 적대하던 이들은 없어졌으나, 그렇다고 루프스들이 안전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들이 바깥으로 진출하면서 싸웠던 인간 병사들 중 바르무어 성의 영향하에 있는 건 단 한 무리 뿐이었다. 그가 몬스터인 고블린인 이상, 가까이 있는 인간들과의 전투는 불가피한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당면한 과제는 아직 한가지가 더 남아있었다.
바르무어 성에 있는 식귀들이 나타나던 구덩이는 완전히 메워버린 상태였다. 그런 구덩이를 뚫은걸 보면 얼마든지 다시 뚫을 수는 있겠으나, 이미 성의 주민들이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으니 굳이 그 곳 까지 새롭게 길을 뚫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주변으로 파놓은 길들이 있었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구덩이를 메우지 않더라도 상관은 없었겠지만, 루프스는 혹시나 바르무어 성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돕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없도록 하기 위한 방책의 일환이었다.
그가 구멍을 메워버림으로서 그곳으로 향해야 할 식귀가 주변으로 퍼져 나갈 것이고, 루프스는 그들을 향해 퍼져나간 식귀들에 의해서 다른 곳에 신경쓰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의도였다.
그렇지만 그 식귀들도 끝내는 그가 치워버려야 하는 적이었다.
지금 당장 놈들과 맞붙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을 이끌고있는 드란은 어쩐지 그의 부족을 노리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사실 뛰쳐나간 것은 그들이었으니 굳이 그럴 이유는 없겠지만, 루프스는 만일에 대비하자는 생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프스는 식귀들 사이에서 쿠알론이나 트레이의 모스이 전혀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 신경이 쓰였다. 그 둘이라면 분명히 루프스의 바로 아래에까지 성장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둘이 식귀화가 된다면 드란 만으로도 버겁고 이길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태에서 그의 패배가 확실하게 바뀌어 버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 루프스는 저 멀리 성벽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요새의 가까이까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