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괴변
루프스는 자신의 분신이 시선을 끌어주는 사이 은밀하게 몸을 움직였다. 슬금슬금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몸도 주변과 동화시켜 가려두었다. 하지만 그를 주시하는 이들이 아직 있었기에 완전히 몸을 숨겼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루프스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후웅 후웅 후웅
콰직- 콰드득 퍼석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의 귓가로 날뛰는 분신체에 의한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분신체는 그야말로 화려함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부러 과장되게 움직이면서 도끼를 집어던지고 휘둘러 식귀들을 향해 찍어내는가 하면, 그 살갗을 찢어가르듯 긁어내기도 했다.
그 화려하다 못해 과하기까지 하는 눈에 띄는 움직임 때문일까. 본체인 그를 향해서 움직이는 식귀의 모습은 드물었다. 오히려 접근하다가도 한순간 분신에 정신이 팔려버린 식귀는 다시는 그의 모습을 눈으로 붙잡을 수 없었다. 다만 순간 순간 본능적인 감인지 그가 있는 곳을 주시한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통제를 받고 있는 그들이 감에 따라서 움직일리가 없으니 루프스로서는 그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의 예상대로 식귀들은 일순간이나마 그를 포착하더라도 착각이라 치부했는지 다시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그렇게 식귀들이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 그는 어느새 한곳에 주저앉아 주변의 식귀들을 통제하고 있는 식귀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지휘개체는 지금까지 그가 마주쳤던 다른 식귀들과 그리 다를 것 없는 외향을 하고 있었다. 루프스의 동족인 고블린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이곳에 흔하게 퍼져있는 잡병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고블린보다 약간 더 클 뿐이니 언뜻 보아서는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발견하기 어렵게 수하로 부리고 있는 식귀들의 사이에 숨어있었지만 결국 식귀는 루프스에게 발각되었다. 그리고 지금 루프스는 기회가 생긴 이 순간 눈 앞의 적을 절명시키려한다.
스응- 서걱
루프스는 정지된 자세로 침착하고 빠르게 도끼를 휘둘렀다. 휘둘러진 도끼는 바람을 날카롭고 조용히 갈랐다. 그리고 종래에는 식귀들을 지휘하고 있던 지휘개체의 목도 조용히 단번에 갈라버렸다. 지금까지 휘두를때마다 둔탁한 소리를 내던 그의 도끼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용한 암살자의 검과도 같았다.
목을 완전히 갈라버림으로서 전황을 살피며 지휘에 집중하고 있던 식귀는 온전히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이루어진 허무한 최후였다.
지휘개체의 죽음은 허무했지만, 그 여파까지 허무하지는 않았다. 루프스는 앞서 두 마리의 지휘개체를 죽이고, 다른 두 마리의 지휘개체를 찾아냈다. 그에 반해서 루프스의 앞길을 막고 있는 일반적인 최하급 고블린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식귀는 수백에 이르렀다.
사실 루프스에게는 잔챙이처럼 느껴지는 적이었지만 그의 부족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저들을 잔챙이로만 생각하는 것은 루프스의 최측근인 세 고블린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부족에서 강자축에 든다고 할 수 있는 루프스의 자식들로서도 지휘개체와 비등할뿐이다. 눈 앞의 일반 식귀도 한수 아래에 있을 뿐 수십이 덤벼든다면 이겨낼 방도가 없다.
기실 루프스가 압도적으로 식귀들을 유린하고 있는 것도 지휘개체는 매우 드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만일 지휘개체에 이른 식귀의 수가 일반 식귀들과 비슷했다면 루프스도 도주 말고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루프스는 지휘개체의 수가 듬성듬성 소수인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고 있는 모습이 숙주들의 원래 모습이라면, 하급 고블린의 수가 그리 적을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수가 적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생각으로는 두가지가 가장 유력했다. 하나는 식귀들이 최하급 고블린과는 달리 하급 고블린에 들러붙는 경우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루프스는 바로 얼마 전에 보았던 지하실의 풍경을 보았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아마 그곳에 있던 시체는 들러붙는 과정에서 실패해 폭주하는 이들을 몰아넣은게 아닌가 하는 것이 그의 짐작이었다.
다른 하나는 식귀가 하급 고블린에게 들러붙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루프스가 그렇게 판단한 것에는 무엇보다 최하급 고블린의 몸을 차지한 식귀들에 비해서 하급 고블린의 몸을 차지한 식귀들의 비율이 지나치게 낮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프스의 짐작으로는 쿠알론의 부족에도 중급이나 상급에 오른 녀석들이 있을것인데, 그들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그의 자식들인 쿠알론과 트레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을 더욱 확신시켜주었다. 언뜻 보았던 드란으로 짐작되던 고블린의 모습이 최상급 고블린의 모습이었으니 다른 둘도 마찬가지일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둘이라면 분명히 그들 부족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루프스는 그들의 흔적을 조금도 보지 못했다. 그것이 루프스가 식귀들이 고블린들에게 들러붙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짐작한 이유였다.
어찌되었든 이들을 지휘개체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또 하나의 개체가 죽었으니 그 영향이 나타나는것도 뻔한 일이었다.
키에에에!
날뛰고 있는 루프스의 분신체 곁으로 다수의 식귀들이 몰려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조금이나마 연계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가 이전에 마주쳤던 식귀들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완전히 잃고 오로지 무식하게 적을 향해 달려들던 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식귀들의 모습이 루프스의 짐작을 짐작이 아닌 확신으로 바꾸어 주었다.
성격이 뒤바뀐듯이 루프스의 분신체를 향해 달려드는 식귀들은 전체에 비해 과반수는 차지하지 못했지만 제법 많은 숫자였다. 아마 저들이 그가 죽인 식귀에 의해서 지휘되고 있던 개체들일 것임이 분명했다.
루프스는 남은 지휘개체는 둘뿐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가 죽은 지금 식귀들의 반응을 보았을 때 루프스는 어쩌면 짐작이 틀렸을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제 남은건 하나가 아닌 둘일지도 모르겠군'
그렇지만 루프스는 생각해두었던 계획을 바꾸지 않았다. 적의 전력에 대해서 미세하게 상향시킨 루프스는 반대쪽에서 싸우고 있는 분신체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무렵 식귀의 다른 지휘개체도 하나가 죽은 것을 알아차렸는지 식귀들의 움직임 전체가 뒤바뀌었다. 분신의 힘을 빼듯이 툭툭 건드리듯이 견제 위주였던 공격 방식이 과감하게 뒤바뀐 것이다.
견제 위주의 공격으로도 루프스의 분신체는 식귀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몸을 돌보지 않는 과감한 공격법은 그런 피해를 더 키워주는 꼴 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식귀들의 움직임은 교묘했다. 날뛰듯이 움직이는 녀석들을 방패막이로 삼았기 때문이다. 통제가 풀린 식귀들이 루프스의 분신을 마구잡이로 공격했고, 분신은 그런 공격들을 떨쳐내면서 놈들에게 피해를 주어야 했다.
양쪽 모두 움직임이 과감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식귀들의 피해는 점차 늘어만 갔다. 그렇지만 과감한 움직임은 자연스레 빈틈을 유발한다. 크게 움직이면 자연스레 다음 공격까지 시간이 걸리게 되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통제되지 않는 식귀들은 자연스레 분신의 빈틈을 유발했다. 분신을 다루는 루프스도 그런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자연스레 드러난 빈틈을 향해 여전히 통제되고 있는 식귀들이 공격을 감행했다.
대부분의 공격은 분신의 역량으로 충분히 처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열손을 한손으로 막을 수 없듯이 빈틈을 통한 공격을 허용하는 일이 점점 늘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