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괴변
인간병사들과 변종 고블린들의 전투는 허무하게 마지막에 살아남은 고블린에 의해서 결국 병사들의 패배로 끝을 맺었다. 결국 간신히 살아남았을 뿐인 병사들이 도주했으며, 그들을 제외한 모든 적을 전멸시키고 홀로 남은 지휘개체의 변종 고블린은 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듯 했다.
그런 고블린의 뒤를 그들의 전투를 구경하고 있던 루프스가 쫓아가지 않을리가 없었다. 애초부터 그의 목적이 적으로 나타난 식귀들의 근원지와 찾을 수 있다면 부족을 나갔던 그의 아들들을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마침 되돌아가는 듯 보이는 고블린의 뒤를 쫓아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루프스가 놈의 뒤를 쫓았지만, 식귀로 예상되는 고블린은 그런 루프스의 움직임을 짐작도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실제로 루프스가 놈보다 한수 위의 격을 지니고 있으니, 식귀가 그의 모습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되돌아가는 식귀의 모습은 마치 기계와 같이 아무 감정도 내비쳐 보이지 않았으나, 그 행동도 기계와 같아 필요한 행동 이외의 행동은 행하지 않았다. 그렇달까 생리현상 자체도 없어보이니 정말로 기계와같이 보이기까지 했다.
정말로 생물은 맞는 것인가 의심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고블린은 정확히 루프스가 원하는 장소로 데려다 주었다.
'호오'
루프스는 눈 앞의 길을 보면서 눈을 빛냈다. 아래로 파고들어가는 굴과 같은 그곳은 기껏해야 고블린 두셋이 어깨를 나란히 하면 꽉 막혀버릴 듯 비좁은 곳이었다. 그렇지만 매우 잘 은폐되어있었기에, 가까이 오기 전 까지는 그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앞서 도착한 고블린은 이미 이 통로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함께 들어가면 아무리 격의 차이가 나더라도 이 좁은곳이라면 들통날 가능성이 있었기에, 일부러 거리를 두려는 의도였다. 통로가 무너지지는 않을지 이리저리 살펴보고, 안전하다 판단한 루프스는 통로로 직접 들어갔다.
통로는 무슨수를 썼는지, 주변의 흙은 단단히 굳어있어 지반을 받쳐 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직접 내부로 들어오고서야 눈치챘지만, 지하에 흐르는 공기 자체에 독기가 흐르고 있었다. 기실 그에게는 그다지 효용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건 그와 동족인 고블린들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기본적으로 독에 대한 저항력이 있는지 아니면 연구를 하면서 자연스레 저항력이 높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독에 대한 저항력이 높은 동족을 제외한다면 이런 공기속에서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평범한 인간들을 기준으로 둔다면 하루 이틀 만에 몸에 독이 쌓여 몸의 움직임이나 감각이 둔해질 것이고, 일주일이라면 독에 걸렸다는 자각도하지 못하고 죽어버릴 정도다.
'이런건, 우리쪽에서도 써먹을 수 있겠는데'
통로를 지나면서 루프스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러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기술적으로 부족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공기중에 퍼져있는 독은 통로 대부분에 걸쳐서 퍼져 있었다. 오로지 고블린들로만 구성되어있는 쿠알론의 무리들이라면, 이걸로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엘프들을 끼고 있는 루프스의 부족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독기가 전혀 없는 올바른 통로를 만드는게 좋을텐데 어째서 이렇게?'
그리고 독에 대한 저항성이 있다고 해도, 그건 저항성일 뿐이지 면역인 것은 아니다. 어느정도 강력한 독이 사용된다면 동족이라도 중독될 수 있으며, 이정도라면 컨디션 난조로 이어지는 정도는 될 수 있었다.
비록 위급한 상황이거나 격상의 적들을 상대할때가 아니라면 사용을 자제하고 있었으나, 루프스의 부족은 활발히 독의 연구를 이어가고 있었다. 특히나 이번처럼 식귀들 중에서 강력한 존재가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이 유용히 써먹을 수 있을테니 연구를 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루프스는 자신들의 독을 다루는 능력이라면 충분히 독기가 없는 올바른 통로를 만드는 것 정도는 가능하리라 보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활용법들이 떠올랐지만, 루프스는 그에 대한 생각은 일단 접었다. 지금은 이곳을 조사해서 식귀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걸으면서 나타나는 독기의 원천인듯 보이는 독지들도 확인했지만, 루프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루프스는 일단 써먹을 수 있는 것은 기억해두면서 계속해서 걸어갔다. 길이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해매이긴 했지만, 어느정도 통로를 경험해보니 제대로된 길과 아닌 길을 구분 할 수 있게 되면서 통로를 통해서 더욱 깊숙이 안으로 들어갔다.
통로의 깊숙하고 깊숙한 곳으로 움직인 루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블린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마을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폐허' 였다. 폐허라고 하더라도 고블린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광경을 보면 폐허라는 말이 더 알맞는 듯 보였다.
까득- 까드득-
'으음...'
루프스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하마터면 입밖으로 내버릴 정도로 당황스러운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까드드득
지하 깊숙한 곳에 지어진 하나의 마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식귀들의 끊임없는 식사였다. 그들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돌덩이던, 식물이던, 그도 아니면 동족이었던 이의 살점이던 상관하지 않고 닥치는데로 입 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곳이 폐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원인이었다.
식귀가 이미 빙의된듯 기계처럼 움직이는 그들도 문제였지만, 언뜻 아직 의식이 있는지, 아니면 통각 때문에 저절로 움직이는건지 그들에게 잡아먹히면서도 꿈틀거리는 고블린들이 소수나마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루프스가 놀라버리고 말았던 원인이었다.
이미 대부분의 인원이 식귀가 들러붙어서 회생이 불가능한 이들 뿐인지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좀만 더 깊게 생각하면 이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지속적으로 전력을 보충 할 수 있을테니,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암컷들과 일부 수컷들을 남겨놓았었나 보군'
그렇게 되면 지금 저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이들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었으나, 아마 저들은 식귀들이 몸을 차지하는데 실패한 이들이라고 루프스는 짐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대부분의 인원에게 들러붙는데 성공했다면, 그렇게 홀로 다니게 하거나 소수만이 뭉쳐있게 만들기 보다는 수백씩 뭉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더 나을텐데, 흩어져 있는 것에 나름 의심을 품고 있었던 루프스는 지금 그 의문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기분이었다.
식귀들이 이곳에서 식사를 시작한지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듯 보였다. 그들의 철보다 단단한 내구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손가락이 마모되듯 상처가 나 있었으며, 본래 마을이었던 영역보다도 더 넓어져 있는 것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루프스에게 단순히 식귀들의 출현이 그의 생각보다 제법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잠시 식귀들의 행동을 살펴보던 루프스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일부 살아있는 듯 보이는 식귀가 들러붙지 않은 고블린들이 보이긴 했지만, 하나같이 이미 이성따위는 어딘가로 날려보낸 듯 입가에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생리현상은 조금도 참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가 구해준다고 하더라도 결국 얼마 가지 못할듯했기에 그들을 구하자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만일 구한다고 하더라도 이 곳에서 구해낸 이들을 짊어지고 빠져나가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가 구하지 않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들어온 곳의 반대편 쪽으로, 또 다른 통로가 보이기에 루프스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만족할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