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괴변
루프스는 약간의 긴장감을 품은 상태로 앞으로 나아갔다.
스륵 스륵
아무렇게나 자라있는 잡초를 해치면서 루프스는 주변을 살펴보면서 걸어갔다. 영역의 경계까지는 거의 적이 있을 확률이 낮음을 알고 있었던 만큼 빠르게 움직였지만, 이곳에서부터는 그로서도 막무가내로 뛰어다닐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마주쳤던 적들은 그보다 약한 이들이 분명했지만, 앞으로 나타날 모든 적들이 그보다 약할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생각보다도 많은 수가 공격해온다면, 루프스로서도 버겁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조용하구만'
스륵 스륵
풀을 헤치는 소리를 제외한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 숲에서 그는 이 기이할 정도의 조용함에 위화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벌레나 새소리 둘 중 하나는 당연히 들려야하는데... 상당히 오랜시간을 걸었음에도 아무런 소리도 안들리는군'
그저 바람에 풀이 스치는 소리와 그가 지나가면서 자연적으로 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당연히 이런 기이한 숲의 모습은 저절로 그가 경계하도록 만들었다. 주위를 살피면서 앞으로 나아가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숲이 조용해진 원인을 발견 하게 되었다.
사아아아아-
풀이 스치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던 숲에서, 그의 귓가로 바람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다만 이번에는 지금까지 들리던 소리와는 확연히 달랐기에 그의 고개가 절로 소리의 원흉을 찾아갔다.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를 쫓아 지금까지보다 더욱 주의하면서 움직인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저건...'
그것을 발견한 그는 저절로 눈가에 힘을 주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아아아아아-
그곳에 있는 것은 과거 그가 보았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뺴뺴마른 거대한 두더지와 같은 그것은 다름아닌 그가 직접 마주한적이 있었던 식귀였다. 당시에 보았던 녀석은 이미 죽었으니, 같은 개체는 아니겠으나, 멀리서 보이는 놈의 모습은 그와 매우 흡사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바닥에 없드려 미동도 없이 숨만 쉬고 있는 모습이었다. 루프스가 들었던 소리도 놈이 내뱉고 있는 숨소리에서 기인한 소리였다.
경계를 약간 벗어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마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긴하지만, 놈들에게 그런 지능이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루프스는 놈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식귀를 확인한 그는 발소리는 물론 숨소리도 죽이고 놈을 향해 접근했다. 어쨌든 식귀가 적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이곳은 그의 영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놈을 이곳에서 처치해 둬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사삭- 사삭- 탓
빠각-!
어느정도 거리가 가까워진 시점에서 그는 빠르게 놈을 향해 내달렸다. 그가 달리는 소리에 식귀도 루프스의 접근을 눈치챘지만, 그에 반응하기도 전에 루프스가 재빨리 뛰어올라 도끼로 놈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끼이이이에에에에에-!!
갑작스런 루프스의 공격에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울렸지만 루프스는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놈을 향해서 도끼를 계속해서 내리쳤다.
퍼억! 퍽! 퍽!
마치 두 다리가 놈의 머리에 달라붙은 듯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루프스는 떨어지지 않고 도끼를 내리쳤고, 식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땅에 그 거대한 몸을 강제로 뉘이게 되었다. 그리고는 놈으로 부터 스멀스멀 나타난 흑백의 구체는 과거 그가 본것과 같은 형태의 것이었다. 입이 잔뜩 달려있던 구체는 곧 사라졌고, 식귀의 시체도 가루가되어 흩날려사라져갔다.
루프스는 놈에게서 나타난 흑백의 구체가 과거와 같은 형태였던 것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은폐시켰다. 그의 짐작대로 그가 헤치운 식귀가 일종의 감시병과 같은 역할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다른 식귀던지, 아니면 동족의 형태를 하고 있는 식귀든 둘 중 하나가 나타날거란 판단이었다.
다가오는 적들을 모조리 헤치워버리고 싶은 것이 그의 속마음이었지만, 어차피 한무리를 헤치우면 또 다른 무리가 오고 또 헤치우면 다시 오는 반복이 될 거란것은 뻔했다. 루프스는 굳이 이곳에 발이 묶여있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몸을 움직였다.
그의 정찰 활동은 며칠에 걸쳐 진행되었다. 무엇보다 적들의 본거지를 알아둬야 했으며, 식귀들이 동족의 몸을 차지한 원흉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하는 두가지가 그의 가장 우선적인 목적이었다. 그리고 둘 중 하나라도 알아내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정찰을 끝마치고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일단 한쪽 방향으로 한없이 움직이던 그는 몇일에 걸친 끝에, 멀리서 인간의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무언가를 막아내겠다는 듯이 결의를 내세우며 정면을 노려보고 있는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것은, 동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식귀들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가 발견했던 그 어떤 놈들과도 다르게 어느정도 통제가 되는 듯 비교적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흐음..."
'아무래도, 식귀들의 영역을 가로질러서 인간들의 영역에 까지 도착해버린 것 같군'
지금까지 마을의 폐허와 적은 양의 인골을 발견하긴 했었지만, 인간들의 모습을 확인하지 못했던 만큼 쉽게 추측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특히나 한껏 긴장한채로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은, 그들이 처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일단, 저 두 무리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해 두는 것도 좋겠지'
그렇게 생각을 마친 그는 충돌하기 직전의 두 무리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는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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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은 한껏 긴장한 상태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지금까지 보았던 적의 모습이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적의 모습이 있었다.
"저 녀석은 아무래도 지금까지 상대했던 녀석들과는 다르군"
선두에서 홀로 병사들을 견제하는 듯 보이는 한 고블린의 모습에 병사들을 지휘해야 할 지휘관은 나직히 긴장한채로 말했다. 적들의 어딘가 멍한 태도는 지금까지와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움직임은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동선의 얽힘 하나 없이 제자리를 찾아가듯이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군대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제대로 훈련된 정병의 움직임과 비교하면 어딘지 모르게 어설픈 느낌을 주는 움직임이기도 했으나, 하나 하나가 위협적인 저들이 군대라는 형식을 뒤집어 쓴 듯한 모습 자체가 그에게는 크나큰 위협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놈들은 아군이 아닌 생명체가 나타나면 일단 아귀가 달려들듯이 발광하던 녀석들이었지만, 지금의 모습에서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움직임을 보여주는 데 무엇보다 유력한 용의자는 저들의 선두에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고블린들과 마찬가지로 멍한, 어딘가 맛이 간듯한 눈빛이었지만 지휘관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저런 눈빛의 변종 고블린들에게 무수한 이들이 목숨을 잃은것을 알고 있는 만큼, 적의 모습을 경시하는 것 만큼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놈의 모습은 지금까지 나타난 변종 고블린과도, 그리고 그의 뒤에서 대열을 이뤄내고 있는 고블린들과도 달랐다. 크게 다르진 않았으나 한층 큰 덩치가 다른 고블린들에 비해서 한단계 높은 이라는 사실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들의 움직임이 거의 멈춰가는 지금, 이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 또한 알 수 있긴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들로서도 저들이 대열을 갖추는 모습에 방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명백히 차이가 나는 전력에 자살특공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고블린들이 대열을 잡는 동안 그저 바라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그들의 뒤편에서 땅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온 전장을 뒤덮을 듯이 거대한 먼지구름이 대기중인 병사들을 향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