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수성
땅을 긁는 소리를 내면서 열린 성문. 요새의 안에서 고블린들이 나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던 그들에게는 하나의 이변과도 같은 일이었다.
캬아아아앗!
다수의 고블린들이 지르는 괴성이 울려퍼진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뛰쳐나온 고블린들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된 것은, 아직 성문에서 벗어나지 못한 병사들이었다.
충차가 부서지면서, 망연자실해하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멍때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 당연히 충차가 부서졌음을 보고하고 말뚝을 비롯한 잔해의 일부를 챙겨서 후퇴하려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던 찰나에 성문이 열렸던 것이다. 그들이 충차를 이용해서 열려던 문이 열리자 순간적으로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멈칫 하는 사이 성문은 완전히 열렸고, 그곳에서부터 고블린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쉬익-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면서 날아간 검격이 한 병사의 목을 향해 빨려들어가듯이 나아갔다.
정확하게 병사의 목을 찌를 듯 했던 검격은 병사가 들어올린 방패로 인해 가로막혔다. 고블린들이 요새에서 뛰쳐나오는 시점에서 이미 저들에게서 도주하기는 힘들다는 판단을 내리곤 전투 준비를 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챙-
푹
튕겨나간 검을 보면서 반격을 위한 자세를 취한 병사였지만, 측면에서 들이치는 창을 보지 못했다.
"커헉"
강하게 찔러오는 느낌에 옆구리를 움켜쥔 그는 순간 몸 전체를 숙였고, 검격이 막힌것에 대한 분풀이를 하는 고블린에 의해서 그 목이 잘려나갔다.
성문 앞에서 대기중이던 병력들은 대다수가 충차를 조종하기 위한 병사들과 지키기 위한 보호 병력들이었기에 직접 전투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았다. 당연히 지금과 같은 상황은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고, 고블린들은 주변에 퍼져있는 적들을 향해서 돌진하기 시작했다.
///
성벽에 걸친 갈퀴와 밧줄, 그리고 그것들을 이용해서 올라가는 병력들을 초조하게 바라보던 무르디안은 문득 이상한 낌세를 느꼈다.
'뭐지?'
병사들을 지켜보던 그는 어떤 무거운 물체가 바닥에 끌리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순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던 그는, 멀리서 요새의 성문이 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성문이?!"
충차로 성문이 파괴된것도 아니고, 요새에 제대로 올라선 이도 없는 상황에서 열린 성문은 매우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공격과 미처 해체하지 못한 함정으로 피해를 본것은 사실이나, 아직까지 많은 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문이 열렸다! 저기로 남은 병력들을 몰아 넣어!"
그는 설마 고블린 따위에게 피해를 입을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무리하게 접근했던 것이 피해로 이어졌고, 그에 감정적으로 요새를 공격하기를 결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도 정작 실체가 드러나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고 점점 피해만 쌓여갔다.
당연히 아무런 수확도 없이 멍청한 행동으로 피해만 생겨나자 그로서도 걱정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되자, 쾌제를 부르면서 성벽에 올라가지 못하고 대기중인 병력들을 성문으로 몰아넣기를 결정했다.
성문이 열리고, 그는 그곳을 목표로 하고 부관들에게 병사들을 움직일것을 명령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일에 대비하듯 머리 위로 방패나 보호구를 들어올려 기습적인 공격을 방어하고는 그대로 성문으로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무르디안은 흐뭇하게 웃었다.
다만, 그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성문이 열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명령을 내린 그였기에 성문 앞의 충차의 잔해도, 그리고 성문에서 튀어나오는 고블린들에 대해서도 그 발견이 늦어졌다.
병력들이 전진하고, 생기는 잠깐의 틈 정도는 성문 앞의 병력들로 막아서는게 가능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게다가 마법사들의 마력만 충분했다면, 얼마든지 적들을 이 기회에 밀어버릴 수 있다는 희망적인 망상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벌어질려고 한 것이다.
성문에서 쏟아져나오는 고블린들의 수는 그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기껏해야 1,000정도의 숫자만을 생각했던 그에게, 그보다 배 이상의 고블린들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고블린들이 성문 앞의 병력들을 순식간에 밀어버리는 것 또한 예상하지도 못 한 일이었다.
///
루프스는 성벽의 꼭대기에서 주변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나 일순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일은 생각보다도 훨씬 잘 풀려나갔다.
많은 함정들이 마법에 의해서 순식간에 쓸려나간 것은 그에게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의 심복인 프리트가 정성을 들여서 만든 함정과 늪지가 순식간에 돌파되어 버린 것이니,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 인간들의 행보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마치 그와 고블린들이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는 듯이, 성벽과 가까운 거리에 진을 치려고 했던 것이 그 첫번째였다. 기껏 함정들을 일소해놓고, 자기 스스로 적의 함정을 새로 만들어주는 꼴이었다.
처음 인간들의 대응에 괜스레 긴장했던 그는, 적들이 아무 생각 없이 행한 일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최대한 피해를 줄 수 있는 상황을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시작된 것이 화살세례 였다.
당연히 그는 이 공격으로 적들이 일시적으로 후퇴해서 재정비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잠시간 적들이 후퇴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적의 행동은 또다시 그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일시적인, 정말 잠깐의 정비만 갖추고는 그대로 다시 요새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 한 것이다.
어쩌면 인간들이 상대할 것이 그와 고블린들이 아닌 다른 몬스터였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무르디안에 의해서 괴멸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진지를 쳤을 때, 일반적인 몬스터였다면 그대로 튀어 나왔을 것이다. 눈 앞에 자기보다 약해보이는 적들이 있을 경우 그대로 두고 볼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프스와 고블린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루프스가 인간들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잡은 이유였다.
적들이 성벽에 달라붙었을 때, 그는 일단 적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가 보기에는 한없이 약한 녀석들이었지만, 다른 고블린들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고블린들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절반 이상 끌고 왔지만 절대 다수는 하급이나 중급 고블린들의 차지였기 때문이다.
이미 몇번 인간들의 전력을 느낀 일이 있었기에 루프스는 저들을 얕보지 않았다. 그는 시간을 두고 적들의 전력을 가늠했고, 충분히 고블린들이 승리를 움켜 쥘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적들이 손도 못 쓸 정도로 강했다면 그를 비롯한 최고 간부의 역을 맡은 고블린들. 프리트와 파인피를 시작으로 한 그의 자식들과 최상급까지 어떻게든 기어 올라온 다른 고블린들 까지 적들에게 그 무기를 겨누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적들은 충분히 다른 고블린들이 상대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고블린들 보다도 인간들의 수준이 분명히 떨어짐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런 결론을 내리자 그는 다른 고블린들의 성장을 위해서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서 전력을 아끼기 위해서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가 내보낸 고블린들과 인간들의 병력이 본격적으로 부딪히기 시작했다.